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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4화 (7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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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리브엘이 재잘거리는 치즈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를 쳐주면서 그저 기분 좋게 웃는다. 분명 부드러운 미소인데 왜 이렇게 오싹해 보이는지.

순간 리브엘이 치즈의 목덜미에 그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박아서 흡혈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에 핏기가 싹 내려가 버린다.

아무래도 저 둘이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무, 물론 리브엘이 다른 여성에게 함부로 그러는 건 못 봤지만. 그가 치즈에게 유난히 지극한 관심을 주고 있으니까 불안해졌다.

그나저나 치즈의 키다리 아저씨는 왜 안 보이지?

“이쪽이야.”

말하면서 손수 문을 열어주는 치즈가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인다. 그래서 리브엘이 먼저 들어갔고, 나는 치즈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분은?”

“아, 내가 이번에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거든. 뭐, 어디엔가 가 있겠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치즈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는다. 차마 거기에 대고 지금이라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을 못 하겠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식당이라고?”

화려하고 넓은 실내는 마치 왕궁의 연회장을 연상케 했다. 왕궁보다 더 세련되고 더 우아해서 눈 둘 곳이 없을 만큼 대단히 호화스러운 식당이었다. 무도회도 열 수 있을 만큼 너무 넓어서 실내 가운데 놓인 원탁이 꼭 장난감 같아 보일 정도다.

“평소에는 여기 사용하지도 않아. 오늘은 손님이 오시니까 기왕이면 특별한 곳에서 식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자, 어서 앉아.”

치즈가 내 손을 잡고 이미 식사준비가 된 원탁으로 데려가서 의자에 앉혀주었다. 둥그런 원탁의 의자 네 개 중 한 곳은 비워두고 셋이 모여 앉았다. 그러자 한쪽 문에서 세 하인이 에피타이저를 들고 들어와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리브엘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따로 준비를 못 했어. 메인요리는 스테이크와 양고기로 준비했는데 괜찮아?”

“물론이지.”

“아, 다행이다. 사실 이게 다 내 취향대로 준비한 거라서. 레이라는 나하고 좋아하는 음식이 비슷하거든.”

“나도 이 자리에 합석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그런데 여기는… 창문이 없네? 신기한 구조야. 식사 후에 저택을 좀 구경시켜줄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정말 사방이 매끈한 벽이다. 더 이상한 건 창문도 없는데 창틀이 있고 그 위에 커튼까지 매달려있었다. 사실 밀폐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맑아서 저게 그냥 벽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정말 신기하네.

하지만 치즈는 끙, 소리를 내면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이 집 주인께서 허락한 건 이 공간뿐이라……. 다른 곳에 허락 없이 들어가거나 함부로 손대는 걸 가장 싫어해. 위험한 곳이 많아서 그렇다고 그랬어.”

“위험한 곳? 보통 저택은 아닌가 봐?”

“…글쎄.”

치즈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리며 난감해한다. 그러자 리브엘이 다시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려 대화를 이끌어갔다.

“치즈 넌 마지막 졸업식 때 보고 못 봤는데도 여전히 아름답네. 전보다 더 성숙해진 느낌이기도 해.”

“그, 그래? 리브엘은 뭐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새삼 멋지긴 하다.”

“아카데미의 최고 여신이라 불리는 너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참 낯 뜨겁게도 리브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렇게 대부분 치즈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래서 치즈의 뽀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한다. 듣는 나도 민망해질 정도인데 당사자인 치즈는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릴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곧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앞에 접시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음료와 함께 전채 요리로 나온 쉬림프 카나페를 맛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뭔가 특별한 소스가 가미되어 달콤새큼한 맛이 어우러진다. 지금껏 먹어본 쉬림프 카나페의 맛과 조금 달랐다. 치즈가 왜 미식가가 되었는지 알 정도로.

“어때? 입에 맞아, 레이라?”

“최고야. 치즈 네가 부러워질 정도로.”

“우리 주방장이 좀 대단하지. 그래서 앞으로 사흘에 한 번씩 주방장에게 요리를 배우기로 했어.”

“요리? 너 파티쉐가 되겠다더니 네 키다리 아저씨가 허락한 거야?”

“응. 네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다 지원해주겠다고 그래. 일단 기본적인 요리부터 다시 배우고 유명 파티쉐를 물색해서 직접 코치를 받게 해주겠다고.”

“잘됐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 이게 다 빚이라서 나중에 내가 돈을 벌어 천천히 갚기로 했어. 언제까지 빚만 지고 살 수는 없잖아?”

“그럼 치즈 너도 곧 유명 파티쉐가 되겠네? 너 요리 잘하잖아.”

치즈가 만든 음식은 정말 다 맛있었다. 요리 수업시간에도 만든 음식을 서로 돌아가면서 맛을 보곤 했었다. 가르쳐준 선생님과 모든 학생이 치즈의 요리를 제일 먼저 맛보겠다고 서로 탐을 낼 정도였으니까.

또 칭찬에 민망해졌는지 수줍게 웃는 치즈가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그나마 내가 원하는 걸 다 얻어서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아.”

“맞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으니까. 치즈 너는 지금 꽤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겠지? 레이라 너는? 나는 네 얘기가 더 궁금해.”

