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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양은 나중에 사랑받는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섬세하고 꼼꼼하고. 요리는 만드는 이의 성격을 보여주거든요? 맛도 좋고, 모양도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만들기도 하고요.]
사랑받는 요리사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이렇게 무언가를 내 힘으로 해내는 건 요리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아카데미에 다니기 전에 유일하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기 정도였으니까.
그때 내 힘만으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던 내 생각을 확 전환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손재주가 좋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 요리선생님 덕분에 요리 수업에 더 몰두했다. 그분이 나중에 파티쉐가 되어도 성공할 거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더 자신감이 생겼었다.
그 뒤로 2학년이 되어 제과제빵 수업을 들으면서 내 미래의 원대한 꿈을 기획했다. 그리고 레이라가 나중에 자기네 저택으로 오면 왕국에서 유명한 파티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꼭 가출에 성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가출이 아니어도 파티쉐의 꿈을 이룰 수는 있어.
“언제 그런 생각을 다 했지?”
“아카데미 다닐 때부터요. 제가 요리 수업만큼은 열심히 했거든요! 요리는 제 취향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미식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귀여운 걸 좋아하는 네게 퍽 어울리는 직업이기는 하고.”
이 짐승이 자꾸 병 주고 약 주고… 왜 이렇게 얄미운 건지.
“나는 맛도 좋고 눈도 즐거울 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양의 디저트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기쁨을 안겨줄 거라고요!”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를 향해 발표하듯 당당하게 외쳤다.
“…왜?”
한참을 나만 빤히 쳐다보던 파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나야말로 그가 내게 하는 질문의 의도를 몰라서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라니요?”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하려는 거냐고 묻는 거다.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면 레어에 네 전용 주방을 만들어 줄 수 있어.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요리를 다 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도와줄 파티쉐도 붙여줄 수 있다.”
“또 그런 끔찍한 소리를!”
“…이게 왜 끔찍하지?”
내가 기겁을 하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파이가 눈썹을 휙 들어 올리면서 되물었다.
“파이는 몰라도 나한테 레어는 감옥이라고요! 내가 왜 레어에서 지내는 걸 싫어하는데?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소통하는 곳이 치치르자 왕국이었으면 했다고요!”
치치르자 왕국이 레이라가 있는 곳이다. 또한, 나의 모든 전반적인 계획을 레이라와 함께 세웠기 때문에 파이의 도움 없이도 혼자 해결할 수 있었다.
레이라가 나를 자기 저택에서 고용해준다고 했으니까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해결된다. 또한 계약기간동안 저택의 파티쉐에게 수업을 받는 조건으로 얘기가 되었던 거니까.
“레이라와 일을 꾸미긴 했나 보군.”
나는 레이라의 ‘레’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파이가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 심장이 철렁거렸다.
“레이라가 네 뒤를 봐주기로 했나 보지? 다른 곳도 아니고 레이라가 머무는 치치르자 왕국을 꼭 가야 한다고 하니… 나 몰래 둘이 계획을 짜고 나를 떠날 생각이었던 거냐?”
어, 어떻게 알았지?
“아, 아, 아니거든요?”
“보아하니 하룻밤을 보내고 가출을 하려던 것도 충동적인 생각으로 저지른 게 아니었군. 그래서 그렇게 레이라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서두른 이유가 있었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파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뭔가 괘씸하다는 듯 불만을 가득 담은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어서 재빨리 눈을 굴렸다.
“그… 그게…….”
“이제야 좀 앞뒤가 맞춰지네. 그 깜찍한 머릿속에서 얼마나 앙큼한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 내내 궁금했는데.”
그렇게 티가 났나?
나는 괜히 속마음까지 들통 난 것 같아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파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이야기는 나와 의논을 해야지. 앞으로는 꼭 내게 먼저 말을 해주길 바라.”
또 뭔가 구박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눈빛은 단호하게 ‘안 돼!’를 외치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먼저 말하면… 허락해 줄 생각이었어요?”
“파티쉐가 되는 걸 말리지는 않는다. 장사도 적자가 나도 괜찮으니 쉬엄쉬엄 즐기면서 하길 바라. 아니면 사람을 고용해서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단, 여성 파티쉐로만.”
뒷말을 강조하면서 표정까지 싹 굳힌다. 그 표정의 뜻은 괜히 다른 사내와 눈이라도 마주치다가 걸리면 봐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아마 디저트 가게를 허락한 이유도 남자 손님보다 여자 손님이 더 많기 때문이겠지. 그뿐만 아니라 내가 일을 하면 종일 붙박이처럼 가게를 지키는 최초의 드래곤님이 되실 것이다. 보지 않아도 미래가 훤히 보이네.
그러다가 일을 돕겠답시고 계산대에 서 있는 파이를 떠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앞치마 입고 표정 싹 굳힌 파이 주위에 얼씬도 못 하고 멀리서 지켜볼 여인네들이 수도 없이 생겨나겠지. 일부러 파이를 보려고 오는 여자들이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줄을 설 것이다. 그럼 매출이 더 오를 수도 있으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해.
“그럼 돌아가면 앞으로의 일에 대한 구상을 좀 해야겠네요.”
일단 내가 먼저 열심히 배우는 게 먼저다. 잘 해내고 싶어. 나 혼자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니까.
