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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83화 (83/132)

♬  83

파이하고의 이런저런 야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당황함을 감추려고 황급히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치즈, 그거 뜨거…….”

“컥!”

덕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찻물에 입천장이 다 데어버렸다.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올 정도로 입안이 얼얼하다.

“괜찮아? 치즈 너 뜨거운 음식 잘 못 먹잖아.”

“응. 방심했어. 뭐, 하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역시 차는 내 취향이 아닌가 봐. 셔벗으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혀로 화끈거리는 입천장을 살살 문지르면서 파이를 부르는 종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종을 잡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오면서 문이 열린다. 그 사이로 파이가 레몬 셔벗 두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파이를 슬쩍 노려봤다. 또 우리 이야기를 엿들었나 보다. 하여간 그놈의 마력을 저렇게 쓸데없는 곳에 낭비나 하고 말이다.

“파이. 내가 우리 얘기 듣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 적 없어. 전에도 차 종류는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며. 홍차를 마시겠다는 네가 이쯤이면 셔벗을 찾지 않을까 해서 가져온 거다.”

“…그 말 진짜예요?”

파이는 내 물음에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덕분에 얌전히 제 자리를 지키던 내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한다. 어쩐지 부끄러워지면서도 약간 감동했다. 짐승이라 그런지 눈치가 거의 신 급이다. 날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내 마음은 언제쯤 온전히 이해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저녁 식사는 뭐로 준비하면 되지?”

“음… 레이라?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다 준비할 수 있으니까.”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부채질로 열심히 식히면서 레이라에게 물었다. 레이라는 굉장히 부러운 눈빛으로 나와 파이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한다. 그래서 괜히 민망해져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아카데미 입학하던 그해. 레이라가 우리와 저녁 외식을 몇 번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기숙사에서 머물고 있던 레이라를 데리고 제국에서 유명하다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다녔었다. 그리고 내가 파이에게 하는 행동이나, 파이가 무심하게 내 말에 대답해주는 걸 굉장히 부러워했었다.

[그게 뭐가 부러워? 얼마나 차가운데. 너도 봤지? 딱 단답형이잖아.]

[그건 네 키다리아저씨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던데? 네 입장에서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옆에서 볼 때는 굉장히 이상적인 연인의 느낌이 강해.]

[여… 연인?]

[너는 피부로 와 닿지 않겠지만, 확실한 건 네 키다리아저씨의 모든 신경이 너에게 쏠려있다는 거야. 예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그건, 딸을 예뻐하는 아버지의 느낌과 거리가 멀다고.]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우리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귀가 쫑긋 세워져 집중해서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이 대리만족하기에 딱 좋아. 정말 완벽한 한 쌍이라서.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 치즈 네가 워낙 활달하니까 더 좋은 것도 있지만. 뭐랄까…….]

[뭐, 뭔데?]

[보기에 굉장히 잘 어울려. 흙과 나무처럼 서로에게 딱 맞는 것 같아.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느낌?]

그래서 더 희망에 가득 찼었다. 파이에게는 내가 최적의 상대라고 생각하면서 더 그에게 매달렸지. 결과적으로… 파이의 마음을 확인하게는 되었으나 아직 이렇다 할 관계정리가 되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이지만.

생각하려니 다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일단 파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뤘다. 지금은 레이라가 있으니까.

“레이라. 우리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나는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레이라에게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곧 번진 초점을 다시 맞춰 나를 보는 레이라가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바로 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뭐라도 상관없어. 치즈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나도 좋아.”

“그럼 우리 아카데미 다닐 때 같이 갔던 레스토랑은 어때? 거기 와인이 참 맛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려서 파이가 못 마시게 했잖아. 나 그때 너무 아쉬웠다고.”

“아, 기억나. 우리 귀족들은 와인을 물처럼 마신다고 했어도 믿지 않으셨지. 그때 네가 굉장히 억울해 했잖아?”

“맞아! 여기 뚜렷한 증인이 있는데도 파이는 들은 척도 안 했어.”

나는 콧방귀를 뀌며 옆에 서 있는 파이를 흘겨보았다.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가 그저 살포시 미소만 짓는다. 그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까지.

꼭 삐친 고양이를 달래는 손길 같다. 전 같았으면 모른 척 외면하고 ‘그럼 재미있게 놀도록.’ 하며 나가버렸을 텐데. 이런 행동이 자꾸 내가 애써 쌓아 올리는 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린다는 걸 알기나 할지.

“그럼 그 레스토랑으로 예약을 해놓도록 하지. 가는 김에 의상실에 들러 드레스 제작 진행 상황도 보도록 하고.”

“오, 그거 좋네요.”

드레스는 완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황실 무도회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치장을 어떻게 할지 열을 올렸을 거다. 확실히 내가 너무 매일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래. 온종일 이 드래곤에게 취해있는 기분이란 말이야?

“셔벗부터 다 먹고 나가지. 외출 준비를 해놓을게.”

“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간 파이를 쳐다보다가, 그가 가져다준 상큼한 레몬 셔벗을 맛있게 음미했다. 레이라 역시 홍차 대신 시원한 셔벗의 맛을 즐겼다.

“확실히 맛있어. 너희 요리사가 만든 셔벗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 주방장이 바뀔 거라는 말에 굉장히 가슴이 아팠어.”

