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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지. 레이라가 괜찮다고 하면 저택에 초대하겠다.”
그런데 너무 순순히 수긍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 레어에 손님을 초대할 생각일까? 아니 뭐… 파이가 알아서 하겠지만.
“들었지, 레이라? 내가 우리 주방장 솜씨 맛보게 해줄게. 내 만찬 초대에 참석해줄래?”
“물론이야. 초대해준다면 언제든 감사하지. 치즈 네가 사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 제국하고 가깝겠지?”
“그럴걸? 어… 뭐, 아까 눈치챘듯 파이가 마법을 조금 잘 써.”
“그럼 나도 그 마법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아마도?”
파이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우리의 대화를 듣고 설핏 코웃음을 치기만 했다.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아까 나와 레이라의 대화를 엿듣긴 했나 보다. 하여간 귀도 밝은 드래곤이야.
“파이. 나 황궁 무도회에도 가면…….”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가도 좋아. 단, 나와 함께 가는 거로 하지.”
아무래도 황궁 무도회에서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만천하에 공개할 심산인 것 같다. 참 웃겨? 나랑 혼인도 하지 않겠다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람?
어쨌든 레이라를 초대하는 것과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다 얻었으니 나는 성공한 거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무도회에 참석해보겠어?
“그럼 기왕 수도에 왔으니까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하나 마련하러 가야겠어요! 레이라도 드레스 하나 같이 할래? 그렇지 않아도 방문 선물로 드레스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무도회용 드레스는 선물로 하기에는 좀 비싼 편인데?”
“우리 파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부자래. 그렇죠, 파이? 설마 이 정도로 휘청거려요?”
“일단 의상실로 가보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파이를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남은 주스를 한 번에 전부 마셔 비웠다. 그러자 레이라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치즈. 드레스 맞추러 가는데 그거 다 마시면… 하긴 너는 말라서 살을 좀 찌우긴 해야 해. 먹는 거에 비해서 살이 정말 안 찌는 체질인 것 같아.”
“말도 마. 나 처음 신체검사 하던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해.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는 세계가 다 멸망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당시, 생전 처음으로 신체검사를 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체중계 위로 떨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위로 올라갔다. 체중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확인했을 때는 온 세상이 다 새까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체중계의 바늘을 가리키며 당시 보건을 담당하던 젊은 선생님께 물었다.
[서, 서, 선생님? 이거… 고장 난 거 아닌가요?]
[음? 보기보다 체중이 조금 많이 나가는 편이네? 가슴 때문인가? 어제 새로 들여온 체중계라 틀리진 않을 거다. 그래도 키가 157cm에 몸무게가 46.7kg이면 적당한 편이지.]
그래서 잠깐 정신이 흐릿해지기도. 그 뒤로 체중계에 올라간 다른 학생의 키가 나하고 비슷했는데 앞자리가 5로 올라가는 걸 보고 정말 경악을 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 무게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갈 거라고 생각을 못 했거든. 내가 작은 설탕 한 팩 정도의 무게일 줄 알았으니까.
이게 다 매번 파이가 나를 깃털처럼 너무 가볍게 들어 올려서 그렇다! 나도 성인 여성이라 제법 무게가 나갈 텐데 파이는 무게 따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이러니 내가 가볍다고 착각을 하지!
“보건선생님도 그러셨잖아. 가슴이 커서 무게가 그만큼 더 나오는 거라고.”
“…체중계는 존재 자체가 악이야, 악. 나 그거 만든 사람 멱살을 잡아서 짤짤 흔들고 싶어질 정도라고. 대체 그런 위험한 물건을 왜 만든 건지 모르겠어. 아마 세상 모든 사람에게 욕 꽤나 먹어서 오래 살 거야.”
내가 투덜거리면서 구시렁거리자 레이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리고 나와 파이는 레이라의 인도에 따라 꽤 유명하다는 의상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로 들어갔던 의상실은 디자이너가 남자라서 바로 파이의 손에 이끌려 나오게 되었다. 내가 진짜 어이가 없고 남 보기 부끄러워서 원.
두 번째 의상실은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색상과 디자인이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나왔다.
그리고 밋밋한 세 번째 의상실을 거쳐 네 번째 의상실에 다다라서야 만족스러운 드레스를 고를 수 있었다.
“오, 예뻐! 이거 너무 예쁘다. 그렇지, 레이라?”
“확실히 제국은 또 다르네. 우리 왕국에서 유명한 의상실의 옷감도 이 정도로 화려하진 않아. 이건 정말 무도회용인가 봐.”
가슴 부근이 위태롭게 파인 신상 드레스는 허리만 살짝 숙여도 가슴이 전부 드러날 것만 같았다. 거기에 자잘한 보석들이 화려하게 매달려있는 풍성한 치맛자락까지.
드레스는 나와 레이라의 마음과 눈을 전부 사로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제작 기간이었다.
“곧 황실 무도회라 다른 의상실도 전부 주문이 밀려있는 추세일 겁니다. 단기간에 제작이 좀 무리…….”
“값은 세 배로 쳐주지. 그래도 문제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바로 제작해서 내일 모래까지 완성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것도 뭐 파이의 말 한마디에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다. 물론 레이라는 입을 떡 벌린 채 파이와 나를 심각하게 쳐다보면서 내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대체 너의 키다리 아저씨 정체가 뭐니? 세 배라니. 그냥 원래 가격만 해도 우리 왕국에서 드레스 두 벌은 맞출 수 있는 금액이라고. 이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줬다.
