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하윽!”
아까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내서 허리를 흔든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허리와 엉덩이만 바쁘게 움직여 제 욕구를 전부 토해냈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세워지고 그나마 지어 보이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진 채다. 파르르 떠는 그의 눈이 내 하체에 집중하다가 다시금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허기짐이 가득한 숨을 토해내며 조금 더 빠르게 하체를 치댔다.
“큭, 하… 빌어먹을.”
잇새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내가 더 깜짝 놀랐다. 가끔 정사를 치르는 도중에 지금처럼 거친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미묘했다. 내가 아는 파이는 절대 욕이라는 걸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응, 으응, 앗! …힉!”
아까의 쾌감은 새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이 번지는 느린 속도로 내 정신을 좀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살에 휘말려 순식간에 퍼지는 물감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체를 강타하는 자극에 빠져들어 버렸다.
찌걱, 찌걱 애액에 젖어 들어가는 소리가 잦아지면서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가에 열이 몰려 뜨끈해진다. 눈꼬리를 벗어난 물방울이 뺨을 스치고 또르르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는지.
“파이, 파이, 아! 아아! 파이… 흑!”
곧 엄청난 전율이 찾아와 경련하며 날카로운 교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파이 역시 숨을 헐떡거리며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순간 시야에 불꽃이 튀었다.
전신이 짓밟히는 것처럼 과한 절정에 다다라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쩍쩍, 젖은 살끼리 빠르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우뚝 멈춰선 파이가 탄성을 뱉어내며 긴 숨을 흘린다.
“하아… 이렇게, 네 안에 나를 가득 채워 넣어도… 아쉽다니. 정말 큰 일이다.”
치솟는 전율에 온몸을 경련하듯 떠는 나를 그가 와락 끌어안는다. 굉장히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내 얼굴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혀로 가볍게 핥아 올렸다. 그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지독한 쾌락으로 물들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긋났던 초점이 맞춰지면서 시야가 선명해진 상태로 그를 마주 봤다.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빙그레 웃는 미소에 순간 하체가 뜨거워진다.
“…아!”
“이런. 이러면 곤란하지. 설마 아직도 모자라?”
“흑, 아니야, 아니라고!”
최선을 다해 부정하는 내 뺨에 입을 맞추는 그가 내 손에 들러붙은 끈적한 무언가를 제거해줬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아읏… 흐…….”
주륵,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의 두툼한 살덩이가 쑥 빠져나간다. 흥건하게 고여 있던 애액과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하얀 정액이 뒤섞여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 희열에 들뜬 몸이 진정되지 않아 바들바들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나를 꼭 감싸 안은 그가 소파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어땠어?”
“…힘들어요.”
“그거 말고. 평소보다 더 잘 느끼는 것 같던데.”
“모, 몰라!”
사실 그의 말대로 평소보다 더 느꼈던 것 같기는 하다. 자세가 다르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얇은 천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긴장되어 몸이 움츠러드니까 하체에 힘이 가해졌다. 내 길이 좁아지니까 파이도 버티지 못하고 사정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좋았어. 언제나 좋았지만 네가 쾌락에 취한 표정이 오늘따라 더 매력적이어서, 그래서 더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체위 방법이 적혀있던 책도 있었던 것 같은데.”
“보지 마요. 그런 거. 파이는 안 봐도 돼.”
“왜?”
“그러다가 내가 죽어요. 지금도 충분하니까 더는 연구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훗날을 위해서 알아 둬야지. 일단 책을 찾아봐야겠어.”
슬프게도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나쁘지는 않지만… 이 이상 힘들어질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는 하다. 정력이 좋아도 너무 좋은 남자인데. 그렇게 하고도 아직 부족한 건가.
“졸려요, 파이.”
“자. 푹 자도 돼.”
씻지도 않아서 찝찝하긴 하지만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기운이 달리니까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어진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건 과열되어 터져버린 발전기 때문에 정전이 된 그런 느낌이었다.
* * *
어느 순간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셔서 강제기상을 당했다. 푹 자고 나서 눈을 떠보니 어제 그와 짜릿한 밤을 보낸 숲속의 반구, 일명 별장이었다.
레어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일어나는 건 또 오랜만이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머물던 저택 이후로 처음인 듯했다. 뭔가 상쾌한 기분이라 마음에 든다. 물론 몸이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레이라는 어제 무사히 도착했대요?”
“응. 무사히 돌아가서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어쩐지 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목욕을 마친 뒤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파이의 손길이 오늘따라 담백하다. 아침에 날 깨워줄 때부터 그랬다. 그리고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파이?”
“응.”
빗질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방심한 틈을 타서 허를 찌르려고 했던 건데, 역시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굉장히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과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에 솜털이 오스스 돋아났다.
