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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소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진다. 쌓아놓은 고민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지도.
“많이 힘들었어? 왜? 집에서 혼인하라고 닦달해서?”
레이라의 푸른 눈동자가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처럼 옅게 진동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여 숙인 채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가에 가자마자 어머니가 청혼서를 내미시더라고. 그중에 골라서 혼인하라고.”
“그거 서류만 보고 결정하라는 거지? 정말… 나 같으면 탈출계획을 세워서 집을 뛰쳐 나왔을 거야.”
과거에 나도 계획을 세워서 몰래 뛰쳐 나왔었지. 바로 붙잡히긴 했지만, 그건 파이가 인간이 아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레이라의 경우는 나와 다를 거다. 레이라에게서 귀족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레이라는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는 건 지옥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같은 귀족 출신끼리 정략혼으로 맺어져 고귀한 피를 탄생시키는 의무밖에는 없는 것 같다고. 태어나서 자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야 한다’라는 거라더라. 레이라는 그게 마치 곧 도축될 가축의 삶 같았다고 회고했다.
“나도 충분히 동감해. 그런데 또, 그게 쉽지는 않더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치즈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내가 뭘 또 대단해……. 이미 도망치다가 잡혀서 다시 들어오게 된 건데.”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잖아. 나는 차마 하룻밤을 보내자는 말도 못 하겠더라. 고백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쉽지는 않지. 파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 먹힌 거야. 보통 남자였으면 날 이상한 여자로 취급했을지도 몰라.”
그러자 레이라도 살포시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정리한다. 그래서 나도 레이라를 따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아직 모르겠어. 아마, 이번 황실 무도회를 마치고 돌아가면…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민이 많겠다. 그래도 언제든지 상담할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다른 건 못해줘도 네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레이라와 친구가 된 이후로 귀족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레이라가 나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비록 부모님이 계시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지원해주는 후원자가 있고, 크게 걱정할 만한 고민도 없었으니까.
…파이하고의 관계를 제외하면 정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기는 했고.
“아, 맞다. 레이라. 황실 무도회는 언제야?”
“열흘 뒤야.”
“나 너무 기대돼. 아카데미 졸업파티 때 무도회 가보고 이번이 처음이라서!”
“치즈 네가 좋아할 만한 느낌일 거야. 졸업파티 무도회하고는 또 비교도 되지 않을걸? 아! 너 그때도 무알코올 샴페인 먹고 분위기에 취했었지?”
“그랬지. …그거 주스 아니었어?”
“샴페인이었어. 주스였으면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을 거야. 그렇게 잔뜩 흘렸으니까.”
우리는 아카데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날을 그리워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앞으로도 서로의 우정이 변치 않기를 바랐다.
“치즈.”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파이가 들어왔다.
“파이! 리브엘은요?”
혹시라도 파이가 리브엘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면서 물었다. 그러자 파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본다. 나는 지지 않고 턱짓으로 레이라를 가리키면서 미간을 확 좁혔다. 레이라도 있으니까 적당히 하라는 눈치를 준 거다.
“밤이 늦어서 레이라를 돌려보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만 나오도록 해. 저택에 데려다 줘야지.”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요?”
나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버리다니.
“레이라. 아쉬워서 어쩌지?”
“그러게……. 그래도 무도회 전까지는 내가 제국에 머물고 있으니까. 언제든 저택에 놀려와. 나, 다른 약속을 잡아둔 건 없거든.”
“아, 정말? 그럼 내가 파이하고 같이 놀러 갈게! 미리 연통을 보낼 테니까 그때는 아침부터 쭉 같이 있자!”
“그래.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자도 되고.”
“그럼 더 좋지! 기숙사 때 기억이 새록새록 하겠다, 그렇지?”
나는 꼭! 레이라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은 의지를 가득 담아 파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의외로 파이의 눈빛이 아까 리브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 사납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이 기회다.
“파이. 나 레이라네 저택에서 하루 자고 와도 돼요?”
“기왕이면 레이라를 우리 쪽에 초대하는 게 낫겠지. 레이라만 괜찮다면.”
오, 저 드래곤이 웬일이래? 정말 요 몇 달 사이에 너무 달라진 파이다. 그거나 이거나 뭐라도 좋아.
“레이라는 어때?”
“나도 상관없어. 어차피 제국에 일찍 와있었던 건 휴양이나 하려고 온 거니까.”
일단 파이하고 다시 의논하고 연락을 주기로 한 뒤, 우리는 방을 빠져 나왔다. 단짝과의 추억을 또 쌓을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파이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아까 레이라가 타고 왔던 마차에 다다르자, 분위기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파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차 근처에 서 있던 리브엘 때문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치즈?”
언제나 그랬듯 상큼하게 웃는 리브엘의 미소는 겨울도 봄처럼 화사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파이와는 다른 의미로 참 예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었는데. 그도 그 나름의 고통이 있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저 평범한 인간이길 바라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응! 오랜만에 추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 모처럼 만찬에 초대받았는데 내가 끝까지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리브엘.”
