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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5화 (7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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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파이가 리브엘 너만큼 트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속상해.”

“치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파이라는 사람이 네 키다리 아저씨야? 그때 제국 수도에서 봤던 그 붉은 눈동자?”

“응. 내가 5년 넘도록 짝사랑을 했지. 결과적으로 잘되긴 했는데 약간의… 의견 충돌이 생겨서.”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리는 치즈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세상 다 무너지는 것처럼 울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레이라 말처럼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파이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어. 리브엘의 말처럼 사랑이면 다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

그러자 순간 리브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에 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왜 이렇게 섬뜩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메인 요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조용하던 식당에 때마침 나타난 시종들이 접시를 거둬 정리하고는 새로운 요리를 내왔다.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선보인 요리 역시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치즈가 주방장을 찬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맛있었다. 다만 리브엘이 치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서 경계하느라 온전히 즐기지는 못해서 아쉬울 뿐.

그러다가 리브엘이 요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걸 슬쩍 본 치즈가 조심스레 묻는다.

“리브엘은 소식하나 봐. 아니면 원래 입이 짧은 편이야?”

“사실 저녁 식사를 좀 이르게 했어.”

“아, 그랬구나. 입에 안 맞는 줄 알아서 걱정했어.”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서 세 번째 안에 들 정도로 맛있네. 이 정도면 제국 황실의 요리를 맡아서 해도 될 정도야.”

주방장을 칭찬하는데 치즈가 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도 리브엘의 말에 찬성하긴 한다. 정말 이런 음식만 먹고 지내면 다른 요리를 먹기 힘들어질 정도로 맛있어서.

“그런데 치즈.”

“응?”

리브엘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금 고기를 잘라 입에 넣은 치즈를 향해 방긋 웃었다.

“내 후각이 좀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데… 이상하게 치즈 너한테서 다른 종족의 냄새가 나. 그것도 네 피에서 말이야.”

* * *

오늘도 여전히 맛좋은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져 행복하게 즐기고 있는 사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리브엘의 입에서 나와 순간 멈칫했다.

“…으응? 무, 무슨 말이야?”

“치즈는 예전의 치즈와 똑같은데 전과 다르게 변한 느낌이 들어서 뭔가 했거든.”

리브엘이 저렇게 촉이 좋았던 사람이었나?

“변했어? 내가?”

“나쁜 뜻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말했듯 내 코가 좀 예민하다 보니 아까부터 좀 이상했어. 그런데 이제 좀 확실하게 느껴져서.”

그 냄새가 보통 인간도 느낄 수 있던 거였나?

나는 팔뚝을 들어 올려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확실히 나는 내 냄새도, 레이라나 리브엘의 체취도 잘 안 느껴지는데. 그냥 달콤하고 진한 소스 향만 코를 자극할 뿐이다.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긴담?

갑자기 난감해져서 당황하던 사이에 식당 문이 벌컥 열리고 파이가 들어왔다.

오오, 나의 구세주!

“파이! 뭐야, 내가 만찬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 그놈이군. 비실이. 저놈은 초대한 적이 없는데?”

또 한껏 인상을 팍 쓰는 파이가 불쾌한 어조로 나직하게 읊조린다. 그래서 나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레이라와 함께 온 내 친구이자 내 손님이에요.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닌걸? 파이도 인사해요. 2년 전인가 제국 수도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봤던 리브엘, 우리 아카데미 학생회장이었던… 같은 아카데미 친구랍니다!”

리브엘의 정확한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레이라와도 친분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같이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데도 한껏 구겨진 파이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콕콕 누르며 표정 좀 펴라고 말없이 윽박질렀다. 물론 그런다고 웃을 파이는 아니지만.

“손님이라…….”

파이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내 옆에 서서 리브엘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리브엘의 초콜릿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 참, 정말! 내 손님 불편하게 왜 이러는 거람?

“파이. 나하고 약속한 걸 어겼으니까 나도 파이가 원하는 소원 안 들어줄래요.”

“우리 치즈에게 인외 종족의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것도 이렇게 역겨운 냄새를 가진 불쾌한 놈이라니.”

화기애애했던 만찬 자리에 벌레가 난입한 것처럼 엉망으로 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왜 이래요? 내 손님한테! 당장 사과하고 나가요, 당장!”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방금 파이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라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인외 종족의 친구? 누가? 리브엘이… 인외 종족이라고? 인간이 아니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두 눈을 끔뻑거리며 레이라를 쳐다봤다. 혹시, 너도? 라는 표정으로 보자, 레이라가 자기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리브엘과 파이의 눈치만 살피기 시작했다.

“치즈.”

“…으응?”

“내가 이놈과 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레이라와 네 방에 가 있어.”

“아, 아직 식사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

“네 방에 후식을 준비시켜뒀으니까 어서.”

후식도 후식이지만. 리브엘을 이 무시무시한 드래곤과 단둘이 남겨놨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리브엘은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린다.

“치즈 네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이분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난 괜찮으니까 자리를 피해줬으면 해.”

이렇게 말을 하니까 또 피해 주지 않을 수도 없고. 어차피 레이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해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뭐 아무렴 어떠냐 싶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허벅지에 얹어둔 냅킨을 거뒀다.

