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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6화 (7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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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딜 봐서 나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여기 작은 소녀 보여? 이 뒤태는 아무리 봐도 치즈 넌데?”

소녀가 있었나? 사실 그림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레이라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쳐다봤다.

“…어? 진짜네?”

전체적으로 흐릿한 색감 사이로 아주 가볍게 뛰노는 모습의 작은 소녀가 얼핏 보이긴 한다. 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어릴 때 자주 입던 새하얀 원피스를 보아하니 진짜 나다.

“신기하다. 난 처음 봤어. 이거 파이가 그려준 거거든. 꽤 어릴 때였으니까.”

“아, 정말? 너의 키다리 아저씨는 재주가 참 많으시구나. 부럽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진짜 또 옛날 추억이 물씬 느껴졌다. 파이가 예술 쪽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레이라와 함께 그림을 오랜 시간 감상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고, 파이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림 감상을 마치고 나서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보존마법이 걸린 유리 뚜껑으로 보호되고 있는 셔벗을 함께 즐겼다.

“그런데 넌 정말 그 집사랑 정리하게?”

시원하고 상큼한 레몬 셔벗과 달콤한 복숭아 셔벗이 반반 섞여 있어서 일단 복숭아 셔벗을 다 해치웠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레이라에게 물었다. 묻기가 조금 그랬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자 레이라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우리 쪽은 사정이 좀 달라서. 난 거의 포기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랑 혼인을 할 생각도 없어서 우선 왕궁 시험을 보려고.”

“시도는 해봤는데 안 된 거야?”

“응.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고백만 했어. 차였지만. 그런데 그 사람 상황도 이해가 가더라고. 사정 들어보니 나 같아도 안 받아줄 것 같긴 해.”

“무슨 사정인데?”

“아픈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대신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데. 내 마음대로 떼를 쓸 수는 없는 상황이더라고.”

“아. 그럼 일단 어린 여동생부터 다 키우고 독립을 시키면 혹시 또 모르겠네.”

“…과연 그때가 되면 테인의 마음이 바뀔까?”

“아픈 어머니를 혼자 두진 않을 거 아니야. 일단 지금이야 여동생이 있으니까 상관없겠지만 그 여동생이 다 커서 혼인을 하게 되면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걸?”

“그럴까…….”

“집사라는 일이 거의 저택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는데 자기 집을 돌볼 여유가 어디 있겠어. 그러니 언젠가는 혼인할 생각이 들겠지.”

그래도 영 희망이 없다는 듯 침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레이라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진짜 그 얄미운 집사 놈 엉덩이를 뻥뻥 걷어 차주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치즈 너는 어떻게 된 거야? 아주 네 키다리 아저씨가 너한테 껌뻑 죽는 거 보고 나 좀 놀랐어. 확실히 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호기심을 가득 담은 레이라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서 또 심장이 간질거리면서 쑥스러워져 녹아내리는 셔벗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결과적으로는 뭐, 원하던 걸 손에 넣긴 했는데 나도 문제는 있어.”

“아, 그 혼인문제?”

“평생 연애만 하자는데…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 언제 어떻게 변할 줄 알아?”

“그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응. 혼인하면 언제고 당연히 아이를 바랄 텐데 자기는 가능하지 않다는 거지. 나는 솔직히 아이라는 건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그만인데.”

결국, 나와 레이라는 서로 바라보며 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이라도 나도 그냥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걸리는 게 많은 건지. 그냥 서로 사랑하는 거로는 안 되는 건가?

“그런데 리브엘이 인외 종족이라는 거, 무슨 말이야? 너 알고 있었어?”

그러다가 순간 떠오른 기억에 조금 놀란 눈으로 레이라를 쳐다봤다. 아까 분명 파이가 인외 종족이라고 했을 때도 레이라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아서.

내 물음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레이라가 셔벗을 한 입 우아하게 떠먹었다. 그러나 얼굴이 조금 경직된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도 몰랐었는데 우리 왕국에 공작가가 하나 있어. 비플라츠 공작가인데 그쪽 가문이 좀…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특별한데?”

“왕국 수도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영지에 터를 잡은 공작가야. 듣기로는 지금까지 그 비플라츠 공작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손가락에 꼽는대.”

리브엘이 그 공작가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라가 다시 셔벗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털어놓는 거야. 이건 기밀이니까 치즈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았어. 나 입 무거운 거 알면서! 내가 말할 상대라면 파이밖에 없고 파이는 돌덩이잖아.”

“맞아. 돌덩이. 정말 적절한 비유 같아.”

돌덩이에 아주 공감하는지 레이라가 고개까지 끄덕거리면서 활짝 웃었다. 그러나 곧 다시 표정을 갈무리한 뒤에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이었다.

“그 가문에서 악마와 인간의 혼혈로 태어난 사람이 몇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주 역할을 하고 있대.”

“오, 악마가 정말 있기는 하나 보다.”

드래곤도 있는데 악마라고 없을까 싶기도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주가… 흠, 네가 아는 학생회장이었던 리브엘 저 사람이야.”

“가주… 뭐?!”

