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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미소를 짓는 하유르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진동을 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굽이굽이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욕실을 빠져나간다.
그나저나 파이의 아이를 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파이 자체도 아니고 파이의 아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이의 아이를 원하는 걸까? 꽤 오래 파이를 마음에 품었던 것 같아보였는데.
사라진 그녀의 조금 슬퍼보이던 뒷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가슴이 조금 욱신거렸다. 나 역시 파이에게 차였던 전적이 너무 많아서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파이.”
“걱정 마라. 네가 생각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거다.”
다정한 어조로 속삭이는 그가 나를 감싸 안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다독거린다. 하유르를 내치던 아까와 다르게 지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태도다.
모든 여성에게 다정한 사람보다 내게만 다정하고 나만 바라봐주는 사내가 좋은 거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가 참 좋기는 하다. 다만 그 애정이 영원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뿐이다.
사실 겁이 나기도 해. 원래 연애 초반에는 잘해주다가 사랑이 식으면 서로 소원해진다고 해서. 서로 노력으로 극복하면 되는 문제라고 하지만.
그보다 내가 겁이 나는 건 파이의 무심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파이의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은 게 느껴진다면 나는 아마 덜컥 겁이 나서 먼저 도망갈지도 모르거든.
“파이. 나도 파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건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지레 겁을 먹고 무서워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게 맞을 거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줘서 미리 방지를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마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나비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이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욕실을 빠져나오면서 마법을 이용해 나와 자신의 몸에 묻은 핏물을 순식간에 제거해주었다.
파이가 머무는 거처는 너무 무식하게 넓어서 적응이 되질 않는다. 커다란 공간을 천천히 훑어보기만 해도 가끔은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다. 내가 진짜 세상의 먼지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어서 뭔가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 어릴 때부터 그랬다. 동굴 안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동굴 정원에 가고 싶어요, 파이.”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나마 마음에 안정이 오는 곳으로 가자고 졸랐다. 당연히 파이는 군말 없이 내 손을 잡아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그 넓은 장소를 빠져나왔다.
파이가 마법으로 빛덩어리를 만들어내 주위를 밝혔고,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걷는 데 집중했다.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바닥이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도 모자라 넘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기도 했다.
“괜찮아, 치즈?”
“…안 괜찮아 보이죠? 응, 괜찮지 않은 것 같아.”
“너도 보면 쓸데없는 감정소비를 많이 하는 편인 것 같다. 생각은 단순한데 왜 감정에는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건지.”
어쩐지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심장이 쫄깃해진다. 분명 파이는 마법으로 내 머릿속을 탐색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
“내가 어딜 봐서 솔직하지 못해요? 나처럼 솔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파이야말로 표정이 얼음처럼 딱딱하잖아요. 파이는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말로 표현하잖아. 진심 어린 말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파이는 표정이 별로 없는 대신, 아주 그냥 말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니까. 그래서 더 억울해! 나만 흔들리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진지하게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말해주면 안 될까?”
…갑자기 본론을 꺼낼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생각의 정리도 되지 않았단 말이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리의 연애에 대한 종지부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 나에 대한 마음이 대체 어떤 쪽으로 진심인 건지. 또 아까 그 언니랑 대체 무슨 사이인지도.
“이, 일단! 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요.”
“만약이라는 건 없어. 괜한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여러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거 먼저 물어볼게요. 아까 그 하유르 그 언니랑 어떤 사이에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
무진장 싫다는 뜻이로군. 물론 아까도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이는 적당히 좋은 것과 싫은 것에 대한 표현이 똑같아서 사실 아직도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럼 그 언니, 정말 루즈 제국의 황제예요?”
“루즈 제국의 145대 황제로 알고 있다.”
“헉! 진짜?”
“치즈.”
갑자기 걸음을 멈춘 파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꺼풀만 빠르게 끔뻑거렸다.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던 중 아니었나?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엇나가지 않았으면 하는데.”
“…내가 가장 궁금한 건, 파이의 생각이에요. 파이의 그 사천 년 묵은 머릿속 말입니다.”
“내 생각? 그건 몇 번이나 네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네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닌 사실이며 한 치의 거짓도 없어. 그런데 뭐가 문제지?”
