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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2화 (72/132)

♬  72

그냥, 속 편하게 혼자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도 사내들은 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기도 하셨고.

요즘은 능력만 있으면 여성도 작위를 받거나 취직할 수 있었다. 어머니 세대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현재 왕실 고위직에서 활동하는 여성들도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사실 나는 테인과 혼인하게 되면 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취직을 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 졸업장이 있으면 서류심사가 가능해서 아카데미에 다니겠다고 결심을 했었던 건데.

[이것보다는 내가 말한 방식이 더 낫…….]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 나름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그, 그래요? 아니 나는…….]

[…아가씨.]

내 고백을 완강히 거절한 이후, 테인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단호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비수를 꽂았다.

[…네?]

[아가씨께서 알려주시는 방법도 유용하게 쓰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지나친 간섭은 그 일의 책임을 맡은 제 의욕을 짓밟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아가씨께 존대 받을 사람이 못됩니다. 듣는 제 입장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게 벽을 세우는 테인의 무심한 뒷모습에 확실히 깨달았다. 테인과 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내가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일단 마음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제국으로 도망치듯 와버렸다. 사실 아카데미의 행사도, 제국 황궁에서 치러지는 무도회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기도 했고.

무엇보다 테인의 그 차가운 태도가 예상외로 너무 큰 상처가 되었다. 또 4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뒀던 한 사람에 대한 짝사랑은 내 생각보다 더 깊고 대단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정리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랬어.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잖아. 마음을 접는 게 너를 위한 거야, 레이라. 왜 이렇게 정리를 못 하니. 대체 왜…….”

정말 의욕 하나 없이 숙소에만 있기가 갑갑해져서 외출이나 해볼까 싶어 밖으로 나왔는데. 정말 예상치 못하게 치즈를 만나게 되어 조금 우울했던 마음이 싹 날아갔다.

치즈가 무려 5년을 마음에 품었고 스무 번이 넘는 고백을 무심하게도 뻥뻥 차버렸다던 치즈의 키다리 아저씨. 그분은 한 번에 눈치챌 정도로 전과 다르게 분위기가 확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애교 많고 귀여운 치즈의 앙탈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돌덩이 같은 남성이었는데. 지금은 치즈가 좋아 죽겠다는 모습이다. 타인인 내가 봐도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받고 있구나, 치즈. 다행이다. 너라도 행복해져서.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치즈를 부러워하면서 내가 머무는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헐레벌떡 뛰어나온 하녀가 다급히 고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오늘은 약속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리브엘’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하여간 진짜 가끔 보면 유령 같다니까. 유령보다 더 무서운 종족이지만.

나는 약간 인상을 쓰다가 다시 빙긋 웃으면서 혼자 가보겠다고 대꾸했다. 그리고 드레스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한 뒤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서 얌전히 앉아 차를 마시던 리브엘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고운 초콜릿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애써 무시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공작 각하?”

“아카데미로 출타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봤는데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 괜히 헛걸음했잖아. 너야말로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지? 꽤 오래 기다렸다고.”

아카데미 선배이자 무려 2년간 학생회장을 맡아서 했던 리브엘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다. 치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부드러운 목소리와 선해 보이는 저 미소 뒤에 보통 인간과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본심을 알 수 없는 사내이기도 하고. 따스한 표정과 다르게 어딘지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건 내가 그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와서 앉아. 꼭 내가 주인 같아 보여. 겁먹지 말고. 우리는 서로 협력하는 사이잖아?”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하는 리브엘의 손짓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조금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테이블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리브엘이 잘 정리된 녹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면서 자세를 고쳤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 위에 턱을 얹어놓고는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그래서 치즈한테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

“…방금 치즈를 만나고 왔어요.”

“방금?”

내 말에 여유롭게 웃던 리브엘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더니 내게 상체를 더 숙여오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어디에서? 설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아니요.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들통 날 텐데. 정말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만났을 뿐이에요.”

“그 사내와 함께 있었군?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드레스까지 선물로 받고. 치즈는 여전히 활발하네. 변하지 않았어. 정말 그대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라니.”

또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일까?

환희가 차오른다는 듯 기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리브엘의 눈동자가 환상을 보는 것처럼 흐릿해진다. 얼굴 근육을 씰룩거리면서 혼자 감격에 겨워 잔뜩 들뜬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기까지.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여실히 느끼게 된다. 괜히 섬뜩해져서 팔뚝을 손으로 조심히 매만졌다.

“멋대로 남의 머릿속을 엿보는 거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미안. 마음이 급했어.”

