# 85
나와 관련된 일들이라면 에이든의 아버지 때문에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에이든이 내게 꼬리친 것일 터. 그리고 분명 아직도 에이든이 나한테 파이와 헤어지면 자길 찾아오라고 한 말을 속에 담아두고 있을 거다.
어젯밤, 한창 그에게 시달려 쾌락에 울부짖을 때 파이가 그랬다.
[그 쓰레기 새끼한테 진짜 갈 생각이었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대답도 못 하고 웅얼거리는 걸 제대로 오해했는지 더 미친 짐승처럼 날 괴롭혔지. 덕분에 완전히 잊고 있다가 방금 떠올랐다.
맞아. 내가 평소보다 더 몸이 고단한 이유가 있었어! 하여간 저 속도 좁은 드래곤 같으니라고. 덩치는 저렇게 큰데 은근히 소심하단 말이야?
“파이가 더 나빠요. 에이든보다 더.”
그러자 파이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대범하게 턱을 치켜들고 따지듯 투덜거렸다.
“적어도 에이든은 파이만큼 날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힘들게 한 적은 없었다고요. 파이는 지금 날 너무 힘들게 하고 있잖아요. 가지긴 싫고 남 주기에는 아깝고. 내가 무슨 보기만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싫다고 한 적 없다.”
“지금 파이가 내게 털어놓은 말들을 직설적으로 설명하자면 싫은 거나 마찬가지인 거 몰라요? 파이는 내가 얼마나 상처받는지 모르잖아. 그저 자기 생각밖에 안 하지. 내 기분 같은 거 전혀 고려하지 않잖아!”
말하다 보니 감정이 격앙되어 울컥했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고 호흡을 고르며 감정을 다스렸다.
진정해, 치즈. 지금은 아니야. 파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으니까. 일단 황궁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오늘 실수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조금만 더 조심하자고.
“미안해요.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나 봐. 파이가 배려를 많이 해주는 거 알아요. 아는데… 그냥 조금 속상해서.”
나는 파이를 향해 어색하게 웃음을 짓다가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그러자 에이든과 레이라 역시 걸음을 멈춘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일단 웃어. 웃어야 해.
“에이든. 나 얼음 나무 보러 가도 돼요?”
“그, 그럴래?”
“레이라에게 성 구경 잘 시켜줘요. 내 친구니까 허튼수작 부리지는 말아요. 정중히 예를 갖추라고요. 알았어요?”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에이든을 향해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황궁 지하 쪽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일단 피하기는 했는데… 정말 바보 같아. 어쩌자고 지금 내 속마음이 그렇게 튀어나와 버리는 거냐고.
“바보는 에이든이 아니라 나네. 으이구, 정말 이 철딱서니 없는 나!”
결국, 내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치면서 자책했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얼음 나무가 있는 곳에 입성했다.
“안녕, 블랑.”
“왜 이제 와? 기다렸다고.”
그러자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얼음 고양이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매번 이름 부르기가 모호해서 그냥 쉽게 제국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얼음 나무는 엄연히 블랑 제국의 역사와도 같으니까. 얼음 나무도 좋다고 했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기다란 꼬리를 한껏 세우고 도도하게 걸어오는 블랑이 퉁명스럽게 툴툴거린다. 얼음 주제에 감정표현은 어찌나 솔직한지.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블랑을 향해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이제 겨우 한 달하고 며칠 지났는데? 내가 여길 매일 올 수는 없잖아. 왜? 에이든이 안 놀아줘?”
“에이든도 네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리기만 해. 걔 그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못 들어주겠어. 빨리 혼인이나 하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블랑이 내 손에 얼굴과 몸을 비비느라 바쁘다. 나는 그런 블랑의 애교를 보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손이 서늘해지기는 하지만 얼어버릴 만큼 차갑지는 않고 딱 기분 좋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데려왔던데? 누구야?”
“아카데미 다닐 때 알게 된 유일한 친구야. 레이라, 라고. 사실 에이든한테 소개나 해줄까 싶어서 찾아온 거라.”
“흐응, 그래?”
“왜? 별로야?”
이 얼음 성을 유지하는 얼음 나무답게, 블랑은 황궁에 출입하는 이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얼굴부터 목소리와 심지어 살기를 띠고 있는지까지도 느낀다고. 다만 인간의 운명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라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자신에게만 피해가 없으면 된다고 여겼다. 파이랑 아주 똑 닮아서, 사천 년을 살면 저렇게 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느낌이 좋던데? 에이든이 그렇게 어른스럽게 구는 모습은 처음 봤어.”
“오오, 정말이야? 둘이 잘 어울리더라고. 블랑 네가 좀 잘 설득해봐. 빨리 황후를 들여야 제국도 안정을 찾지.”
“딱히 황후를 들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아, 후계문제가 있던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블랑이 내 앞에 벌러덩 누워 배를 보이면서 어서 만져달라는 듯 다리를 휘저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고양이다. 나는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블랑의 배를 쓰다듬고 목과 머리도 몇 번이고 만져주었다. 지금껏 고양이를 만지지 못했던 한을 블랑에게 전부 풀겠다는 마음으로.
