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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8화 (78/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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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나를 한쪽 팔로 번쩍 안는다. 또 공중에 둥실 뜨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답삭 잡았다.

“이, 이거 무섭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파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바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내 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방금 그가 못 참겠다고 했던 건 나와 좀 다른 뜻인 것 같다. 오전부터 만찬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 때문인 듯.

곧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하도 그가 얄미워서 피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 뒤로 확 밀어버려서 그대로 눕혀지게 되었다.

“…이거 놔요.”

“치즈.”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또 가슴이 멎는 줄 알았다. 확실히, 두 달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 같던 그였는데. 점점 내 심장을 더욱더 날뛰게 만드는 표정을 지어 보일 줄도 알고.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선홍빛 눈동자가 지금은 까만 속눈썹 사이에서 잘게 흔들렸다. 위로 곧게 뻗은 새까만 눈썹 끝이 오늘따라 조금 쳐진 것 같다. 굉장히 처연해 보이는 표정이라 내 가슴이 다 욱신거렸다.

“난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진다.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같던 그가 지금은 시린 밤하늘의 달빛 같다. 어딘지… 보듬어주고 싶은 그런 느낌.

나는 내 뺨을 매만지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내가 원하는 걸 해주면 되잖아요? 내가 언제 세계를 멸망시켜달라고 했어요? 아니면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했나요?”

“네 부모를 죽인 원수가 바로 나다.”

“…일부러 죽였어요? 그거 아니잖아.”

“내가 왜 에이든 그 쓰레기 새끼가 네게 손대는 걸 싫어하는지 아나? 이십 년 전 내게 시비를 걸어 그 싸움을 일으킨 이가 바로 에이든의 아비다.”

“…그래요?”

참 이상하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고 덤덤했다. 증오에 휩싸이거나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일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복수를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그에게 흠뻑 빠진 상태라서?

“에이든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이미 죽은 사람을 원망한다고 내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진 않아요.”

“그가 아니었으면 네 부모님이 살았을 거고, 너 역시 나와 아무 인연을 맺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서 지낼 수 있었겠지.”

“그 또한 운명이고 순리예요. 지나간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내가 파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요.”

정말 이게 옛날 사람이라 사고방식이 꽉 막힌 건지.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한 쪽은 내가 아니라 파이 같다. 아니지, 이미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 교육도 힘들 거고, 세뇌라도 시켜야 하는 건가?

“잘 들어요, 파이. 만약 그게 그렇게 죄책감이 들면 평생 잊지 않고 평생 미안해하면 돼요. 그리고 그만큼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줘요.”

“그러고 있어.”

“그리고 내가 정말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나랑 혼인하고 계약서에 도장 꾹 찍죠.”

하지만 파이는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것만큼은 도무지 허락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 참, 이해할 수가 없네. 대체 그깟 혼인 하나를 해주지 못해서 저런 태도라니.

“정말 고집통머리하고는. 그럼 정말 이대로 나랑 이렇게 살 거예요? 계속?”

“앞으로 천 년만 살아보고 그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아니, 그래서 천 년 뒤에 내가 파이 싫다고 뛰쳐나가겠다고 하면요? 날 내보내줄 거예요?”

“그것도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정말 이 짐승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람?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면서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럼 천 년 동안 나한테 손대지 마요.”

하여간 가끔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는 그가 얄미워 죽겠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속 터져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래곤의 머릿속은 일반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일반인이 천재를 따라 할 수 없는 것처럼.

“과연 치즈 네가 천 년 동안 내 손길을 바라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퍼지는 불빛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게 또 어찌나 소름이 오싹 돋아나던지. 아까 그 울적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찾아온 야한 분위기에 허벅지 사이가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에요?”

“이렇게…….”

내 위로 올라탄 그가 무릎으로 드레스 치맛자락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 내 다리에 밀착시킨다. 걸리적거리는 게 싫어서 속바지를 입지 않은 게 실수였다. 매끄럽고 말랑한 내 허벅지 사이에 그의 단단한 피부가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은근슬쩍 느릿하게 문질러 와서 속옷 아래의 여성지가 움찔.

“윽.”

“살갗에 닿기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는 네가 과연… 천 년을 나와 살을 섞지 않고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다리를 바짝 모아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내 어깨는 그에게 잡힌 채고 내 위에 그가 나를 가두듯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일부러 이러는 게 확실하다. 레이라와 보낸 시간 동안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이용하다니. 파이가 이렇게 치사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지금 나와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은근슬쩍 접촉을 시도하다니.