“괜찮아. 나도 즐거웠어. 예상치 못하게 치즈 너와 함께 식사하게 되어서 영광이었지.”
내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고 다가온 리브엘이 자연스럽게 내 오른손을 잡아 쥐었다. 놀란 게 있다면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매우 차갑다는 거다. 그리고 가볍게 말아 쥔 내 손을 들어 손등과 손가락 끝마디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 역시 손만큼 서늘했다.
더 놀랐던 것은 리브엘이 내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는 거다. 지금껏 한 번도 내게 손댄 적이 없던 사람인데.
나는 재빨리 내 양옆에 있는 파이와 레이라의 표정을 살폈다. 레이라는 조금 창백하게 변한 안색을 하고 바짝 긴장한 눈치다. 파이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눈빛으로 리브엘을 죽이겠다는 듯 강렬한 광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리브엘은 개의치 않았고, 달콤한 초콜릿색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다음번에는 내게도 시간을 내어줘.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아서 말이야.”
“어… 응, 뭐. 그럴게.”
“황실 무도회에도 꼭 참석하길 바라. 그곳에서 너를 다시 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
여전히 다정한 모습이다. 아카데미에서도 가끔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참 착하고 어른스러운 남자라고 느꼈었다. 혀에서 살살 녹는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눈동자는 오늘따라 그 당도가 더 진해 보였다. 아주 그냥 사방이 녹아내릴 것 같은, 꿀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져 머리가 다 빙그르 도는 기분이다.
“아, 알았어. 나도 그 무도회를 아주 기대하고 있어. 벌써 드레스도 맞췄는걸?”
“응. 들었어. 그 완성된 드레스를 입고 한껏 꾸민 네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돼. 그 어떤 여신보다 아름다울 거야.”
아이, 정말. 이런 이야기를 눈앞에서 대놓고 하면 민망하다니까 그런다. 나는 수줍게 몸을 배배 꼬고는 양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리브엘도 근사하게 차려입으면 아마 연회장이 빛날 것 같아. 눈이 부셔서 멀어버릴지도?”
일부러 똑같이 응수하자 리브엘의 뽀얀 뺨이 발그레해진다. 이런 걸 보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이긴 한데.
“이제 그만 보내야지. 치즈, 이리와.”
막 솜털이 간질간질할 때쯤. 파이가 내 팔뚝을 잡아채듯 당겨서 리브엘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레이라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보았다.
리브엘이 나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아닌데, 왜 반응들이 이러는 건지.
“급한 일정이 생겨서 우리가 동석하지는 못하겠고. 이쪽 집사가 무사히 저택까지 바래다줄 거다.”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그럼 치즈 잘 부탁드릴게요. 치즈, 다음에 또 봐?”
황급하게 두 사람을 보내려는 파이와 눈치껏 파이에게 예를 갖추는 레이라가 마차에 후다닥 올라탄다. 그러자 리브엘도 아쉽다는 표정으로 조금 주저하다가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조심히 가! 레이라! 리브엘!”
리브엘이 타자마자 바로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크게 소리를 치며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팔을 흔들었다.
“뭐야, 파이! 손님을 초대해놓고 이렇게 보내버리면 어떡해요!”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팔짱을 끼며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등 뒤에서 껴안아 정수리에 뺨을 얹어놓은 채 한숨을 푹 내쉰다. 곧 마력으로 환각을 펼쳐놓았던 복도가 다시 원래의 동굴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력 유지하느라 꽤 힘들었다. 두 번은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해. 내가 이만큼, 너를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평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면 잘라버릴 정도로 표현을 하지 않더니. 요즘은 아픈 척도 잘하고 힘든 척도 잘한다. 연극배우로 나가면 굉장히 대성하시겠어.
“흥. 누가 모른다고 했어요? 아무튼, 오늘은 파이가 먼저 나와의 약속을 어겼으니까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요. 알았어요?!”
“약속은 치즈 네가 먼저 어겼지.”
“내가 뭘요?”
“나는 레이라만 초대했다고 여겼는데, 흡혈귀를 이곳에 들여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파이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경계를 했었나 보다.
“레이라하고 같은 왕국의 같은 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내가 레이라만 초대하겠다고 한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거 좀, 놓고!”
어느새 두 팔로 내 어깨와 배를 감싸 쥔 파이 때문에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차피 힘으로 반항해봐야 내 체력만 바닥나게 되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냥 몸에 힘을 쭉 뺐다.
그러다가 파이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가볍게 문질러 와서 흠칫 놀랐다. 내가 또 간지러움을 엄청나게 잘 타는 걸 아는 사람이 이런다! 덕분에 나는 온몸을 격렬하게 비틀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간지러워! 학! 하, 하지 마!”
“다른 놈 앞에서 아까처럼 웃지 마라. 네 손을 잡을 수 있는 것도, 네가 웃어줄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나뿐이니까.”
방금 내가 리브엘한테 했던 행동 때문에 꽤 짜증이 나긴 했었나 보다. 하여간 이 질투 대마왕 같으니라고. 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지르기 전에, 그가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흥!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못 참아!”
“참지 마. 나도 못 참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