“왜? 이렇게 맛있는데?”

“음……. 말했듯 파이는 은둔생활을 좋아해. 그리고 자기 영역에 낯선 사람이 오래 있는 걸 싫어하거든. 그래서 주기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교체해왔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거구나.”

“비슷해.”

그냥 자기 이외의 타인을 좋아하지 않는 거지만. 그래서 파이가 날 곁에 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래. 아무도 믿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시거든. 가족조차 믿지 못하니까.”

한탄 어린 한숨을 뱉어내는 레이라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레이라는 굉장히 지친 기색을 내보이곤 했다. 그래서 자기는 혼인을 하더라도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도 하고.

“세상이 그만큼 각박한 걸지도 몰라. 파이도 인간의 밑바닥을 보게 되면 싫어지게 된다고 하기는 했어. 그래서 내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나는 그게 내 인생의 행운이었는데? 네 키다리아저씨가 너의 입학을 허락해줘서 나는 너무 고마웠어.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잖아.”

우리는 서로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마주 보고 방긋 웃었다. 아마 레이라를 만나지 못했으면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울려 지내는 방법도 몰랐을 거다. 또 파이에게 용기 내 고백을 하거나 하룻밤을 보내 달라는 제안을 꺼내지도 못했겠지.

“나도 네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어. 그래서 말인데…….”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친구. 레이라에게 내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싶어서 망설였다. 파이와 의논하려고 했지만, 저 남자가 내 얘기를 가만히 들어줘야 말이지. 내가 무슨 이야기만 꺼내려고 해도 그저 하체를 비벼오고 어떻게든 밀착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구니까…….

“나, 네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 완전히 숨길 생각은 없는데… 아직 마음의 정리를 못 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

“…무서운 비밀이야?”

“으음, 글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그러자 레이라의 안색이 또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서, 설마… 너도 흡혈귀 뭐 그런……?”

“아니야. 그런 거.”

내 말에 레이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리브엘의 정체 때문에 꽤나 놀라긴 했었나 보다. 그러다가 리브엘이 흡혈귀라는 걸 알고 있으니, 내 정체를 알아도 그렇게 놀라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 얘기만 꺼내도 되겠지?

“내가 얼마 전에 블랑 제국을 다녀왔어.”

“블랑 제국? 그 얼음 왕국이라던?”

“응. 파이가 거기 황제랑 친분이 있어서. 그 제국에 태초부터 전해 내려오는 귀한 열매가 있대.”

“…좀, 그쪽 황제가 문제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

같은 역사수업을 들었던 터라, 그 역사학 교수님이 했던 말을 레이라도 기억하고 있나 보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그냥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한 미남이야. 아무튼, 그 귀한 열매가 늙지 않게 해주는 열매래. 그리고 그 황제를 통해서 내가 그 열매를 선물로 받았어.”

“늙지 않는 열매?”

“응.”

“그럼 혹시…….”

레이라는 방문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하게 물었다.

“네 키다리아저씨도 그 열매 먹은 거 아니야?”

“뭐?”

“좀 이상하다 싶었거든. 3년을 봐왔는데 3년 전의 모습과 지금 조금도 변한 것이 없으니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키다리아저씨 연세가 어떻게 되셔?”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저만큼 진지한 태도를 보이나 했더니. 레이라 말대로 파이가 지나치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나야 파이의 정체를 알지만,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럴 만도 하겠지.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대답한담?

“파이도, 특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는 해. 하지만 그 열매를 먹지는 않았어.”

“어쩐지. 보통 사람 같지는 않다고 생각은 했어. 마법사니까 뭔가 특별하긴 하겠지.”

굳이 캐묻지는 않는 레이라 덕분에 다행히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만 안도하며 셔벗을 한입 먹고 다시 설명했다.

“아무튼, 내가 그 열매를 받아서 먹게 되었어. 덕분에 파이처럼 특별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거든.”

“…저, 정말?”

“사실 체감을 느낄 수는 없어. 정말 달라진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대.”

“본인은 늙지 않는 대신 주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니까?”

“응.”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티스푼으로 셔벗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서로를 쳐다보고 작게 웃었다.

“치즈 네가 늙지 않고, 내가 할머니가 된다고 해도 우리 우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어.”

“물론이지!”

“네 키다리아저씨와 잘 되었으면 좋겠어. 기왕 그렇게 되었다면, 영원히 행복해졌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 될 것 같아.”

“레이라…….”

내가 이래서 레이라를 좋아해. 자신의 행복보다 친구의 행복을 빌어주는 저 착한 마음씨에 반하게 되었지. 나는 내 일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복잡한데.

“레이라도 행복해져야지. 내가 파이의 친구 중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두 눈 깨끗이 씻고 찾아보도록 할게. 여기 근처의 왕국 왕세자도 있는데 그 사람은 사생아가 너무 많아서 안 되고, 블랑 제국 황제는 어때?”

“…뭐, 뭐어?”

“아, 생각보다 미치광이는 아니었어. 남색가냐고 물었더니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왔냐며 펄펄 날뛰더라. 그런데 얼굴이… 딱 네 취향이긴 할 것 같아. 약간 체격도 예쁘고 얼굴은 더더욱 미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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