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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가 새로 사다준 레몬 셔벗을 입가심으로 먹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정보가 수집되기를 기다렸다. 그랬는데… 파이가 날려 보낸 까마귀가 다시 날아와 거의 다 먹은 셔벗 그릇 위에 또 안착한다. 까마귀의 가느다란 발이 셔벗을 전부 뭉개버려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셔벗이 아직 남았는데 왜 이러는 거람? 음식 아깝게.
“성격이 못돼서 그래. 치즈 네가 이해해라.”
살포시 웃는 파이가 한 손으로 까마귀의 몸통을 확 잡아다가 들어 올렸다. 그러자 까마귀가 기겁하면서 꽥꽥 요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
그리고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까마귀의 다리에 매달린 통에서 종이만 꺼내고 까마귀를 휙 던져버렸다. 그러자 덫에 걸렸다가 빠져나온 새처럼 정신을 못 차리면서 서툰 날갯짓을 하더니 그대로 휭 날아가 버렸다.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을 가는 느낌이라서 조금 안쓰러워지기도.
“일단 레이라가 머물고 있는 장소를 알았으니 그쪽으로 방문요청을 넣어보도록 할게.”
“가까워요?”
“제국 내에 있으니 가깝다고 할 수 있지.”
가까운 곳에 레이라가 있다.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조금 상기된 뺨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럼 드레스 맞추러 갈 시간이 빠듯… 헉! 맞다! 선물!
그러다가 손뼉을 짝 마주치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파이에게 알렸다.
“레이라에게 줄 선물은요? 드레스는 어쩌지? 하루 만에 완성되진 않잖아요. 아니, 완성된 드레스도 있으려나?”
“진정해. 원래 귀족은 미리 정해놓은 일정대로 움직여서 당장 만날 수는 없어. 우연히 지나가면 모를까.”
“…어? 레이라다!”
파이가 말한 대로 정말 우연찮게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가게를 지나가는 마차 안에 익숙한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그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자마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와 딱 마주치면서 서로 놀라버렸다.
무심하게 마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여성은 레이라가 분명했다. 고운 청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 진짜 귀족처럼 귀여운 모자와 장신구로 한껏 멋을 낸 익숙한 모습.
레이라 역시 마차를 세우고 다급히 드레스를 갈무리하면서 마차에서 내린다. 나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이라를 향해 뛰어갔다.
“레이라!”
“치즈!”
그렇게 우리는 서로 와락 껴안으면서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마치 몇십 년 떨어졌다가 만나게 된 자매로 착각할 만큼.
길거리에서 마차를 세워놓아 민폐라서 레이라가 바로 마부에게 금액을 지불했다. 마차를 보낸 뒤에 우리는 다시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 방방 뛰기까지 했다.
“온다는 연락을 받긴 했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대체 무슨 일이야?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이긴 하는 걸 보니… 성공했어?”
“그, 그건 나중에 얘기해줄게. 듣는 귀가 너무 많아, 레이라.”
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위를 살피자, 레이라 역시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는 레이라의 손을 잡고 파이가 앉아있는 브런치 가게로 돌아왔다.
“진짜 파이 말대로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레이라도 내 키다리 아저씨, 알지?”
“오랜만에 뵈어요.”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지만 파이는 늘 그랬듯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는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레이라를 파이의 맞은 편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의 중앙인 대각선 자리에 앉아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파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제국에 일이 있어서 왔다는 얘기 들었어. 어디 가는 길이었던 거야?”
“응. 오늘 일정이 없는 날이라 아카데미를 한번 둘러볼까 하고 가던 중이었어. 정말 치즈 너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해서 나 지금도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나도 그래! 마침 우리 이 자리에서 딱 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너 보자마자 꿈을 꾸는 줄 알았다니까?”
“정말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해. 이 넓고 넓은 땅에서 이 시간에 이 제국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물론 나 역시! 그런데 자꾸 일정이 꼬여서 얼마나 속상했다고. 아, 뭐 마실래? 식사는?”
“이미 먹고 나오는 길이라.”
“그럼 나는 딸기 바나나주스! 너는?”
“나도 그거 마시고 싶었어.”
역시 입맛도 취향도 비슷해. 다만 남자보는 눈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오로지 파이뿐이었고, 레이라는 예쁘장하게 생기고 조금 말랐다 싶을 정도로 체격이 작은 남성을 좋아했으니까.
우리가 메뉴를 결정하자마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파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파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레이라가 내게 상체를 확 숙여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도 같이 살아? 여전히 매너가 남다르시네, 너의 키다리 아저씨는?”
“쉿. 저 키다리 아저씨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리고 귀가 달려서 우리 이야기 다 듣고 있을지도 몰라.”
“설마 마법사야?”
“비슷해.”
“그렇다면 그간의 이야기들이 설명되긴 하네.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정체가 궁금했거든.”
레이라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기숙사에서 레이라와 한방을 썼는데, 파이가 가끔 내게 보내던 나비 편지를 레이라가 본 적도 있었거든. 그때마다 이건 꽤 고급마법이라서 돈으로 사려면 거금을 들여야 한다고 했었다.
물론 나는 파이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입을 싹 닫았고, 레이라는 내게 함부로 캐묻지 않았었다. 나 역시 레이라가 좋아하던 집사에 관해서 묻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언젠가 털어놓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늙지 않는 이유와 파이가 보통 마법사가 아닌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과연 레이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파이한테 말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그러던 사이에 파이가 새 음료를 들고 와서 나와 레이라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내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자리에 앉았다.
“여기에는 시럽을 가득 넣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레이라의 음료는 시럽을 조금만 넣어달라고 했고. 또 이건 맛보라고 준 해시브라운.”
