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오, 오늘 할 일이 많아요.”
“방금까지 할 일 없어서 심심하다고 하더니?”
“마침 딱! 방금 생각이 나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이거, 좀 치우시고! 저리 가요!”
나는 그의 허리에 감고 있던 다리의 뒤꿈치로 그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리고 손으로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그런다고 꿈쩍할 남자도 아니지만.
“…이제 내게 볼일 끝났다 이건가? 너무하네, 치즈.”
그러자 파이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어서 비키기나 하라는 듯 모른 척 다리를 파닥거렸다. 물론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그의 살덩이가 문질러지는 바람에 불꽃이 확 튀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파이가 아쉬운 한숨을 흘리며 내게서 물러나 나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자 질 속에 가득 차있던 정액과 애액이 울컥 새어나와 버린다. 덕분에 침대 시트와 내 허벅지며 엉덩이까지 잔뜩 젖어버렸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파이만 빤히 올려다 봤다.
‘뒤처리 좀…….’
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그러자 파이가 눈치껏 나를 조심히 안아들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빠르게 욕조에 물을 받아 나를 그곳에 담가두고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하려고?”
“밖에도 나가봐야죠. 일단 레이라에게 찾아가야하고. 그전에 레이라에게 줄 선물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물을 받는 동안에 변명거리를 생각해봤는데 생각하다 보니 할 일이 제법 많더라고? 그래서 그가 묻는 말에 재깍재깍 대답을 해줬다. 파이도 언제까지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에 수긍했다.
“그렇군. 일단 그럼 레이라에게 줄 선물을 가장 먼저 처리하자.”
“그런데요, 파이?”
입욕제를 가득 집어넣어 잔뜩 생성된 거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파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나요……. 정말 수명이 늘어난 거 맞아요? 아무래도 영 실감이 나질 않아서…….”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일상이기도 하고. 평소의 몸 상태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보니 겪었던 일들이 생생한 꿈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좀 길게 꾸었던 꿈. 아니면 내 망상?
한 달 내내 방에서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저 책만 잃고 퍼즐 놀이만 하고. 아주 집순이가 되어 침대만 뒹굴뒹굴. 그리고 운동 겸 복도 밝은 곳만 파이와 함께 왔다갔다 움직인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꼭 옛날로 돌아온 느낌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다니기 전만 해도 늘 이런 일상을 보냈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깨닫기도 했고.
그래서 그 모든 게 다 꿈이었습니다, 라고 끝날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최대한 긴 시간을 파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괜히 입안이 쓰게 느껴져서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파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꾸했다.
“당장 와 닿진 않을 거야. 수명이 늘어나는 걸 네 스스로가 인지하진 못하니까.”
“파이도 그랬어요?”
“세월이 지나다 보면……. 너는 그대로인데 네 주변인이 늙어서 신의 부름을 받는 것을 몇 번 보고 나면 그때, 느끼긴 하겠지.”
신의 부름을 받는다는 말은 죽음을 겪는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파이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안쓰럽게 웃어주어서 또 가슴이 조금 욱신거렸다.
“그거… 경험담이에요?”
“내가 인간과 깊은 인연을 맺지 않는 이유이기도 해.”
그래서 나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건가. 인간의 수명은 다른 종족에 비해 턱없이 짧은 세월이긴 하니까.
“그럼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닌 걸까요? 내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데.”
은근슬쩍 그를 떠볼 생각으로 괜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살짝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나를 향한 파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욕조 안으로 성큼 들어와 나를 번쩍 안아서 제 허벅지에 앉혀두고 꼭 안아주었다.
좁아…….
욕조를 바꾼다는 게 깜빡해서 여전히 1인용 욕조란 말이다. 그래도 뭐, 좁긴 해도…….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듯 내 어깨를 섬세하게 감싸 안아주는 그의 아늑한 손길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네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크게 신경 쓸 이유도 없고. 네가 살아 숨 쉬는 동안은 여전히 내가 네 곁에 있을 거고, 내가 너를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에요?”
“그럼. 다만 그 시간이 아주 길어졌을 뿐이야. 다른 이는 몰라도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파이는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뭔가 걱정이 한가득 들어있는 말이라 괜히 또 심장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뻔했다.
참 이상하지? 파이의 저 말은 누가 들어도 애정이 듬뿍 녹아있는 달달한 연인의 느낌이 강했다. 저러니까 자꾸 파이의 마음이 헷갈리는 거다. 분명 나를 좋아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은근슬쩍 자꾸 밀어내니까 그의 진심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진심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굳이 그를 떠나려고 애써 마음먹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사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이 진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블랑 제국에서 머물 때, 파이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기다리다가 소파에서 선잠이 들 때가 간혹 있었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이는 에이든과 다르게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안아서 들어 올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곤 했다. 물론 나는 늘 그렇듯 그대로 잠든 척 연기를 선보였지만.
거의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걸음걸이에도 신경을 써서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주기까지. 누가 보면 보물단지 아끼듯 애지중지 나를 다루는 느낌에 코끝이 찡하기도 했다.