“남 일이라고 막 그러지 말고. 그러다가 대가 끊기면 아마 제왕의 자리가 피로 물들지도 몰라. 에이든의 형제들끼리 싸우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방심하다가 루즈 제국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얼음성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건 곤란하지.”
“그러니까 너도 두 사람이 잘될 수 있게 다리를 좀 놓아보도록 해. 황실이 안정을 찾아야 너도 안전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블랑도 말은 청산유수인데 가끔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느낌이 강했다. 지금껏 세상을 저 혼자 살아왔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블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고 침울해하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하던 것도 그나마 가라앉긴 했는데 완전히 해결되진 못한 채라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서 어깨가 바짝 굳어버렸다.
“치즈.”
순간 소름이 전신에 돋아나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직은 파이를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뜨면서 호흡을 고른 뒤, 고개만 돌려 뒤를 쳐다봤다. 두 눈이 마주치자 조금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표정에 옅은 미소가 담긴다. 덕분에 무겁기만 하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추태를 보인 부끄러움까지 없어지진 않았다.
“왔어요, 파이?”
“레이라가 네 걱정을 많이 해서 데리러 왔다. 이제 그만 올라가지.”
블랑은 파이가 내게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서 몸을 비비기 바빴다. 그런 블랑을 내려다보는 파이의 눈빛이 살벌해지긴 했으나 이내 다시 침착하게 가라앉는다. 아마 얼음 따위에게 질투하는 저가 어이없다는 걸 느끼기는 했나 보다. 그런데도 불편하다는 듯 파이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어서 일어나.”
파이가 더 기분 나빠하기 전에 나는 블랑을 들어서 바닥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올게, 블랑.”
“빨리 와. 기다릴 테니까.”
“…노력해볼게.”
내가 오고 싶다고 오는 게 아니란다. 파이가 허락해야 올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런 의미를 담아 블랑을 향해 방긋 웃은 뒤, 나는 파이가 내민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대화도 없이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이 침묵. 이 간극. 불편하다. 상당히.
“레이라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나는 모른 척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파이가 걸음을 멈추고는 또 고개만 돌려 나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내 눈만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내 눈동자가 익어버릴 것 같았다.
“파이……?”
“2층 정원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듯 내 물음에 대꾸만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른다. 나 역시 일단은 입조심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를 따라 2층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응? 여기 있다면서요.”
하지만 야외 정원 테이블에 빈 찻잔 두 개만 놓인 채로 텅 비어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정원 구석에도 두 사람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이니 박물관이니 그런 이야기를 하던데 외출을 한 건가. 일단 앉지.”
테이블 의자를 꺼내 나를 앉힌 파이가 내 대각선 옆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곧 베숄린을 입은 시녀가 쿠키와 딸기 주스를 건넸다.
차라리 레이라라도 있었으면 덜 불편했을 건데. 나는 왜 하필 그때 그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결국, 그 어색해진 상황에서 시선만 이리저리 피하며 쿠키를 조금씩 베어 먹었다.
“내가 네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가? 그렇게 느꼈다면 조금 충격인데.”
숨 막히던 침묵을 깨트린 파이가 한숨을 천천히 뱉어낸다. 덕분에 나 역시 쿠키를 입에 문 채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 손에 턱을 얹어놓고 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그 쓰레기 새끼만도 못하다는 말도, 상당히 상처받았다. 대체 왜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왜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어.”
그러게요.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나도 하필 레이라 앞에서 소리를 지른 걸 무척이나 후회하는 중이라고요.
사실 그게 내 속마음이긴 하다. 여태까지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다가 터트린 거지만 그 이야기를 뱉어낸 건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가 단둘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
나도 그를 따라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입에 남은 쿠키를 꾸역꾸역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얘기, 지금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되겠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만큼 네가 잘못하고 있는 건 없다고 보는데.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궁금해. 우리는 혼인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른 것뿐이라고 여겼는데. 내가 잘못 여기고 있던 건가?”
아무래도 굉장히 억울한가 보다. 아까 내가 에이든하고 비교를 한 것 때문에 더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든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데, 에이든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으니.
그나저나 우리가 서로의 의견이 맞질 않는 것뿐이었던가? 말을 저렇게 하니까 마치 내가 괜한 거로 시비를 건 것 같은 느낌이다. 파이에겐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 걸까?
“단지 의견 충돌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파이는 나와의 이견을 조금도 좁힐 생각이 없는 거잖아요. 그럼 그건 맞지 않는 게 아니죠. 벽과 대화하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요?”
어쩐지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참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이던가. 그래서 시원한 딸기 주스를 절반이나 한 번에 비워버렸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우리에겐 영원의 시간이 있어. 그런데 왜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조급해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거에 대해서는 이미 제 생각을 확고하게 대답한 것 같은데요? 애매한 관계는 싫어요. 파이가 내 남자라는 것을 증거로 남기고 싶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