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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71화 (71/132)

♬  71

저 뻔뻔한 드래곤 같으니라고. 양심 없는 거야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그의 당돌한 대답에 하도 기가 차서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되게 웃긴 사람이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별로.”

“아니 뭐 그래. 드래곤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거 나도 아는데, 나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생명이란 말입니다. 설마 나 갖기 싫고 남 주기 아까운… 뭐 그런 거예요?”

“그건 천 년 뒤쯤에 다시 이야기해 보지. 일단 네가 말한 대로 천 년 동안은 다른 사내놈과 붙어먹을 생각은 하지 마.”

…꼭 말을 해도. 누가 들으면 내가 남자에게 미친 여자인 줄 알 거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천 년을 무슨 하루처럼 말을 하네.”

투덜거리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춰오는 파이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의 단단하던 얼굴 근육이 녹아내리듯 풀리더니 어울리지 않게 생글 웃어 보인다.

확실히 이 드래곤은 심장에 해롭다. 이러다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왜… 왜 그렇게, 봐요?”

“고마워서.”

“…뭐가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네게 여태까지 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오늘 참 다사다난한 날이로구나. 마치 밀물과 썰물이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참 단순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방금까지 뾰족뾰족하게 솟아났던 심술이 다정한 속삭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동글동글해진다. 덩달아 날뛰는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을 쳐서 이러다가 제 자리를 벗어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흠흠. 그 마음 변하지 않길 바랍니다. 나중에 귀찮아할까 봐 겁나네.”

“너야말로.”

만지작거리던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는 파이의 행동에 이번에는 머릿속도 난리다. 온몸의 장기와 피며 솜털까지 제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달달하지? 가끔 날 유혹할 때 이런 느낌이긴 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좀 다른 날보다 더 설탕가루를 폴폴 뿌려대는 느낌이다. 아까 먹은 팬케이크하고 딸기 바나나 주스보다 더 달콤한 맛이 내 청각과 촉각을 자극시켰다.

그러더니 또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내게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왜, 왜요?”

“키스는 거부하지 마.”

유혹하려는 듯 나직하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입을 맞춰온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정신을 홀랑 무너트릴 정도로 매혹적인 체취를 가득 품은 채 나를 덮쳐왔다. 뜨끈하고 촉촉한 혀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는 자극에 뇌가 말랑해졌다. 온 신경이 다 곤두세워질 정도로 아찔하게 다가오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이상하게 키스만 해도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서 큰일이다. 중심축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자꾸만 몸이 휘청거렸다.

“응, 하아… 으음…….”

짜릿한 감각에만 의존하면서 정신없이 키스를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호흡을 천천히 고르면서 흥분을 점차 가라앉혔다. 그러다가 어느새 파이의 허벅지 위에 위험한 자세로 마주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어, 언제 올라탔지? 이래서 키스도 위험하다니까?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게 정신을 쏙 빼놔버리니까 꼭 이상한 분위기로 흐른단 말이야.

“어… 저…….”

괜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눈만 이리저리 굴리면서 입을 뻥긋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파이가 입꼬리를 조금씩 더 끌어올리면서 커다란 손으로 내 드레스 안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어헛! 지금 이 짐승이 또 무슨 짓을!

“이, 손 빼시고!”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됐다니까요? 곧 레이라가 올 거라고요. 손님을 맞아야 하는데 자꾸 이렇게 멋대로 굴면…….”

“안 해. 내걸 넣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나는 치즈 네가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그러니 널 기쁘게 해주고 싶다.”

아니 진짜 이 드래곤이 몰라도 한참 모르네. 아무리 나라도 흥분하면 끝까지 하고 싶어진다고!

“이, 이따가 저녁에 해요. 저녁에. 레이라 하고의 만찬이 끝나서 돌아가면 그때요.”

그랬는데 왠지 모르게 파이의 선홍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거리는 것을 나는 봤다. 분명히.

뭐지? 뭐… 뭔가 내가 실수한 것 같은데…….

“방금 그 말 번복하지 마라. 그럼 준비를 서둘러야겠군. 시간을 빨리 돌릴 방법이 없으니 아쉬워.”

어쩐지 조금 들떠 보이는 파이가 나를 그대로 안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생글생글 웃으며 드레스를 새로 갈아입혀 주고 나를 화장대에 앉혀 치장을 시작했다. 마치 표정이 고장 난 인형 같아 보였다.

익숙하게 내 머리카락을 브러시로 빗어 내리고 가닥가닥 땋아 둥글게 꼬아서 핀으로 고정시킨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놀랍게도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 잘못 먹었나? 이 드래곤 오늘 왜 이래?