말하면서 하얀 기름종이 위로 맛있어 보이는 해시브라운이 가득 담긴 갈색 바구니를 중앙에 내려놓았다. 황갈색을 띤 노릇노릇한 튀김을 보고 있으니 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맛보라고 줬다고요? 공짜로?”
“네가 너무 맛있게 잘 먹어줘서 고맙다고 주더군.”
어머, 감사해라. 내가 먹을 거에 약한 걸 어떻게 알고.
“역시 사람은 음식에게도 진심을 담아서 맛있게 먹어줘야 한다니까요?”
말하면서 가게를 슬쩍 쳐다보자 주방장처럼 보이는 젊은 사내가 내게 수줍은 눈인사를 전한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물론… 그랬다가 파이의 따끔한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
나는 맛있는 해시브라운 조각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딸기 바나나 주스를 홀짝 마신 뒤에 묻자, 레이라도 주스 한 모금을 마시며 만족스럽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은다고 바자회를 연대. 그래서 나도 좋은 뜻이니까 입지 않는 드레스나 안 쓰는 물건을 몇 개 보냈거든. 그래서 행사가 잘 진행되고 있나 볼 겸 겸사겸사.”
“어? 그런 행사가 있었어? 왜 나는 몰랐지?”
“서류에 작성된 주소로 우편이 도달했을 텐데?”
아, 그럼 못 받았겠군. 그 저택은 파이가 해저 깊숙한 곳에 버렸다고 했으니 아마 배달부가 깜짝 놀랐을 거다. 배달지가 텅 비어있었을 테니까. 그보다 가는 길에 아나콘다를 만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어쩐지 미안해지네.
“미리 알았으면 나도 참여했을 건데.”
“매년 하는 것 같더라고. 또 얼마 뒤에 황궁에서 무도회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려고 왔지.”
“황궁 무도회?”
“아, 치즈 너도 참석할래? 이번에 우리 치치르자 왕국하고 제국이 새로 맺은 협약을 축하하기 위해 열리는 무도회야.”
“오? 정말?”
“치치르자 왕국의 주요 귀족원들이 거의 참석해서 아는 얼굴이 몇 있을걸? 다들 널 궁금해 해. 아직도 그 숲의 저택에 살고 있어?”
내가 3년을 살았던 녹음이 우거진 깊은 숲속의 어느 한적한 저택을 떠올려보았다. 여름철 날벌레와 거미만 빼면 그 숲의 저택에 살았을 때가 좋았지.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을 뻔했던 인간세계의 삶. 내 쪼꼬미 식기세트! 내 추억!
“아니. 아쉽게도 졸업하자마자 거길 떠서 다른데 살아.”
“아, 다행이다. 나 정말 되게 불안했었거든.”
“왜?”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네가 살던 숲이 괴물의 숲이라고 불리는 데라고 하더라고?”
괴물의 숲이라기보다는, 아나콘다의 숲이긴 하지. 마지막 날에 보았던 그 덩치 커다란 뱀의 노란 눈과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괴물처럼 무섭기는 했어. 역시 파충류는 나랑 안 맞아.
“그, 그랬어?”
“제국의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위험한 곳이라고 했었는데 네가 거기 산다고 하니까… 아마 그래서 너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더 돌았던 거로 생각해.”
“그렇구나. 글쎄 나는 딱히 나빴던 기억은 없어. 아주 무사하게 잘 살았고, 워낙 여기 이분께서 은둔을 즐기시는 터라.”
나는 눈짓으로 파이를 가리키며 모른 척 주스를 홀짝 마셨다. 이 해시브라운 맛있네. 짭조름하고 달콤하고 고소해. 딱 주스랑 잘 어울리잖아? 단짠단짠.
“아, 그럼 있잖아. 치즈 너만 괜찮다면 오늘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
“만찬?”
만찬 하니까 프리센 왕국에서의 오찬이 생각난다. 기왕이면 우리 주방장 요리를 맛보여주고 싶은데.
“파이, 파이.”
“왜.”
“우리 레… 아니, 저택에 레이라를 초대하는 게 어때요? 우리 주방장의 솜씨를 레이라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요. 내가 아카데미 다닐 때 엄청 자랑했거든요.”
그러자 파이가 미간을 확 좁히며 눈썹을 잔뜩 구겼다. 레이라는 내 말에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나와 파이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예전에도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내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가 바로 거절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또 살짝 울컥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삐딱하게 굴고 투정을 부리다가… 또 그 깜깜한 밤에 숲 한가운데 떨어지는 큰 벌을 받았지.
파이가 주는 벌은 정말 자비가 없기로 유명하다. 벽보고 두 팔에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얹어주고 버티라고 하는 건 그나마 가장 쉬운 체벌이었다. 최고로 무섭고 아찔했던 것은 어두컴컴한 야밤에 숲 한가운데에다가 나를 버려두고 가버릴 때였다.
부엉이는 울지. 늑대의 하울링소리가 끝없이 펼쳐지지. 갑자기 어디선가 툭툭 튀어나오는 작은 곤충들이 내 피부에 스치고 지나가지. 끈적한 거미줄이 손이며 머리에 뒤엉키지. 무성한 나무에 가려져 바닥도 잘 보이지 않지.
내가 벌레와 밤을 무서워하는 걸 아는 파이가 내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그럼 나는 펑펑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공포에 몸을 떨면서 눈물콧물 다 빼고 나서야 파이가 구하러 와줬다.
그게 어릴 때의 철없는 오기가 부른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는 파이가 화날 것 같다 싶으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애초에 파이의 말을 잘 들은 편이기도 했고.
흑, 이젠 나한테 그런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아니 했다가는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