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레이라의 커다란 눈이 더욱더 동그래진다. 확실히 제국의 황후라면 레이라에게도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았다. 일단 귀족이니까 신분으로는 문제가 될 게 없기도 하겠고.
“물론 강요는 아니야. 네가 집사와의 관계가 정 힘들다고 하면 내가 주선은 해줄 수 있다는 거니까.”
“제국의 황제라니……. 그건 너무 과분한 상대라서.”
“과분하지 않아. 레이라가 더 아까운걸? 그리고 그 사람, 마력도 사용할 줄 알아서 제법 유용해. 끊임없는 전쟁이 이루어지는 곳이긴 하지만, 아마 파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안전할 거야.”
“키다리아저씨가 살아있는 동안? 왜?”
“그 제국의 황제에게 도움받은 게 있었나 봐. 그래서 전쟁이 나면 도와주기로 했다고 해서.”
“…나 정말, 치즈 네가 보통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확실하게 느껴져. 내가 참 굉장한 친구를 두었다는 걸 말이야.”
레이라의 호기심과 동경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금 남은 셔벗을 싹싹 긁어 전부 먹어버렸다.
“다 파이의 인맥이지. 나는 그저 파이랑 지내다 보니까 알게 된 거고. 아무튼, 나도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제국의 황후가 되면 가문에서도 널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황후의 자리가 오르고 싶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잖아.”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일단 소개받아보고 잘되면 좋은 거고.”
십 년간 나만 기다렸다는 에이든의 그 뚝심이라면, 제 마음에 드는 상대를 평생 좋아할 거다. 일단 나하고는 그 금단의 열매 하나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니. 저도 나를 포기하고 다른 혼인할 상대를 찾고는 있을 거다. 말로는 제게 시집오라고 했지만 그건 거의 빈말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아무튼 머릿속으로 레이라 옆에 에이든을 딱 세워놓고 보니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았다. 조금 바보 같은 면이 있는 에이든에게는 레이라가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한번 기회 되면 소개는 해줄게. 인간사회는 인맥이 중요하다잖아? 보니까 블랑 제국도 꽤 살만한 곳인 것 같더라고.”
“너무, 먼 곳이지. 거기는.”
“멀기는 하지. 아, 저 옷 기억나? 저거 베숄린이라고 하는데 거기 전통의상이래. 황궁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저 옷을 입고 다니더라고.”
나는 벽에 걸려있는 얇은 천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다가 아차 싶었다. 레이라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아서 괜히 말했나 싶기도 하고.
“저, 저, 전통의상이라고?”
“아. 물론 강요는 아니야. 저거 은근히 편하더라.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저 옷을 입고 있었어. 그 황제는 멀쩡한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했으나 실패인 것 같다. 귀족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이라는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에이든. 좋은 신붓감을 찾아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네.
“흠흠, 그럼 우리 이만 나가볼까? 안에만 있기 갑갑했는데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그러자.”
내가 먼저 티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라도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열리고 파이가 우리를 밖으로 안내해줬다. 마력을 이용했는지 지난번과 똑같은 멋진 복도가 생성된 채고, 복도 끝에 마차가 이미 도착해있었다.
“레스토랑 예약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마세티앙 제국 내에서 놀면 안 돼요?”
“지금 그곳에 비가 많이 오고 있어.”
오전에 구름이 잔뜩 껴서 습도가 높더니 결국은 비가 오는구나. 나는 파이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른 뒤, 뒤따라 오르는 레이라를 쳐다봤다.
“어쩌지?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할까?”
“그러게.”
“…오! 나 좋은 생각이 났어!”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이 착착 진행되었다. 레이라에게 새로운 경험도 해줄 겸, 두 남녀에게 핑크빛 다리를 놓아줄 생각이 떠올라버렸거든. 그래서 나는 우리를 뒤따라 올라타서 맞은편에 착석하는 파이를 향해 외쳤다.
“블랑 제국으로 가요, 파이! 얼음 나무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줘야겠어요!”
파이의 말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레이라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파이가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둔한 것 같다.
“…블랑 제국은 왜 가자고 하는 거지?”
“친구 만나러 가는데 이유 있어요? 얼음 나무도 에이든도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도 좋다고 했단 말이에요.”
“손님과 함께 와도 좋다고는 하지 않았어.”
“에이든은 몰라도 얼음 나무는 언제든지 파이와 함께 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마 레이라를 만나면 더 좋아할 거예요.”
내 추측일 뿐이지만. 무엇보다 내 목적은 에이든과 레이라의 만남에 있다. 자기 일 외에는 관심 밖인 파이가 제발 다른 꼬투리를 잡지 말고 내 말대로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꼭 블랑 제국에 가야 한다는 간절함을 담아 파이를 쳐다봤다. 그런 내 눈을 마주 보는 파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턱을 치켜들고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다.
“네가 원한다면 가야지. 나는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다음에 이 일을 거론하면서 내게 상을 달라고 꼬리칠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뭐, 그때 일은 그때 가서 해결하는 거로 하고.