* * *

“그럼 이따 저녁에 봐, 레이라! 조심히 들어가고!”

“응. 너희 주방장 요리 기대할게. 이따 봐?”

오랜만에 우연찮게 만나게 된 나의 단짝 친구, 치즈. 정말 이 넓은 제국에서, 그것도 제국에 살지 않는 치즈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치즈의 오래된 짝사랑 상대인 사내와의 다정한 모습에 내 심장이 다 두근거릴 정도였다.

치즈 성격이 워낙 밝아서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그때만큼은 엉망진창인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찬 약속을 하고 마차에 올라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 좋았던 기분은 끝이 났다.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잠시 들떴던 마음이 확 가라앉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테인과 잘 되었다면 저렇게 행복했을 텐데…….

[앞으로 저택 총괄을 맡게 된 집사, 테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4년 전에 우리 백작가의 새로운 집사로 들어온 테인. 테인은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마음에 품었던 이다. 그를 보고 싶어서 아프다는 핑계로 아카데미를 한 학기를 쉬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방학만 되면 무조건 우리 영지로 돌아와 두 달을 꼬박 지내고 아쉬움을 담아 기숙사로 돌아오기도.

가슴에 품은 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졌고, 그와 내가 운명의 짝임을 확신했다. 도저히 그 연모하는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이미 테인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테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 꽤 힘들게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렵게 집사 자리를 얻어 다행히 사람답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무슨 일에도 열심히 하는 그를 본받아 나 역시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공부에 몰두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으면 자료를 정리해서 몰래 개인적인 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혹시 모를 답신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본가로 돌아가면 그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감사하다는 인사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해. 내가 그에게 알려준 방식으로 일을 하는 그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나마 도움이 되긴 했다는 걸 깨달아서.

올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레이라. 네게 청혼서가 몇 개 도착했다. 내가 몇 개의 가문을 추려놓았으니 네가 한 곳을 선택하렴. 최대한 빠른 답신을 달라고 하더구나.]

내게 종이 몇 장을 건네는 어머니께서 늘 그렇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초조함이 깃들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전부터 장녀인 나를 어쩌지 못해서 안달이었으니까.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돌아왔는데도 내 부모님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아버지는 혼인 준비는 잘 되어 가는지 물으셨고, 어머니는 잘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셨다. 게다가 말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람들의 청혼서까지 받게 되니 참 허탈하기만 했다.

결국, 가문이 정해준 혼처에 시집가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인 걸까?

나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이십 년이 넘도록 부인과 자식들에게 조금도 살갑지 않은 남편 눈치만 보면서 살기는 싫었다. 사랑 없이 평생을 외롭게 보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략혼은 안정적인 혼인 생활을 위해 필요하긴 할 거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네 아버지 눈칫밥이 보인다고 곤란해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좋다던 혼처를 보지도 않고 물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선택한 사람과 맺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신분이고 뭐고 전부 뒤로한 채 테인에게 마지막으로 내 진심을 전했다. 정말 큰맘 먹고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말이다.

[제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아가씨. 몸이 편찮은 홀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유일한 가족이 저뿐입니다. 그리고 한참이나 어린 여동생 또한 성인이 될 때까지 제가 필요하고요.]

[그러니까 내가 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 작위를 내려줄 수도 있어요. 나 그만한 능력은 된다니까요?]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일개 집사이고 당신은 비센트 백작가의 장녀이십니다. 또한, 저는 말단 귀족이나 평민에 가깝고 당신은 고위 귀족이시란 말입니다. 만일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자꾸 그렇게 선을 긋지 말아요, 테인. 제발…….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무작정 날 밀어내지 말고…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줘요. 부탁이에요, 제발.]

[…죄송합니다, 아가씨.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가씨를… 아가씨에게 여인으로서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번 일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거절당했고, 더 매달릴 용기가 나질 않아서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2년 전, 처음 고백했을 때는 얼굴이 잔뜩 새빨갛게 변한 상태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던 그였다. 그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피하기는 했어도, 가끔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때마다 그가 먼저 놀라서 고개를 돌렸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아예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걸 느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아가씨에게 여인으로서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기만 했다. 그만큼 단호하게 나와 선을 그어버려서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가 신분의 차이만 내세웠다면 함께 이겨나갈 수 있다고 설득이라도 했을 것이다. 나도 신분의 차이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니까.

그러나 나를 한 번도 마음에 품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면 이 이상 밀어 붙여봐야 의미가 없다. 그건 정략혼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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