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사실 베숄린을 입고 있으니까 진짜 편하기는 하다. 움직이는데 거슬리는 것도 없고. 너무, 과하게 속이 다 비치는 게 문제지만.
“잘 어울리네. 베숄린은 너를 위해 만든 옷 같아.”
“그, 그래 보여?”
“내가 신목이라서 아쉬울 뿐이야. 나도 평범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고양이주제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겹쳐 얹은 앞다리 위에 턱을 댄다. 그러면서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나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
“쓸데없는 부탁이면 안 들어줄 거야.”
“그 베숄린 입은 모습을 가끔은 보여줬으면 해. 카르디옌은 여기 언제든 출입할 수 있으니까 같이 와줘.”
농담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서 찌릿 노려보다가 눈에 힘을 풀었다. 따지고 보면 저 신목은 사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을 거다. 만약 저렇게 고양이로 변해서 돌아다닌다 해도 문제지. 얼음 덩어리가 돌아다니는 걸 보면 사람들이 기겁을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 꼭 말만 잘하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기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서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운 아이. 어쩐지 세상 모든 것이 전부 행복할 수는 없는 거구나 싶기도 하다.
“알았어. 내가 이 신의 눈물을 먹고 멀쩡해지면 그런 부탁쯤이야 어렵지 않지.”
“먹기로 결정했구나?”
“응.”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다. 너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거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들지만, 지금은 고민할 여유 따위 없다. 부디 이 신의 눈물이 내게 더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신이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게 아니길 간절히 기도해보는 수밖에.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떨리는 손을 들어 엄지손톱만한 작은 물방울을 조심히 잡았다. 그러자 잘 익은 열매처럼 톡, 떨어져서 데굴 굴러 내 손바닥에 안착한다. 혹시라도 진짜 물방울처럼 터질까봐 걱정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물방울이 얇고 투명한 막에 감싸여진 상태다. 게다가 촉감도 말랑했다.
“그냥 한입에 꿀꺽 하면 되는 거야?”
“응. 꿀꺽. 씹어도 되고 그냥 넘기면 알아서 터질걸?”
“…일단 줘서 고마워. 만약 내가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역시 치즈 너는 착하구나. 행운이 있길 빌게.”
부디 행운이 있기를.
그렇게 기도하면서 손바닥의 물방울을 입에 넣고 그대로 목구멍에 꿀꺽 삼켰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으흥, 으으음.”
여기는 익숙한 레어의 내 방이다. 나는 침대위에 엎드려 콧노래를 부르며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쪽에 놓인 원형 테이블의 의자에는 파이가 앉아있다.
나는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파이의 눈치를 슬쩍 봤다.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는 그의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아 보였다.
“파이.”
“…….”
“아직도 삐쳤어요?”
블랑 제국의 얼음나무가 준 신의 눈물을 먹자마자, 다행스럽게도 부작용이 사라졌는지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피 냄새에 미치도록 끌리던 것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생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어서 그게 가장 기뻤다. 그건 뭔가 인간이길 포기한 느낌이었으니까.
인간이 먹는 평범한 음식을 전과 똑같이 맛보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환호를 내지르며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레어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쭉 베숄린을 입고 지냈다.
첫날에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는데 의외로 너무 편했다. 보통 잠옷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촉도 좋아서 에이든에게 몇 벌 더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에이든은 베숄린을 입은 나를 보자마자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베숄린을 입은 그날부터 파이가 침묵시위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내게 있어 굉장히 큰 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낙 과묵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말 한마디 안하는 파이는 처음이었다. 그러더니 나만 빤히 쳐다보는 에이든의 눈을 손가락으로 푹, 찌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맛있는 평범한 음식을 마음껏 먹으면서 정원을 뛰놀고 신나게 놀았다. 내게 변태 황제로 낙인찍힌 에이든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번 혼자 무슨 망상을 하는지 자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했다.
…에이든이 빨리 좋은 반려를 만나야 할 텐데.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은 에이든과 파이를 떼어놓고 혼자 얼음나무를 보러 내려갔다. 문 앞에 나뭇가지로 장벽을 세워두던 것도 사라져서 원래대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갈 때마다 얼음고양이로 변해서 나타나는 그 나무와 함께 놀았다. 대화 상대가 있다 보니까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전쟁을 빠르게 정리한 파이와 함께 레어에 돌아와서도 파이는 침묵 중이었다. 블랑 제국에서도 입만 열지 않을 뿐, 내 옷을 갈아입히거나 목욕을 도와주는 건 여전했지만.
“파이.”
“…….”
“파이? 진짜 말 안할 거예요?”
“…말.”
“어휴, 유치해서 같이 못 놀아주겠네. 나 방금 소름 돋았어요. 보여요?”
내가 팔을 쭉 내밀면서 이리저리 빙글 돌렸는데도 파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내가 베숄린 입고 있어서 화난 거예요?”
“어.”
“파이도 좋아했잖아요. 말은 안했지만 나는 파이의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다고요.”