“파이. 내 손님이니 정중하게 대해요. 파이답게 정중히. 알았죠?”

“저놈 하는 거 봐서.”

“…놈이라니. 내 친군데…….”

“나는 네게 저런 친구를 허락한 적 없어. 일단 어서 나가.”

어쩐지 짐승마냥 으르렁거리는 기분이라 어깨를 한껏 모아서 바르르 떨었다. 일단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급히 레이라와 식당을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닫힌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왜 저러는 거야? 손님들 보기 민망하게. 미안해, 레이라. 파이가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아휴, 난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헷갈리네.”

“나는 네 키다리 아저씨께서 좋은 선택을 하신 거로 생각해. 네 말대로 이유 없이 그럴 분이 아니잖아?”

“그렇겠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레이라. 그럼 마침 기회가 왔으니! 내 방을 보여줄게. 이쪽이야, 이쪽.”

우선 파이가 저렇게 예민해진 상태에서는 멀리 피하는 것이 좋다. 리브엘이야 뭐……. 설마 죽이진 않겠지. 어쨌든 내가 내 친구라고 설명을 했으니까 파이가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긴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레이라의 손을 잡고 낯선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살폈다.

음, 그러니까…… 식당에서 오른쪽이니까 저쪽인가?

“치즈?”

“어. 잠깐만. 방향이 좀 헷갈려서. 이쪽 맞을 거야. 가자.”

사실 여기 복도가 현재 파이의 마력에 의해 구조가 조금 바뀌었다. 파이의 말로는 환각이라고 했다. 한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평평한 복도의 바깥으로 동굴 원형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원래는 바닥도 울퉁불퉁하지만 전부 다 마력으로 만든 평평한 길이 새로 깔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알고 보면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동굴을 원형 그대로 남기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 중 가장 쉽고 확실한 효과라고 했다.

…나한테는 마력을 사용하는 건 정신력 소모가 엄청나서 안 좋다더니 정말 순 거짓말쟁이다. 하여간 너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대니 문제야.

“여기 정말 예쁘긴 한데, 나 아까 정말 놀랐어. 식당 창문 밖은 그냥 벽이던데? 그럼 창문을 왜 달아놓은 거야?”

아카데미 시절처럼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걸으면서 옛 추억에 사로잡혀있는 사이. 레이라가 복도를 여기저기 신기하게 쳐다보며 묻는다. 그래서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파이가 알려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거래. 여기에서 외부와 연결된 곳은 아까 네가 마차를 타고 왔던 그곳뿐이야. 사방이 다 막혀있어서 밖을 보려면 아예 나가야 해.”

물론 완전 다 거짓은 아니지만, 드래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레어를 만든 것도 아니니까.

“그렇구나.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치즈 네가 왜 집에 가길 싫어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해.”

“이해해줘서 고마워. 역시 레이라밖에 없어! 그래도 공기는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막 가끔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약간 정신적인 문제 같기도 해.”

“응, 그 기분 알아. 밀폐된 공간.”

“맞아. 강의실에서 암막 커튼 쳐놓고 촛불 하나 달랑 켜놓은 채로 무서운 이야기를 했을 때처럼.”

“으, 그건 좀 싫었어. 나 그날 무서워서 잠도 못 잤잖아.”

“맞아. 그래서 우리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들었지. 손 꼭 붙잡고. 이렇게!”

아카데미 기숙사는 2인 1실인데 운 좋게 레이라와 한방을 쓰게 되어 서로 많은 의지를 했었다. 만약 레이라가 없었으면 아카데미의 생활이 그렇게 기억에 많이 남진 않았을 것 같다.

“여기가 내 방이야. 파이를 제외하고 여기에 들어온 최초의 사람이 된 걸 환영해!”

“와아……. 엄청나다!”

방 안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탄성을 터트리는 레이라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침실 벽에 걸려있는 베숄린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 저걸 정리한다는 게 깜박했다. 너, 너무 자연스럽게 떡하니 걸려있네.

“이건, 잠옷이야? 속이 훤히 비치는데……?”

때마침 베숄린을 본 레이라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천 끄트머리를 흔들어 보이며 묻는다. 그 말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응. 뭐, 그 비슷해.”

“…혹시 네 키다리 아저씨의 이상한 취미라든지? 너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뭐,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맞는다고 하면 파이가 변태로 오해받을 것 같아서 대답을 못 하겠다. 그러자 레이라의 얼굴도 조금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아닌 척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모른 척 다른 것에 시선을 돌려 여기저기 구경했다.

화려한 침대부터 시작해서 벽에 달린 촛대조차 고급스럽다며 레이라가 끊임없이 감탄했다. 그러다가 화가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는 액자를 한참 동안 감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화백은 치즈 너를 아주 잘 파악한 것 같아. 딱 치즈네. 통통 튀는 너의 매력을 전부 담았어.”

진지하게 그림을 평가하는 레이라의 말에 나는 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실 저 그림은 십 오년 전에 파이가 그려준 거다. 나를 보고 그렸다기에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난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색감을 잔뜩 쏟아부은 추상화라 내가 이렇게 엉망이냐고 비웃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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