리브엘은 바로 사과하더니 한발 물러서듯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까지 치즈 일이라면 저렇게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과거에도 멀리서 치즈를 지켜보기만 하던 그다.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아서 그렇게 좋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저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지 보통 인간은 모르지. 곁에 있기만 해도 갈증이 해소될 만큼 대단한 정기를 가지고 있으니 애써 누군가를 해할 필요가 없잖아?]

생크림처럼 부드럽던 그의 초콜릿색 눈동자가 허기짐으로 가득 차더니 입맛을 다셨다. 나는 이미 그 전부터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치즈를 해칠까 봐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리브엘의 가문인 비플라츠 공작가는 우리 치치르자 왕국에서도 베일에 싸인 비밀스러운 가문이었다. 치치르자 왕국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남쪽 국경 지역에 터를 잡고 건국 초기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작가의 대리인이 국정에 참석할 뿐. 비플라츠 공작을 직접 보거나 만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무성한 소문만 돌았다. 공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부터 시작해 악마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까지.

그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리브엘이 내게 협력하자고 손을 내밀 때 알게 되었다.

[네가 나와 치즈의 사이가 가까워지도록 도와주면 앞으로 비플라츠 가문에서 너를 전적으로 지원해줄 생각이야.]

[비플라츠 공작가는 누구와도 손잡지 않는 중립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리고 공작가의 차남이라는 영식께서 저를 도와봐야 얼마나 도우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대외적인 거고. 사실 내가 비플라츠 공작이거든.]

[당신이… 그 공작이라고요?]

[이건 너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면 좋겠어. 만약 소문이라도 나는 즉시, 네 숨이 붙어있진 못할 거야.]

나를 빤히 쳐다보던 초콜릿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린다. 어딘지 꺼림칙해서 조금 경계하고 있었는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마음에 둔 사내가 있었나 보네? 상대가 집사라면 집안에서 반대가 심할 건데.]

[그… 그걸 어떻게……?]

[내가 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상대의 머리를 염탐할 수 있는,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능력이지.]

피식 웃는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는 그 행동에 뱃속이 크게 요동을 쳤다.

[아무튼, 네가 날 도와주면 네가 그 집사와 아무 제약 없이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어때?]

[…저더러 사내와의 관계를 빌미로 친구를 팔아넘기라는 건가요?]

[아니지. 친구가 행복해지도록 네가 돕는 거야. 치즈가 비플라츠 공작부인이 되는 건, 치즈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는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했다. 흡혈한다는 악마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 인간의 피를 취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어쩌다가 그 끔찍한 장면을 봐버리는 바람에.

아카데미 시절, 리브엘은 내게 꾸준히 치즈에 대해 보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런 그가 잠시 만나자는 전언을 보내와 약속장소로 향했을 때. 그곳에서 그가 여성을 상대로 ‘섭취’라는 것을 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 낮에 돌아다니니까 기력이 빠져서. 네 앞에서 쓰러질 수는 없잖아? 방금 일은 잊어줘.]

[…그럼 그 송곳니부터 없애시죠. 피도 닦으시고요.]

그에게 피를 빨린 여성도 오래전부터 비플라츠 가문에 종속되어 충성을 바치는 일원이라고 했다. 그 엄청난 비밀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수족이 되어주는 가문이 따로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치즈가 만찬에 초대한 거, 나도 가고 싶은데. 괜찮겠지?”

“…제 생각 읽지 마시라니까요.”

“아까 읽어버려서 어쩔 수 없어. 이미 봐버린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아시다시피 만찬은 초대받은 이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치즈도 우연히 만났으니 우리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 되지. 나도 너처럼 아카데미 행사와 제국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다 하고.”

정말이지. 남의 생각을 읽고 볼 수 있는 흡혈귀와 한 공간에 있는 나 스스로가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리브엘이 평소에 무례하거나 생각을 막 읽어대진 않았다. 오히려 정중한 기품이 배어있는 귀족 중의 귀족다운 이였다. 하지만 치즈에 관해서는 저렇게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니 내가 당해낼 수가 없다.

“일단 해가 지기 시작할 때에 다시 데리러 오겠답니다. 치즈의 키다리 아저씨께서 오시면 그때 물어보죠.”

“마법사라고 했나? 그 까만 머리?”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리브엘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그 사내도 보통 인간은 아니야. 뭔가 있어. 아무튼, 그딴 식으로 구는 놈에게 평생 아껴줘도 모자랄 귀한 치즈를 맡길 수는 없지. 생각보다 일찍 연락이 닿게 되어서 다행이야.”

“보통 인간은 아니라고요?”

“단지 마력이 있는 인간은 아닐 거라고 봐. 그러니 확인을 하러 그 사내도 만나볼 겸, 치즈와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좀 나눠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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