“돈은 넘치는 데 못 써서 안달 난 평범한 부자야. 그래서 내가 탕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
“…졸업파티 때 입고 온 드레스를 보고 눈치는 챘지만 내 생각 이상이구나. 이거 뭐, 승산이 없겠네.”
“승산?”
“널 어떻게든 가져보려고 애를 쓰는 수많은 남성들. 치즈 너는 몰랐겠지만, 우리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 네가 성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어.”
“정말?”
궁금하니까 더 말해보라고 하려던 찰나. 계약서 작성과 금액 지불을 한 번에 끝낸 파이가 다가와서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만 가지. 일단 레이라는 저녁시간 때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가서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자.”
눈치를 보아하니 방금 나와 레이라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찬을 준비하려면 일찍 들어가야 해서 우리는 바로 의상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레이라와 다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상업마차를 불러 레이라를 태워 보냈다.
“…그래서 저택은 어디서 구해요?”
“이제 와 걱정이야? 일은 다 벌여놓고. 요 말괄량이 같으니.”
“아얏.”
결국, 파이에게 꿀밤을 한 대 쥐어박혀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며 코를 훌쩍거렸다. 누가 자비도 없는 드래곤 아니랄까 봐.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 여긴 너무 복잡해. 이리와, 치즈.”
그 말에 나는 자석처럼 파이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런 나를 품에 안은 파이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바로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린 파이가 이동마법을 사용해서 레어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찬 음식이야 뭐 주방장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믿고 맡기면 되는 문제지만. 다른 것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장소였다.
사실 어느 정도는 레이라를 레어로 초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만 있었다. 훗날, 만약의 경우 내가 파이를 떠나는 것을 대비해서 일부러 그랬다. 레이라에게 내가 어느 위치쯤에 머물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만 파이가 허락할지 모르겠다.
“만찬은 어디서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택을 하나 구해야 할까요?
“장소? 레어에 식당 하나를 꾸미면 될 것 같은데?”
고민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파이가 레어를 허락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여겼는데.
“레어에 인간을 초대하게요? 괜찮겠어요?”
“번거로울 이유는 없겠지. 적어도 레이라는 치즈 너만큼 호기심이 강하진 않은 것 같아서 걱정 없겠어.”
은근히 나를 구박하려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나저나 나는 그의 결정이 몹시도 놀라울 따름이다. 곧 죽어도 레어에 타인이 발을 들이는 걸 가장 싫어했던 드래곤이다. 그런 드래곤이 레어에 누군가를 초대하게 되다니.
살포시 미소 짓는 파이가 갑자기 은근슬쩍 다가와 허리에 팔을 감는다.
“준비는 알아서 척척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레이라를 데리러 갈 시간까지 기다리면 되겠어. 그럼 우리는 이제… 잠시 유흥을 즐겨보는 건 어때?”
또 뱃속이 가늘게 진동할 정도로 야릇한 눈빛을 보내오는 파이가 내게 밀착했다. 후끈할 정도로 열기가 몰린 그의 피부가 맞닿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간질거리는 자극이 내 드레스 안으로 파고들 듯 밀려들어 와 등줄기에 소름이 훅 돋아나면서 허리를 잘게 떨었다.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허구한 날 정사 타령이니 큰일이다. 혼인은 허락해주지 않고, 그건 괜찮다는 거야? 가끔 보면 정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 같다. 파이가 이렇게 눈치 없는 드래곤이라니.
“나한테서 다른 냄새난다고 싫어했잖아요.”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니까 요령이 생기더군.”
말하면서 내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살살 문질러 간지러움을 전해준다. 그 뜨거운 숨결과 말랑한 입술이 지분거리는 야한 기분에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려 다리를 바짝 모아 붙였다.
또 아랫배가 화르륵 불타오르는 익숙한 감각을 느끼면서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때 불현 듯 떠오른 기억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으… 잠깐, 잠깐! 우리 아직 얘기 다 안 끝난 거 벌써 잊었어요?”
“아직도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었나?”
“당연하지! 마무리는 하고! 우선, 이것 좀 놓… 아, 떠, 떨어져욧!”
또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이 능글맞은 드래곤을 힘껏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역시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자꾸 뼈저리게 깨닫게 되니까 앞으로가 막막해지기도.
“치즈.”
“히잉… 왜요!”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리면서 애를 썼다. 그런 내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춰오는 파이가 순순히 나를 풀어주었다. 덕분에 위기에서 탈출한 고라니처럼 후다닥 도망을 쳐서 그를 흘겨보았다.
“흥!”
콧방귀를 뀌며 테이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온 파이가 의자를 끌어다가 내 옆에 바짝 붙여 앉았다.
그의 다리가 닿아서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진다. 내 손가락을 잡아 하나하나 섬세하게 매만지는 파이의 부드러운 손길에 또 심장이 몽글몽글해졌다.
“언제쯤이면… 네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차라리 전쟁의 선두에 서던 때가 편했다는 걸 여실히 느껴. 겨우 혼인 서약하나에 이리 삐딱하게 굴어대니…….”
“흥. 겨우 혼인 서약하나 해주지 않는 파이가 더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혼인하면 꼭 아이가 생겨야 하는 법은 없다고요. 내가 만약 나중에라도 아이를 원한다면 날 보내줄 거예요?”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