나는 기겁을 하면서 허리를 바짝 세우고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떴다. 레이라가 내 반응이 아주 적절했는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몇백 년을 살아온 사람치고 너무 멀쩡해 보여서 솔직히 나도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사실이라는 걸 내가 두 눈으로 확인하니까…….”

“어, 어떻게 확인을 해? 악마의 혼혈은 뭐, 좀 다른가?”

“…햇빛에 노출되면 피가 증발한다고. 그래서 아카데미 다닐 때는 가문의 사람에게 그 피를 공급받았다고 하더라.”

사람의 피를 마시다니.

그건 좀 끔찍하다. 내가 파이의 피를 마시고 부작용으로 이상해졌을 때, 나도 모르게 파이의 목덜미를 물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흡혈하는 악마라니.

“그랬구나. 리브엘이 그런 상황인 줄은 몰랐어. 꽤… 힘들게 살아왔겠네.”

“힘들게 살아오다니?”

“오랜 세월을 살면서 마음대로 외출도 못 했을 테고. 누군가의 피가 없으면 생활할 수 없으니, 결국 누군가를 해쳐야 하는 거잖아? 나라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파이도 그 비슷한 상황이라 더 이해가 간다. 파이 역시 주기적으로 나 몰래 야생 동물을 잡아먹고 있다는 걸 안다. 먹이사슬 최상에 자리한 짐승이니 당연한 거지만.

하지만 리브엘이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라면… 꽤 까다롭긴 하겠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악마로서 살아갈 수도 없는 상태일 거다. 정체성에 대해서 굉장히 혼란스러울 거고.

아, 그래서 그렇게 감정 기복이 심했던 건가? 가끔 학생회 일을 도우려고 리브엘과 함께 있을 때면 어딘지 불안해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늘 초조해하던 것과는 별개였다.

특히 처음 입학하던 해에 체육대회를 하던 날도 이상하긴 했다. 아직 오전인데도 어딘지 얼굴이 바싹 말라서, 꼭 해골 같아 보일 정도라 걱정스러웠다.

[리브엘.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그, 그래? 난 괜찮은데……. 오늘 해가 정말 강렬해서 그런가 봐. 내가 좀… 저혈압이라.]

머쓱하게 웃는 것도 버겁다는 듯 힘없이 숨을 고르던 그였다. 그러면서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더라. 그래서 학생회장 자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었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잠시 사라졌었다. 곧 다시 나타났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까와 다르게 너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여서 굉장히 의아했었다.

그때는 단순하게 배탈이라도 났었나보다 했다. 하지만 지금 리브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좀 알겠다. 그때도 햇빛 때문에 힘들어했었다는 것을. 만약 그의 정체를 진작 알았다면 그늘막이라도 설치하라고 했을 거다.

“치즈는 참 대단한 것 같아.”

“내가? 왜?”

“보통 인간과 악마의 혼혈이라고 하면 괴물이라고 하잖아? 나는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어. 얼마나 무서웠다고.”

레이라가 당시 상황을 떠올렸는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굉장히 부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손으로 팔뚝을 슥슥 문질렀다.

“다행히 그 사람이 내게서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 나를 그냥 살려둔 거야. 아니었으면 아마 진작 온몸의 피가 다 뽑혀서 죽었을지도 몰라.”

“무슨 정보?”

“…그 사람이 너에 대한 정보를 원했거든. 그 사람이 원하는 정보는 굉장히 단순했어. 네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는지, 오늘 기분이 어땠는지, 뭐 그런 질문이었으니까.”

“리브엘이? 왜?”

“그 사람이 널 무척 좋아하고 있거든.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리브엘이 내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걸 눈치는 챘지만, 설마 레이라를 이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설마 네게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다만 내가 테인과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그랬구나.”

어쩐지 리브엘이 조금 괘씸해지려고 한다. 권력을 이용해서 레이라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수를 썼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에이든도 아카데미 시절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몰래 사람을 풀어뒀다더니. 나 여러 사람에게 굉장히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기는 했었구나. 딱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지만.

“혹시 리브엘이 내 피를 원했어?”

“그건 아니래. 본인이 털어놓기를… 네 곁에 있으면 평소에도 사람의 피를 빨아먹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대.”

“어떻게?”

“네 정기가 굉장히 좋다고 했으니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아, 저런. 그것참 난감한 상황이네. 그래서 그렇게 내 주위를 알짱거렸구나. 리브엘이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다 할 표현을 정확하게 하지 않아서 얘도 참 순진한 남자다 싶었는데.

어떻게 보면 파이와 비슷한 상황인 거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아니까 선뜻 다가오기도, 손을 내밀기도 어렵고 미안한 상황.

…그래도 리브엘은 아이가 없어도 혼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네. 우리 파이는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니까?

“그래도 치즈 네가 이해해줘서 참 고마워. 털어놓고 나니까 조금 후련하다. 굉장히… 미안했거든.”

“뭐가 미안해. 우리 사이에. 너도 별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너희 왕국의 공작가 가주라며. 너보다 높은 신분이 명령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도 레이라는 미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참 좋은 친구를 얻었구나 싶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치즈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좋아. 덕분에… 그나마 의지를 할 곳이 있어서 버텼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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