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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라 드래곤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털어놓는 파이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아서 괜히 초조해졌다.
“왜 그래요, 파이? 나는 조금도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네게 생명의 뿌리를 내리게 할 수가 없어. 지금껏 살아오면서 드래곤이 어느 종족과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아이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물론 파이하고 똑 닮은 아이를 만날 수 없는 건 아쉽지만요.”
아이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두 사람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시점인데, 파이는 왜 혼자 딴 걱정을 하면서 멀리 가버렸을까?
“지금은 미련이 없겠지만 훗날 생각이 달라질 거다. 종족 번식은 누구나 원하는 중요한 숙명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삶의 의의나 마찬가지지.”
그럼 아까 하유르가 파이에게 그 보석이 필요할 거라는 뜻이 이런 거였을까? 그 보석은 드래곤의 아이도 임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 하지만 그걸 받으려면 파이가… 하유르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해야 하는 거고?
…그건 싫은데. 그냥 아이가 없어도 좋으니 그건 배제하고 서로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참 이상하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내가 파이와 다른 성격인 것처럼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달라요. 나는 파이를 원하지, 파이와의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요점은 제대로 찍고 넘어갔으면 좋겠네요.”
내가 확신을 담아서 말을 해줘도 파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러니까 진짜 우리 두 사람이 어긋난 톱니바퀴라는 것을 자꾸만 인지하게 된다.
대체 문제가 뭘까? 왜 저렇게 복잡하게 생각을 하는 걸까? 참 답답하네.
이대로 길게 대화를 나눠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서로 뭐가 맞아야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이건 너무 멀리 왔다.
일단 내 생각을 털어놨으니까 기다리자. 그의 머릿속에 내 말이 녹아내려 섞이려면 조금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파이에게 생각할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는 어차피 평생 함께할 생각이라면 그깟 서약서 하나가 문제인가 싶어요. 아이 문제는… 생각 안 해봤지만, 그것도 문제될 건 없다고 봐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거다. 이제 슬슬 화가 나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을 줬는데도 끝까지 나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가 정말 그와 내가 끝나는 날이다. 제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종족번식은 생명이 가진 본능이다. 하물며 들꽃조차 자신의 씨를 수정시키기 위해 향기로 나비와 벌을 유혹해 이용하지.”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원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면 굳이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나는 상관없다니까?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의 진심이지, 아이가 아니라니까 그런다?”
“그렇게 쉽게 단정 짓지 마라. 지금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이는 둘째 치더라도 내가 너와 혼인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뿐이 아니다.”
“그럼요?”
다시 입을 꾹 다문 그가 선홍빛의 눈동자를 내리깔고 조금 초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뭐, 파이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그거 때문에 그래요?”
내 물음에 파이의 얼굴근육이 급격하게 꿈틀거렸다. 드래곤은 죄책감 같은 거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뭐 바보예요? 그 전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챘는데 프리센 왕국에서 들었을 때 확실하게 깨달았지요.”
이십년 전 드래곤과 대마법사의 싸움 때문에 무너진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나. 그렇다면 그 싸움 때문에 내 부모님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거다. 듣기로는 그 대마법사가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파이가 폭주한 거였으니까 파이가 잘못한 건 아니다.
물론 아예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수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것보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던 나를 거둔 파이가 그저 대견했다. 얼굴도 모를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안타깝지만 내 어머니의 유언을 잊지 않고 키워준 그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일일이 신경을 써가면서.
“파이가 평생 나를 아껴주면 돌아가신 내 부모님도 파이를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
“…그때처럼 또 폭주할 수도 있다. 그럼 마력 하나 없는 평범한 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지금까지 몇 번 폭주할 때도 잘 참았잖아요? 설마 딱 이십 년만 참을 생각이었어요?”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랑 혼인하기 싫어서 이러는 건가.
마치 벽하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파이가 너무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저 남자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다.
일단 내 속이 홀랑 타버리기 전에 분위기를 좀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일단 파이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일부러 비꼬는 말투로 대꾸하며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물론 파이는 눈 하나 꿈쩍하지도 않았다.
정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 혼인 하나에 왜 이렇게 발목을 잡는 문제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이 남자가 진짜 나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아무래도 파이와의 관계를 정말 진지하게 재고해봐야겠다. 이러다가 정말 내가 먼저 지쳐서 가슴이 홀랑 타버려 죽을 것만 같았다.
“우리 드레스부터 맞추러 가요. 우선 레이라를 먼저 만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요.”