“…뭐 잘못 먹었어요?”
“먹은 거라고는 어제의 너뿐인데?”
덕분에 나만 낯 뜨거움을 느끼며 손부채질을 했다. 표정만 순수하지 말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배고프면 말해. 식사 준비해줄게.”
볼수록 참 묘하다. 오늘따라 그가 낯설게 느껴진다. 최근에도 내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긴 했는데 지금은 조금 더 과해졌다. 무엇보다 표정이… 정말 파이와 절대 어울리지 않아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그런데 파이, 갑자기 왜 표정이 그렇게…….”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라서 말이다. 자꾸 보다 보니 어제 리브엘의 순수하고 조신한 표정이 겹쳐 보이기도 하고.
…어라? 설마 리브엘의 표정을 따라 하고 있었던 걸까?
내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원래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표정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웬 표정 연기예요?”
“표정 연기라니.”
“방금 리브엘 따라 한 거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봤는데?”
“…그런 적 없어.”
이제야 진짜 파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이게 어울려. 이래야 파이답지.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러자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내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쥐어 품에 안아주었다.
“그래서 레이라는 어디로 초대해요?”
익숙한 그에게 안겨 어깨에 뺨을 묻고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런 내 등을 따뜻한 손으로 쓸어내리는 그가 옅은 코웃음을 흘린다.
“왜 웃어요?”
“또 일을 벌여놓고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는 네가 언제쯤 철이 들지.”
“아니 뭐, 레어로 초대하고 싶은데 그건 파이가 힘들다면서요. 그리고 내가 먼저 레이라가 머무는 곳에 가려고 했는데, 파이가 초대하겠다고 말 바꾼 거잖아요.”
그래놓고 또 내 탓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어 내리는 파이가 또 다정한 미소를 내게 보인다. 덕분에 뾰족하게 날이 섰던 기분이 금세 둥글게 변해버렸다.
이해는 한다. 그가 왜 레이라를 우리 쪽으로 초대하는 건지. 내가 레이라의 저택에 가면 떨어져 있어야 하고, 그럼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다.
대체 언제까지 품 안에 싸고돌려는 건지 모르겠다. 넘어져서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건 이미 졸업할 때도 지나지 않았나?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조금 상처가 생긴다고 해서 쉽게 죽는 것도 아니건만.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세상이 멸망하려는 것처럼 너무 과하게 반응을 하니 참 문제다. 과잉보호도 적당히 해야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둘이 안전하게 있을 공간이 있다면 바로 여기 아닐까 싶은데.”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나는 파이가 생일선물로 준 그 별장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이라와 바깥을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아마 여기라면 레이라도 꽤 마음에 들어 할 거다. 쉽게 가질 수도 구경할 수도 없는 그런 장소니까.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다음 날, 나는 파이와 함께 직접 레이라를 데리러 갔다. 그리고 이동마법으로 레이라와 함께 별장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괜찮아, 레이라?”
“으응. 괘, 괜찮아.”
레이라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줄은 몰랐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대로 얼어붙더니 안색이 창백해지기까지.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보는 우리의 눈에는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레어의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역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다.
“날 부를 일이 생기면 그 종을 흔들어. 소리는 나지 않지만 내게는 들리니까.”
“알았어요, 파이. 고마워요.”
다행히 파이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고, 식사나 간식이 필요할 때면 그가 남기고 간 종을 흔들어 불렀다. 그리고 레이라와 내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잠옷과 홈드레스를 준비해주기까지 했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레이라와 못다 한 수다를 떨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나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후식으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던 레이라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행히 아까보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는지 안정된 표정이었다.
“왜?”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전날의 설렘을 느꼈거든.”
차마 나도 그래! 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제도 그제도 밤마다 파이와 그런저런 일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정말 내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절륜하신 드래곤의 아래에 깔려 지독한 쾌락을 받아내는 일은 체력과 감정소비가 엄청난 것이었다. 그에게 결박된 채 이성을 잃고 흥분에 취해 아무 생각도 없이 헐떡거리기 바빴다. 정말 딱 숨이 멎기 직전에서야 그가 파정했고, 그때면 이미 녹초가 되어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거지. 예전에는 매일 밤 어떻게 고백을 해야 파이가 나를 받아줄 수 있을지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에 빠지다가 잠들었는데. 요즘은 생각할 시간도 없을 만큼 나를 괴롭히니까.
게다가 어제의 파이는 평소와 또 조금 다르기도 했다. 일일이 챙겨주는 거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긴 하지만 조금 더 과해졌다. 또 표정이나 행동이 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더불어 전보다 더 집착이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치즈?”
“…아, 응?”
“너 얼굴이 빨개. 어디 아픈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