그래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순식간에 블랑 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벽 문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기사들에게 파이가 지닌 또 다른 패를 보여주자 그대로 통과되었다. 언제 느껴 봐도 세상 참 쉽게 사는 드래곤님이시다.
“치즈! 웬일이야? 갑자기 방문한다고 해서 놀랐어.”
얼음 성에 다다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근사한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에이든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내 표정을 본 에이든이 움찔 놀라면서 뒤로 한발 물러나긴 했다.
“황제 폐하는 바쁘실 줄 알았는데, 굉장히 한가해 보이네요?”
“나, 날 보러 온 손님이니까 당연히 마중 나오는 거지. 치즈는 만날 나만 보면 구박을 하는 것 같아서 속상해.”
“속상할 것도 없네요. 아, 저 친구랑 같이 왔어요. 레이라, 라고.”
나는 뒤따라 파이의 부축을 받으며 내리는 레이라의 손을 잡아 에이든 앞에 세웠다. 얼떨결에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 몇 초간 놀란 눈을 마주 보다가 동시에 당황하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어머?’
지금껏 레이라가 저만큼 얼굴을 붉히는 건 처음 본다. 저러다가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올 정도로 달아오른 채다. 에이든도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흠흠,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러더니 눈꺼풀을 빠르게 파닥거리며 갈 곳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제법,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우리 레이라도 아카데미에서 조신하고 예쁜 아가씨로 유명했다. 에이든도 성격만 제외하고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남자고. 기왕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으니 둘이 잘되길 바란다.
“누, 크흠, 누구라고?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치즈의 친구?”
“네. 내 친구예요. 내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요. 내 친구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괴롭혀줄 생각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예요.”
그리고 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붉어진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는 레이라를 향해 방긋 웃었다.
“레이라. 이쪽은 블랑 제국의 황제 폐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치치르자 왕국 비센트 백작가의 장녀, 레이라 아이리타 비센트라고 합니다.”
레이라는 확실히 귀족답게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주 공손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그 장면이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아서 괜히 내가 더 설레었다.
이렇게 직접 보니까 둘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둘 다 푸른 계열의 눈동자인데 오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의 은발과 레이라의 청회색 머리카락도 은근 비슷한 푸른 계열이라 진짜 영혼의 한 쌍처럼 보인다. 똑 부러지는 레이라의 성격이라면 에이든의 저 바보 같은 면을 잘 포장할 수 있을 것 같고.
“에이든. 우리 손님인데 이렇게 밖에 내버려 둬도 되는 거예요?”
“아… 이런, 실례했다. 우선 들어오도록.”
헛기침을 하면서 우리를 안으로 안내해주는 에이든이 평소의 바보 같은 모습을 숨기려고 애쓰는 게 눈에 다 보인다. 레이라 역시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더욱더 조신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내 눈치만 슬쩍 봤다. 그래서 나는 레이라 쪽으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어때? 괜찮지? 좀 멍청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
“치, 치즈. 그래도 제국의 황제 폐하이신데 그런 말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누가 듣는다고 우리를 어쩌지는 못해. 여기 위대한 블랙 드래곤께서 계시…….”
나는 손으로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파이를 정중하게 가리키며 조잘조잘 떠들다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맙소사. 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기 바빴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는 레이라가 눈동자만 굴려 파이를 흘끔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반대쪽으로 천천히 데구루루 굴리면서 점점 안색이 또 창백하게 변했다. 표정으로 보건대 내가 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드래곤이라는 단어에서 멈춰져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레이라? 내가 방금 했던 말은 가능한 잊어주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
“…으응.”
그 뒤로 레이라는 파이에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난번 프리센 왕국의 왕비 전하처럼 그저 잔뜩 기가 죽은 채로 파이의 눈치만 보기 급급했다. 물론 파이는 레이라의 달라진 행동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에이든의 뒤를 따라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나와 레이라는 서로 환호하기 바빴다. 레이라가 애써 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이긴 했다. 하지만 얼음 성이 워낙 예뻐서 그러려고 애쓰지 않아도 절로 반하게 될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처음 이 얼음 성을 봤을 때처럼, 레이라 역시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성에 대한 극찬을 퍼붓느라 바빴다.
“대단하다. 얼음 성이 정말 존재했구나. 이거 정말 녹지 않아?”
“그건 여기 주인께 물어봐. 에이든! 레이라가 궁금해하잖아요.”
앞장서서 걷기만 하는 에이든을 불러 세워서 얼음 성에 관해 설명을 하라고 시켰다. 처음에는 민망해하더니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르게 정중한 태도로 레이라와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그 틈을 노려 슬쩍 뒤로 빠져서 파이의 옆에 섰다. 그리고 레이라와 에이든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파이. 두 사람 잘 어울리지요?”
“나 같으면 저 쓰레기 새끼에게 소중한 친구를 먹잇감으로 던져주진 않았을 거다.”
“…대체 왜 그렇게 에이든을 싫어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그 이유의 대부분이 다 너와 관련된 좋지 못한 일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