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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자기 마음대로. 내가 어쩌다가 저 흡혈귀와 엮이게 되어 이런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게 된 건지. 거기에 괜히 치즈를 말려들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같이 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면 되겠지요?”
“만찬 준비는 여유롭게 해놔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나는 식사 따위 필요 없기도 하고.”
“…저녁식사는 이미 하셨다고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그럼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응.”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왜? 가려고?”
…그럼 여기서 당신하고 단둘이 뭘 한답니까?
나는 두 눈을 멀뚱멀뚱 뜨면서 의문스러운 표정을 그렸다. 그러다가 눈웃음을 살살 치는 리브엘의 표정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심심해. 같이 있어.”
확실한 건, 저 사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성을 있는 대로 꼬실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는 거다. 악마의 피가 섞여서 그런 걸까?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상대는 아닌데 가끔 저렇게 눈웃음을 치면 괜히 심장이 쿵쿵 뛸 정도니까. 가끔 보면 머리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어린 남동생 같기도 하고.
“만찬 초대를 받았으니 그에 대한 준비를 좀 해야 하는데…….”
“아, 그래? 그럼 방해하면 안 되겠네. 그럼 다녀와. 준비하고 이쪽으로 와주면 고마울 것 같아.”
“그러겠습니다.”
응접실을 벗어나 방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치즈가 리브엘과 딱히 친하게 지내진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그냥 이름을 알고 그가 학생회장이었다는 것만 알뿐, 접점은 없었으니까 친하다고도 할 수 없는데. 안된다고 딱 잘랐어야 했나? 괜히 허락한 것 같아.
“아, 모르겠다……. 왕국으로 돌아가면… 일단 외교부 쪽에 지원을 해보고… 공작께서 내 앞날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인간은 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했다. 리브엘 역시 몇 천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했으니까.
우선 지금은 테인에 대한 내 마음을 접는 게 우선이다. 처음에 그가 나와 테인의 혼인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협력하기로 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테인과의 혼인이 아니어도 일단 내가 홀로 살아남으려면 리브엘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생각해보니까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 권력가에게 빌붙어 목매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역시 나도, 아버지의 딸인가…….”
나는 자조하며 내게 처한 상황들을 비웃었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돼. 이어지지 않을 운명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 서로가 불행해질 수도 있어. 그를 위해서 잊자. 앞으로 바쁘게 살다 보면 그를 잊을 수 있을 거야. 그럴 거야. 다시는, 너로 인해 이 심장이 뛰지 않길 바라.
그렇게 세뇌하며 조각난 내 마음들을 하나둘씩 정리하자, 하늘의 붉은 태양이 서서히 산등성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올수록 기대감에 들뜨기보다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럼 가실까요, 영애?”
어느새 예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단장을 마치고 나타난 리브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냥 공작 각하라고 하면 될까요?”
“음… 그건 좀 곤란하고 그냥 편하게 리브엘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그럼, 선배라고 불러도 되나요?”
“좋아.”
나는 최대한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했다. 누가 보면 내가 그와 무슨 은밀한 사이 같아 보여서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게다가 지금처럼 손끝이 닿는 것도 별로 탐탁지 않았다. 지난번 그가 악수를 청했을 때 한번 닿았었는데, 그때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괜히 오싹했던 기억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더 피했다.
“긴장하지 마. 너 안 잡아먹어.”
“그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노력해주세요.”
“까칠하기는.”
다시 마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지정된 브런치 카페 앞에서 세웠다. 그리고 리브엘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웬 낯선 사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레이라 아이리타 비센트 영애가 맞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저희 아가씨께서 영애를 모셔오라고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명령에는 영애 한 분이시라고…….”
사내가 내 옆에 당당히 서 있는 리브엘을 힐끔 쳐다보면서 말끝을 흐린다. 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치즈와도 아는 사이입니다. 아카데미 선배로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초대받진 못했으나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우선 함께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겠다는 손님을 오지 말라고 막을 수는 없는 법이긴 하다. 그래서 나는 리브엘의 차디찬 손을 맞잡은 채 호흡을 고르며 낯선 사내의 뒤를 따랐다.
곧 으슥한 골목길 안쪽에 미리 세워둔 고급스러운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매번 치즈가 타고 다니던 익숙한 마차이긴 하다. 하지만 치즈를 만날 때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중하게 문을 연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살짝 숙였고, 나는 리브엘의 눈치를 한번 살핀 뒤에 마차 위로 올라탔다.
어떻게 보면 혼자 오지 않아서 다행일지도. 내가 만약 혼자였다면 나는 이 마차를 쉽사리 타진 못했을 것 같다. 리브엘이 믿음직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치즈의 친구인 내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그냥 놔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창문 커튼은 닫아두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멀미하실지도 모른다고 치즈 아가씨께서 꼭 당부를 해주셨거든요.”