나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열심히 표정을 굳혀가며 그를 노려보려고 애를 썼다.

“아까 말했듯 파이가 약속을 어겼으니까 저리 가요!”

“피차일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온 흡혈귀가 살아서 나가는 건 사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너와 인연이 있는 자가 아니었으면 이미 죽였어.”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잘했다고 칭찬해달라는 거예요?”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지. 네게 칭찬이나 위로받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더군.”

그래서 그렇게 관심법으로 표현하는 걸까? 안 하던 약한 척을 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처음 내게 하룻밤을 제안하던 적극적인 네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그러니 나를 거부하지 마라. 널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옭아매는 그가 고개를 숙여와 입술을 겹쳐온다. 그리고 뒷목을 손으로 감싸 잡고, 다른 손으로 드레스 안의 허벅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결국, 그의 짜릿한 키스와 끈적한 손길에 굳건히 쌓아둔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건만. 어느새 그 요염한 분위기에 휩쓸려 속옷이 흥건하게 젖어 허벅지 사이가 축축해졌다.

또 이렇게 속절없이 그에게 넘어가는 내가 밉다. 그 다정한 손길과 뜨거운 눈빛을 거부하지 못할 만큼,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을까?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억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응, 하아… 아읏. 간지러워…….”

허벅지를 모아 엉덩이 근육에 한껏 힘을 주어 비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움만 쌓여갔다. 역시 그의 뜨거운 살덩이가 그리워지는 때다.

하여간!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꼭 이렇게 나를 괴롭혀야 하는지.

그런데 오늘따라 먼저 들이대질 않는다. 평소라면 자기도 참지 못해서 하체를 비벼올 텐데. 아직 드레스도 벗겨주지 않고 골반과 허벅지만 매만지며 진득한 키스만 이어갈 뿐이다.

“파이… 흑, 왜……. 아아…….”

“고민하고 있었어.”

“…고민?”

내 목덜미와 어깨에 입술을 대고 혀끝으로 살살 문질러와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픽, 웃으면서 조금 더 위로 올라와 귓불을 할짝거리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접촉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가능할 것 같기도 해. 이를 악물고 참아내면 천 년쯤이야 거뜬하게 버틸 수 있지.”

…이 짐승이,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렇게 만질 수 있게 허락한다고 했어요? 웃겨, 진짜! 내가 당신의 뭐라도 돼?”

“내 여자니까.”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내 여자. 내 사람이라고. 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파이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발작하는 것처럼 크게 뒤흔들려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적어도 연애를 하는 지금, 넌 내 것이다. 널 만지는 건 나로 족해. 절대 누구에게도 손끝 하나 허락하지 마.”

지금 파이가 이러는 건 리브엘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그보다 아까 그가 ‘내 여자’라고 한 말에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댔다.

항상 내 아이라고만 하던 그였는데. 그래서 언제쯤 그에게 여자로 보일 수 있을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기대하지도 않았다. 예상치도 못한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감격에 겨워 감정이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겨우 그 한마디에, 아까 화가 났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겁박하는 건 아니었다. 울지 마라.”

뜨거운 물기가 눈가에 몰려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내가 무서워서 우는 줄 알고 당황한 파이가 놀라서 나를 품에 안고 일으켜 안아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그거 때문에 우는 거 아닌데. 하지만 굳이 우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가 별것도 아닌 일에 운다고 핀잔을 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어깨에 뺨을 기대며 남은 눈물을 모조리 흘려보냈다. 한번 나온 눈물이 멈출 때까지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치즈.”

“응.”

“지난번에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는데.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 파티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었던가?”

위로하듯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는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뱉는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어쩐지 조금 불안해진다. 왜 갑자기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덩치 큰 드래곤치고 눈치가 너무 빨라서 내가 혹시나 그때 말실수를 하지 않았나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리에 흥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파이가 그날 이후로 식도락 여행을 시작했던 것 같다. 주말이나 방학 때마다 파이하고 함께 근처 왕국부터 시작해 제국 수도의 디저트 가게는 전부 섭렵했었다. 나는 내가 먹는 걸 좋아하니까 파이가 나한테 맛있는 걸 먹여주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가 내 말을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말했잖아요. 아카데미에서 가장 재미있게 배웠던 것이 요리였다고. 내가 만든 쿠키도 맛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파티쉐가 되려고 했던 것이, 내게서 도망쳐 너 혼자 네 미래를 만들고 싶었다는 뜻인가?”

어쩐지 굉장히,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서 심장이 빠르게 뛴다. 어딘지 불만스러운 말투라서 더 초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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