언제는 또 자고 있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그런 말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레어에 숨겨두고 싶은데… 그럼 너는 인권도 존중해달라며 떼를 쓸 테지.]
초조하다는 듯 불안함을 가득 안은 채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떼어내 주면서 정리를 해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잡으면 잡을수록 내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어. 대체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자조 섞인 웃음을 작게 터트리는 그가 내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춰주었다.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누워 나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었다.
그 말을 듣기 전만 해도 파이가 나와의 사이를 장난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내 몸과 나와의 육체적 관계만을 위해 나를 곁에 두고 있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나름 고민을 하고 신경을 써서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겉으로는 내게 절대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말에 좋다고 홀랑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나는 아직 파이한테 27번이나 차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청소년기 시절의 내 진심을 무참히 짓밟았던 그 상처를 전부 다 되갚아주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이대로 쉽게 용서하진 않겠어.
“그런가 보네요. 파이야 뭐, 내 옆에 늘 있어 주겠지요. 나중에라도 질리면 말해요.”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렇지 않아도 에이든이 혹시라도 싸우거나 헤어지면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뭐 아쉬울 것도 없네요, 흥.”
레어로 돌아오기 전에 에이든이 몇 번이고 그랬었다. 파이가 질리면 언제든 자길 찾아달라고. 물론 내가 아무리 파이와 헤어진다 하더라도 에이든을 찾아가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묶어놔야겠군.”
“내가 순순히 묶일 거라고 착각하면 곤란해요. 그랬다가는 두 번 다시 파이를 허락해주지도 않을 거고 보지도 않을 겁니다.”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파이에게서 고개를 팩, 돌린 채 당돌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파이가 입을 꾹 다물고 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 봐야 이제 하나도 안 무섭다! …식은땀이 나는 건, 물 온도가 뜨거워서야. 흠흠.
“이, 일단 빨리 씻어야겠어요. 레이라에게 간다고 해놓고 벌써 몇 달째야. 이러다가 봄이 다 지나가 버리겠다고요!”
괜히 더 호들갑을 떨면서 물 위로 둥둥 떠 있는 거품을 팔에다가 잔뜩 발라 비비며 깨끗이 닦는 척했다. 그러자 파이가 곰돌이 타월을 꺼내와 나를 꼼꼼히 씻겨주었다.
“드레스는 무슨 색이 좋지? 어떤 디자인을 원해? 기왕 레이라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새 드레스를 구입하자.”
“오! 새 드레스! 새 드레스는 언제나 옳지요.”
“지난번 맞춘 것보다 더 좋은 걸로 맞춰주마. 레이라의 선물로 드레스를 한 벌 같이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내 눈치를 슬쩍 보며 갑자기 드레스 타령이다. 뜬금없는 말이긴 해도 새 드레스를 맞춰준다는데 나쁠 건 없어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었다.
“파란색 드레스요. 기왕 맞추는 거 요즘 유행 디자인에 맞춰서 제작했으면 좋겠어요.”
유행 디자인이라는 말에 강조하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당돌하게 내 의견을 제시하자 파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면서 안면을 씰룩거렸다. 매번 드레스를 맞출 때에는 파이의 의견이 99.9%였거든. 내 의견 따위 묵사발이고 옛날 시대에나 유행했을 디자인만 골라서 만들어왔더랬다.
물론 예쁘긴 했어. 잘 어울리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그냥 주는 대로 입긴 했었다. 아카데미 학년 말 졸업파티 때 레이라가 내 드레스를 보고 한물간 스타일이고 놀리긴 했지만. 그래도 옷감이 고급스러워서 예쁘다고 했으니 그나마 위로가 되긴 했다.
하지만 내가 파이에게 신상을 밀어붙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 파이가 가장 싫어하는!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야한 디자인이라서! 원래 나는 그런 디자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냥 파이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한 번쯤은 입어보고 싶기도 하고.
“알았다. 일단 의상실은… 이번에는 제국 수도에 있는 의상실을 뒤져봐야겠어. 동기들에게 들었던 유명샵은 없었나?”
“몇 군데 듣긴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나요. 가서 보면 알 수도?”
내 말에 파이가 빠르게, 그러나 구석구석 깨끗이 씻기고 머리도 감겨주었다. 평소보다 더 박박 씻겨주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닌 것 같기도.
…헉! 세상에, 살이 다 붉게 일어나고 있잖아?
“파이, 아파요.”
“아프다고?”
뽀얀 피부가 다홍빛으로 변하는 걸 내려다보자마자 따끔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와 움찔 떨었다. 세게 문지르는 건 아닌데 평소에는 다섯 번 문지르던 것을 오늘은 열다섯 번 정도는 문지르는 것 같다.
아무리 부드러운 타월이라지만 마찰력이라는 게 있고! 내 피부는 섬세하다고!
얼굴은 따뜻한 수증기에 의해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다. 하지만 팔뚝은 파이가 박박 닦이고 있는 타월에 의해서 얼굴색과 같아지고 있었다.
“내 고운 피다 벗겨지네. 이러다가 전신에서 피를 쏟아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