우리는 브런치 가게에 입성해서 야외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이가 사다준 딸기 아이스크림 팬케이크를 아주 맛있게 음미했다.
“여기도 변하지 않았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어요.”
맛있는 음식 하나에 그나마 속상하던 생각들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파이가 그제야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단지 그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인데, 또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건지.
참 이상해. 이런 거 보면 내가 파이를 엄청 좋아하고 있긴 한가봐. 이 마음이 정말 식어버리는 때가 오기는 할까? 파이 말고 다른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다 먹었어? 더 시킬까?”
“딱 여기까지가 좋아요. 나중에 또 와서 먹으면 돼. 맛있다고 한 번에 다 먹어버리면 바로 질리더라고요. 아! 그럼 레몬 셔벗으로 후식 먹을래요!”
“알았다. 금방 가져올게.”
나는 주문을 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간 파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은근 귀찮을 법한데 단 한 번도 귀찮다는 티를 내지 않는 그가 참 대단하다. 드래곤이 사람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소문이 나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겠지. 나도 신기한데 남들은 오죽할까?
나는 마지막 남은 팬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서 한입에 집어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지난번에 프리센 왕국에서 칠리 소시지 핫도그를 먹었을 때만 해도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몇 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지니까 정신이 없긴 했었다. 파충류로 변할 뻔했고, 파이의 피를 마셔보기도 했고……. 으윽,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어떻게 맛있게 먹었을까 싶어.
그때 갑자기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빈 그릇 위에 착지해서 깜짝 놀랐다.
“…으악!”
뒤늦게 몸을 뒤로 확 젖히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만약 팬케이크가 남았으면 저 까마귀의 발에 뭉개졌을 거다. 아까울 뻔했어.
그 사이에 파이가 레몬 셔벗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까마귀에게 손가락을 내민다. 그러자 바로 파이의 손가락에 올라타는 까마귀가 크게 울부짖어서 깜짝 놀랐다. 덩달아 주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흘끔거리면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더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거… 뭐예요, 파이?”
나는 까마귀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이가 아무렇지 않게 까마귀의 다리에 매달린 작은 통에서 종이를 쏙 빼내며 대답해주었다.
“전서구 역할을 하는 놈이야. 아까 레이라의 저택으로 언제 방문해도 괜찮은지 서찰을 날렸거든. …그런데 마침 잘되었네. 치치르자 왕국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어.”
“왜요?”
“아카데미 행사와 이 제국 내에서 치러지는 무도회 날짜가 비슷해서 그 두 곳에 참석하기 위해 이미 제국에 와있다고 하는군.”
“헉, 정말?”
그럼 레이라가 여기 있다는 말이야?
나는 동그랗게 뜬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활짝 웃었다. 확실히 레이라와 나는 운명의 짝이 분명하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마침 딱 내가 제국에 있을 때 레이라도 제국에 머물러있다니.
“잘되었네요! 그럼 지금 제국 어딘가에 있는 거잖아요? 어디 머물고 있는지 어서 알아봐요! 네?”
내 하나뿐인 유일한 친구!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인간 친구이자 내게 선의로 도움을 베풀어준 사람이다. 나와 취향도 비슷하고 입맛도 비슷한 데다가 서로의 생각도 딱 맞는 유일한 친구.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혼의 반쪽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장단이 잘 맞았다. 덕분에 내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지.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해도 또래들과 어울린 적이 없다 보니 낯을 엄청나게 가렸다. 늘 바짝 긴장했고 표정은 얼음처럼 잔뜩 굳어버린 채라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었다. 하지만 스스럼없이 나한테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레이라였다.
[안녕? 어제 디저트 가게에서 너 봤었는데. 이번 학기 처음 입학한 거지? 우연히 대화를 듣게 되었거든. 혹시 선약이 없다면 나하고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
파이 없이 혼자 생활해본 적이 없던 터라 낯선 공간에서 혼자 모든 걸 헤쳐나가야 했다. 정해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근처만 기웃거리다가 식사 때를 매번 놓쳤다. 쫄쫄 굶은 상태로 수업을 들을 때면 혼자 울적해져서 아카데미에 괜히 보내달라고 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데리러 온 파이가 먹을 간식을 건네주면 허기진 짐승마냥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도 했다. 덕분에 초반에는 아카데미 근처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저택으로 돌아갔었다.
그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이라가 나를 가게에서 봤었는지 친해지고 싶다고 먼저 접근해왔다. 나에게 있어서 레이라가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몰랐는데 나랑 수업이 겹치는 것도 있어서 그 이후로 외롭게 혼자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레이라가 나보다 아카데미를 2년 먼저 다녔는데도 마음이 맞는 친구가 없었다고 하더라. 나를 만나서 3년 내내 즐거웠다며 말해주는 레이라의 말에 나 역시 동의했다. 레이라가 아니었으면 정말 아카데미를 도중에 포기하고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저녁까지 쫄쫄 굶는게 너무 힘들었거든. 배고픈 걸 제일 못 참겠더라고. 흑흑.
“빨리 만나고 싶다. 내 친구!”
맛있는 팬케이크도 다 먹어서 적당한 포만감이 느껴져 기분이 매우 좋았다. 저 내 마음도 몰라주는 못된 드래곤 말고 레이라를 만나고 싶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