나는 설마 아이나 폭주나 내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마음이 식어버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지. 무엇보다 정작 나는 아이에 대한 미련이 없는데 파이는 아닌가 보다. 아니, 어쩌면 그저 그의 마음이 거기까지인 걸지도.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하는 그 시련들을 이겨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결국 우리 사이가 더욱 혼란에 빠져버려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다니. 대체 신은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거냐고!
나는 울적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다시 방으로 돌아와 외출용 드레스를 새로 갈아입었다. 뺨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지혈연고를 바른 뒤에 피부색과 비슷한 두꺼운 거즈를 붙였다. 그러고 나서 파이의 머리에 났던 상처를 치료해주려고 했건만.
“나는 됐어. 놔두면 알아서 치유돼.”
상처를 건들지도 못하게 해서 조금 시무룩해했다. 그리고 파이에게 안겨 이동마법으로 아카데미가 있는 제국 근처의 숲에 도달했다.
“어? 릴리! 너 아직 살아있었구나?”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릴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울적했던 기분이 풀어졌다. 프리센 왕국에서 헤어진 이후로 처음 보니까 거의 몇 달 만에 보게 되어 반갑기도 하고.
“내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과거에 네가 나를 배신하고 가버렸던 기억을 말끔하게 잊어줄게. 나같이 좋은 주인을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그리고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릴리의 콧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릴리, 앞으로 오래오래 봐야 하니까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아마 릴리도 이제 조금 더 지나면 귀여운 아가도 낳고, 릴리의 자손들이 나랑 같이 지내게 되겠지?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그냥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건데 릴리 등에 있는 안장을 정리하는 파이의 표정이 확 구겨진다. 물론 그랬다가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이미 나는 봤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언제나 내 신경은 파이에게 쏠려있는 채니까.
“이리 와, 치즈.”
나를 부르는 파이의 목소리에 재깍 파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도움을 받아 릴리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한마디 말없이 숲을 빠져나갔다. 파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다. 나 역시 그저 릴리의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괜히 여기저기 더 둘러보기만 했다.
어쩐지 또 옛날로 돌아가 버린 것 같다. 내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던 그때로.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내용을 떠올렸다.
“파이. 일단 식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배가 좀 고파지려고 하네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뭘 먹고 싶어?”
“음……. 간단하게 딸기 아이스크림 팬케이크?”
“위치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파이가 까칠하게 변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괜히 간질간질하고 더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하지만 지금 그럴 기분은 아니니까. 나는 팬케이크 가게의 위치만 설명해주었고 주변 경치를 눈으로 감상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제국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아카데미 정문을 지나치자 곧 브런치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예요.”
나는 브런치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곧 가게 근처의 말 보관소에 릴리를 들여보내고 나자, 파이가 내게 손을 불쑥 내민다. 그래서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꺼냈다.
“확실히 제국이 편한 건 있어요. 말도 따로 보관할 수 있고, 대로도 시간대 별로 청소를 다 해주니까 깔끔하고. 제국에 와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파이 생각은 어때요?”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범죄가 늘지. 제국은 그리 안전하지 않아.”
“하지만 장사를 하려면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했는데…….”
“…장사?”
갑자기 걸음을 멈춘 파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힌다. 그래서 나는 눈동자를 데굴 굴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파이를 떠나서 살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게 장사였나?”
“파티쉐요.”
“파티쉐?”
“응! 내 손으로 일하고 내 손으로 직접 돈을 벌어서 내 가게를 차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는 유명한 파티쉐가 되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생각이에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묻는 파이에게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화답해줬다.
파티쉐를 꿈꾸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내가 유일하게 집중해서 듣던 과목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리 수업이었다.
우리 아카데미에서는 남녀구분 없이 전부 기본적인 요리 수업을 2년간 필수로 들어야 했다. 1학년 때는 간단히 샌드위치 만드는 방법이나 간단한 핫도그와 쉬운 생과일음료 정도를 만드는 수업. 2학년 때는 제과제빵 수업이었다. 진짜 그 수업시간만큼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집중해서 들었었다. 그래서 레이라도 무슨 먹는 거에 목숨 걸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른 과목들처럼 시큰둥하게 깨작깨작 파스타 면을 팬 위에서 볶았다. 그날은 크림파스타를 만들 때라 레시피대로 크림을 만들고 다른 팬에 졸이고 있었다. 그전부터 유난히 날 예뻐하던 선생님이 초반부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선생님이 참 수줍음이 많고 귀여운 여성분이셨는데 굉장히 인자한 미소를 짓던 분이라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