마부석에 오른 사내의 말에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창문의 커튼을 전부 내렸다. 치즈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자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웃고 있는 리브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차 자체에 보호 마법이 걸려있어. 역시 보통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네. 마법사 본인이 마차에 탑승하지 않은 채로 보호 마법이라…….”
“그게 대단한 거예요?”
“예를 들자면… 보통 인간 고위마법사가 한 왕국을 통째로 옮길 수 있는 능력 정도?”
그 분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엄청난 부자라더니.
“지금 살아있는 고위마법사 중 그런 능력이 있는 인간 마법사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니 엄청난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인간에 한해서.”
내 눈앞에 길쭉하고 고운 손바닥을 펴 보이는 리브엘의 말에 말문을 잃었다.
치즈가 그런 대단한 마법사에게 길러졌구나.
치즈는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키다리 아저씨의 보호 아래 자랐다고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치즈의 얼굴에는 그늘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게다가 늘 풍족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가 조금 의심이 가기도 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다른 제국 황실의 사생아나, 대륙 너머의 다른 왕국의 공주이지 않을까 하는 소문도 퍼지기까지 했으니까.
특히 수업시간에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다가 나온 레드 다이아몬드 사건의 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어? 레드 다이아몬드라고? 이게?]
[응. 왜?]
[이거 우리 집에 엄청 많은데. 나 이걸로 파이하고 공기놀이도 했어. 산처럼 쌓여있었거든. 붉은색이 반짝반짝! 그거 레드 다이아몬드라고 했는데?]
레드 다이아몬드는 워낙 희귀하고 여러 보석류 중에서 가장 비싼 보석으로 손꼽혔다. 그런 보석이 산처럼 쌓여있다던 말 한마디에 치즈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었다. 출신도 불명, 가족관계도 불명, 뭐 하나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으니까. 물론 정작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아무튼, 마냥 행복해하는 치즈가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고백했다가 차인 이후밖에 없었다. 그것도 투정을 부리듯 한탄을 하는 것도 잠시였고, 곧 긍정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다음에는 꼭! 성공하리라!]
아마 그래서 내가 치즈를 더 친구로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옆에 있으면 나까지 힘이 날 정도였으니까.
한때는 치즈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이 아니면 어떤가 싶기도 했다. 리브엘을 보고 나서 세상에 인간인 척하고 다니는 다른 종족들이 은근히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동마법이군. 마차가 진입할 수 있는 저택이라. 신기한데?”
“저택이요?”
과거를 회상하던 사이, 들려오는 리브엘의 말에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쳐다봤다. 그러자 옅은 불빛이 번지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스쳐 지나간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마치 넓은 복도 같았다. 실내에 마차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애초에 마차도 거의 흔들림이 없어서 장소가 바뀌는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말을 몰던 아까 그 사내가 문을 열자 리브엘이 먼저 내리고 내가 뒤따라 내렸다.
“어? 누구… 리브엘?”
통통 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치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아까 낮에 보았던 간편한 차림이 아니라 한껏 꾸민 치즈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방긋 미소를 보이면서.
“세상에! 정말 리브엘이야?”
“오랜만이야, 치즈. 잘 지냈어?”
“아니. 아카데미에 다니던 치치르자 왕국 사람들이 제국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하긴 해서 잠깐 생각나긴 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나와 리브엘을 번갈아 쳐다보는 치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서 조금 놀랐나 보다.
곧 리브엘이 치즈를 향해 아주 정중하게 허리까지 숙여 예를 갖춘다.
“나도 오후에 우연히 레이라를 만났거든. 너와 만찬 약속을 했다기에 내가 억지로 오겠다고 했어.”
“아, 그랬구나!”
“초대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미안해, 치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엄청 반갑기만 한데!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하길 잘한 것 같아.”
여전히 방긋방긋 웃는 치즈가 두 손바닥을 짝짝 맞추며 환영 인사를 보내왔다. 리브엘은 치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긴장한 듯 입가에 미세한 경련을 흘린다. 세상에 아무 걱정 없어 보이던 리브엘이 긴장하고 있는 걸 보게 되니 그것도 참 묘하다.
“안으로 안내할게. 참! 지에론도 수고 많았어. 내 손님을 여기까지 바래다주어서 고마워.”
지에론?
마차를 몰았던 그 사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저 남자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어서 가자, 레이라. 리브엘도 배고프지? 우리 주방장 음식이 제법 맛있을 거야. 내가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최고급일지도!”
치즈가 내 손을 덥석 잡은 채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내 반대편으로 리브엘이 따라붙는 걸 애써 무시한 채 치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기대돼. 치즈 네가 항상 주방장 칭찬을 많이 했었잖아?”
“기대해도 좋아. 그보다 우리 집에 내 손님으로 오는 건 두 사람이 처음이야. 그래서 나 얼마나 긴장되는지 몰라.”
뭔가 잔뜩 들뜬 치즈가 크게 손짓을 하면서까지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치즈와 리브엘이 나란히 걸었고, 나는 뒤로 한 걸음 더 떨어져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