“마음이요. 사천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파이의 이 심장. 여기 이 아이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나는 손가락으로 파이의 가슴 위를 콕콕 찌르면서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파이와 연애를 시작한 지 이제 두 달 쯤 되었나? 막 봄이 오려고 하던 내 성년식 날 그와 첫날밤을 치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짜 연애를 빌미로 사랑을 했다.
파이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애정을 듬뿍 주는지 알아.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이 언제 식어버릴까 전전긍긍하며 혼자 마음을 삭였다. 확실히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체질이라는 걸 알아버렸지. 하여간 파이와 함께 있으면 기쁘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건 내 쪽이었으니까.
파이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본인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안다. 나는 그와 하나라는 의미로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다. 그래야 내가 편해질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파이가 사천 년간 잠잠했던 감정이 다시 제대로 일하려면 한참 멀었을 거다. 아직 스스로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저러다가 영원히 깨우치지 못하면 시간낭비에 감정소비니까.
“파이.”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바로 지금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겠다. 나는 이제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일단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파이가 내게 어느 정도 진심인 것 같다. 그러니 지금 그에게 확실히 내 마음을 전하자. 만약 파이가 내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를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파이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싶어요. 만약, 파이가 싫다고 한다면 파이와의 지금 이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거든요.”
확실한 건, 그의 눈에 차는 내 신랑감은 평생 나타나지 못할 거다. 혹시 모르지. 신이라면 가능할지도.
“파이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우리 둘의 관계가 조금 더 형식적이었으면 해요. 아카데미도 규정대로 학기를 마치면 졸업장을 주잖아요? 연애도 마찬가지 같아요.”
에이든도 그랬다. 파이가 나를 보는 눈빛이나 태도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집착 어린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그렇다면 굳이 혼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파이가 이만큼이나 나를 아끼고 사랑해준다면.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주고도 파충류로 돌변하려는 나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아껴준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그의 진심이자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확실하니까.
“더 이상 불안해하면서 가짜 연애를 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관계가 흐지부지되지 않기 위한… 확신을 내게 주세요.”
드래곤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종족이다. 확실히 종족 자체가 다르다 보니 점점 커가면서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그와 내가 완전히 다른 성향, 그야말로 딴 세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자유로운 연애? 좋지. 나쁠 거 없어. 만약 내가 보통 인간으로 남게 되었더라면 그냥 포기하고 짧은 인생 즐기면서 살자고 마음을 먹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내가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죽지 못하는 육체란 말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이렇게 애매모호한 관계로 살게 되는 건 끔찍했다. 사실… 이제 겨우 스무 살 먹은 내가 앞으로의 긴 시간을 어떻게 살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네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네 소원대로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줄 참이었어. 원한다면 단지 계약서 한 장뿐인 혼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호, 혼인도?”
파이도 그런 진지하게 생각하긴 했었구나. 하지만 그가 뱉은 말에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단지 인간이었다면’이라는 것은, 지금은 아니라는 걸까?
“하지만 앞으로 수백 수천 년의 생을 목전에 둔 네게, 과연 올가미가 필요할지 의문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파이가 손가락으로 내 말랑한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면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드래곤은 어느 누구와도 가약을 맺지 않아.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네 말대로 감정이라는 건 언젠간 변하게 돼있어. 나 역시 치즈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두렵다고 하면… 믿어줄 텐가?”
“그러니까 서로 불안해하지 않기 위해서 혼인을 하자는 거예요. 내가 다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자 또 입을 꾹 다문 파이가 시선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긴다.
정말 진짜 나는 이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뭘 이렇게 부수적인 경우까지 따져가면서 계산을 하고 앉아있냐고. 답답해 죽겠네.
“우리 드래곤이 태어나는 경우는… 보통 종족들과는 달라.”
“태초에 인간이 탄생하기도 전에 있던 종족이 바로 드래곤이라고 들었어요.”
“맞아. 아무도 없는 숲속이나 바다 깊은 곳이나 심지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연고 없이 태어나는 종족이 바로 우리 드래곤이야.”
파이의 입에서 뜬금없이 쏟아지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것은 내가 아는 지식 밖의 이야기였다.
“그럼 자연에서 태어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자연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잖아요. 얼마나 숭고해? 자연이 준 고귀한 생명. 어머니를 아프게 하고 태어나는 인간보다는 낫지 않아요?”
드래곤의 출생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다. 드래곤은 정말 하나의 완벽한 생명이었구나. 정말 그가 나와 다른 종족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