두 눈을 반짝거리는 치즈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리브엘은 모른 척 고개를 살짝 돌려 잔에 담긴 음료를 홀짝 마셨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틀렸어.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래서 포기할 생각이야.”

“아, 정말?”

나만큼이나 실망이 역력한 치즈의 표정에 어쩐지 설핏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으면 안 되는 분위기인데도 순간적으로 표정이 확 변하니까 그 간극이 극명하다 보니.

“흠흠, 응. 뭐, 그렇게 되었어. 왕국으로 돌아가면… 일단 왕궁 외교부 쪽에 지원을 해보려고 해.”

“왕궁 외교부? 그럼 독립하려고?”

“우선 혼인은 아직… 생각이 없으니까 일이라도 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구나.”

묻고 싶은 건 많은 눈치였으나 애초에 치즈도 나만큼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쉬림프 카나페를 나이프로 반을 잘라 한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울한 기분이 싹 날아갈 정도로 대단한 맛을 음미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완벽하게 차였어. 내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대. 차라리 다른 이유였다면… 어떻게든 설득이라도 해보겠는데 그게 아니니까……. 내가 정리해야 할 문제더라고.”

“뭐어?!”

치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팔짱까지 끼면서 크게 소리를 쳤다. 그래서 내가 더 깜짝 놀랐지만.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우리 레이라가 아카데미 3대 미녀 중 한 사람으로 꼽혔었다고! 그 집사 눈은 제대로 보인다니?”

“으응?”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다 거짓말일 거야! 분명히 너한테 자존심을 세우는 거라고! 하여간 사내들이란 전부… 아, 리브엘 너를 욕하려는 건 아니야. 오해하진 말아줘?”

“오해라니. 맞는 말이야. 나도 네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의외로 리브엘까지 가세해서 치즈의 말에 동참하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놈이 레이라의 진가를 알아봤으니까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허락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거든. 원래 사내들이 그런 면에서 좀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역시 리브엘이 좀 아는구나. 우리 파이도 그랬거든. 아니, 글쎄 나랑 연애질하면서 혼인은 못 해주겠다는 거 있지! 기가 막혀서.”

“…혼인한다고?”

“응.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자기는 나한테 아기를 갖게 할 수 없대서래. 그래서 뭐 평생 연애만 하자는 거냐고! 누가 아기 달랬나? 혼인은 두 사람이 사랑해서 하는 건데!”

“왜 아기를 갖게 할 수 없다는데?”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셨대. 아, 몰라. 진짜 속상해서… 내가 아기 안 가져도 되니까 그냥 혼인만 하자고 하는데도 결단코 안 된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치즈와 리브엘의 대화를 듣기만 하면서 눈만 끔뻑거렸다. 치즈는 불만이 가득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고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한탄했다. 그러나 치즈와 다르게 리브엘은 아주 평온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포크를 소리 없이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는 그가 조금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치즈의 입장이 이해가 돼. 그건 나도 이해할 수가 없네. 그 문제로 혼인하지 못하는 건 변명에 가깝다고 봐.”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근본적인 문제로 결여된 거라면 본인에게는 괴로울 거야.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 싶지 않을 테니까.”

꽤나 진지해 보이는 리브엘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아마 리브엘도 치즈의 키다리 아저씨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그러니 저렇게 감정이입을 하는 거겠지. 조금씩 어두워지는 리브엘의 표정에 분위기가 조금씩 침체되는 느낌이었다.

아이라…….

나 역시 아이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내 부모님이 정략혼이라는 것에 묶여서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 보고 꽤 많은 걸 느꼈으니까. 서로 간의 애정이 없는 부모의 아이로 태어나 불행했던 내 어린 시절을 내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내게 애정을 주지 않는 상대와의 혼인보다는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죄도 없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외로움을 느끼는 것보다는 내가 외로운 게 나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 사람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은 욕심이 들게 되지 않을까? 나도 테인을 짝사랑하던 때에 종종 그와의 미래를 꿈꾸며 그와 나를 닮은 아이를 상상하곤 했었다. 그를 닮은 아이가 그와 닮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워질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리브엘의 이야기에 치즈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게 서로의 사랑을 막는 원인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만큼 더 사랑하면 되잖아? 꼭 아이가 있어야만 행복한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두 사람의 마음이지.”

“오, 역시 리브엘은 뭘 좀 아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두 사람의 마음!”

굉장히 희망을 얻었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치즈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레이라는 어떻게 생각해?”

나 역시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한 뒤에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원래 욕심이라는 게 한도 끝도 없잖아. 만약 나라면… 일단 연애부터 하고 단둘이 지내도 행복할 수 있을지 겪어보겠어. 혼인이라는 게 그렇게 급한 사안도 아니니까 조금 더 서로를 깊이 알아 가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랬는데 치즈 대신 리브엘이 내 말에 반박하듯 치고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다 의미 없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해. 만약 나라면 아이라는 빈자리도 모를 만큼 사랑해줄 거야. 그렇게 긴 인생도 아닌데 서로 눈치만 보고 이래저래 따지는 시간이 더 아깝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그게 또 맞는 말이라 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치즈 역시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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