물론 파이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짜증나거나 다 같은 표정이긴 했다. 진짜 감정기복이 완전히 심해서 아주 기쁘거나 아주 짜증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서 그냥 내가 지례짐작으로 맞추는 거지만.
“그래도 일이 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이제 파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어서 나는 너무 좋아요. 파이는 좋지 않아요?”
나는 일부러 파이를 떠보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하지만 파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정말, 저 고집을 누가 말려.
나는 책을 탁, 덮고 침대를 데굴 굴러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파이의 주위에서 기웃거렸다. 그럼에도 파이는 나를 봐주지도 않고 그저 바닥만 응시한 채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또 뭐가 못마땅한 일이 있었던가?
“왜 그래요, 파이?”
“…네게서 다른 낮선 냄새가 나. 그래서 이 괴리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헉, 낮선 냄새?
나는 다급히 팔뚝을 들어 올려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하지만 내 코에는 익숙한 살내음 밖에 나질 않았다.
“무슨 냄새가 나요?”
“몰라. 내가 알던 치즈의 냄새가 아니어서… 고약해.”
하긴 후각이 예민하신 짐승이니 그런 게 느껴지기도 하겠네. 내가 신의 눈물을 마신 이후부터 파이는 저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자연스레 내 심장에서 새로 생기는 피하고 섞이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 거예요.”
그가 투덜거린 말에 대꾸하면서 은근슬쩍 파이의 등에 달라붙었다. 일부러 더 애교부리 듯 그의 어깨에 뺨을 문지르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파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모습이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그가 몸을 돌려 내 손을 잡고 침대 위에 조심히 눕혀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일단 자. 시차 적응을 해야지. 여기서 푹 쉬어야 돼.”
“레이라도 찾아가야 하는데…….”
“네 건강이 우선이야. 레이라에게는 따로 서찰을 보내도록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쉬어.”
누가 보면 내가 위험한 병에 걸린 줄 알겠다. 어쨌든 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푹 쉬었다.
그래서 레어에 돌아온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 적응이라는 게 파이가 내 새로운 피 냄새에 의해서 바뀐 체취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다. 꼭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해 나비로 변화는 과정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슬프게도 파이가 나를 안아주지 않아서 더 그랬다. 나한테서 낯선 냄새가 나니까 도저히 못 안아주겠다고. 손만 겨우 댈 뿐 그 이상의 접촉이 없어서 꼭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뱀이 된 나를 안는 것보단 지금이 나을 텐데!
“파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설마 평생 이럴 생각은 아니죠?”
잠들 때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침대를 썼다. 대신 파이가 내 몸을 이불로 꽁꽁 감싸 눕히고 옆에 누워 내 배위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재워주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은 이해하고 그냥저냥 넘어갔는데 그게 쌓이고 쌓이다보니 욕구불만이……. 정말 진짜 나답지 않게 혼자 몸이 달아서 허벅지를 모아 비비기를 수십 번은 한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현자타임이 오더라고. 내 옆에 건장하고 절륜해 마지않아 날 몇 번이나 죽일 듯 밀어 붙이던 드래곤님께서 계시건만.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그래서 나름 유혹한답시고 교태를 부려봤다. 그러다가 잠옷을 벗으면서 알몸을 보여줬는데도 파이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바로 나를 침대에 던져놓고 덮쳤을 분위기였는데도 말이다.
진짜 내가 성년식을 치르기 전의 상태로 변한 것 같아서 우울해졌다. 그래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아랫입술을 잔뜩 내민 채로 울상을 지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파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만 보면 아래가 욱신거리다가도 네 체취를 맡으면 그냥 식어버려.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야.”
…그렇게 말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언제쯤 내 체취에 적응을 할 수 있는 걸까?
차마 반박도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파이가 내 옆에 앉아서 내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 이마에 쪽, 입을 맞춰주었다.
“나도 괴로워, 치즈. 나도 힘들고 미쳐버릴 것 같아.”
“…우리 각방 써요. 파이가 옆에 있으니까 더… 못 참겠어요.”
진짜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각방 쓰자는 말이 절로 나왔다. 파이와 몸을 섞은 것이 몇 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내 몸은 그와의 관계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툭하면 속옷이 젖고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라버렸다. 특히 지금처럼 파이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는 이 순간에도.
“그건 내가 사양하겠어. 각방이라니. 나는 너와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그럼 가까이 오지 마요. 내가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그러자 파이가 피식 웃으면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혼자 풀어보라고 자리도 비워줬는데… 해소가 되질 않았던 건가?”
“…뭐, 뭐라고요?”
“나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라. 일부러 네게 시간을 주면서 나도 내 시간을 가졌거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럼 그게… 진짜 일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니라 자리를 피해줬던 거야? 아, 아니 그보다… 파이가 혼자 욕구를 풀었다고? 혼자… 어… 상상이 안 돼. 보, 보고 싶다!
“나도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우리 치즈는 인내가 부족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내가 해주는 애무가 좋았던 건지 모르겠군?”
“응. 나 파이가 해주는 걸 받고 싶어. 그리고 파이가 스스로 욕구 푸는 것도 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