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평범하게 인간처럼 살고 싶으니까 그런 건데. 파이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무작정 안 된다고만 하고. 어쩜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 사람 아니지 참. 그래도 나빠!”
결국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뱉어내며 손톱으로 허벅지를 몇 번이나 꼬집으면서 통증을 이겨내야 했다. 다행히 따끔한 통증에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진다. 그 틈을 노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일부러 더 흐느꼈다.
“이대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거야. 다시 살아난 이유가 없어. 내 꿈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다시 죽…….”
“알았다. 그만해. 알았으니까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다급하게 내 말을 자른 파이가 나를 품에 안아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분명 눈물이 나지 않아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파이의 목소리가 어쩐지 애절하게 들려와서 코끝이 찡해지며 진짜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그러게 진작 허락했으면 좀 좋아? 괜히 눈물 빼게 하고 있어.
“그럼 나 저 베숄린 한 번만 입어도 돼요?”
“…한 번만이야.”
“나도 두 번은 입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 파이의 허락하에 베숄린을 입을 수 있었다. 새로운 베숄린을 들고 온 시녀가 내게 옷을 입혀주었고, 다 입은 뒤에 드레스 룸 거울 앞에 섰다. 물론 서자마자 동공이 파르르 떨려버렸다.
‘야, 야해……. 엄청 야하잖아?’
흐릿하긴 하지만 슬쩍 봐도 몸매가 다 보일 정도로 얇았다. 그만큼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가볍기도 해서 편안한 잠옷 대용으로는 입을 수 있겠다. 이걸 입고 돌아다니는 황궁의 시종시녀들이 대단하다고 생각될 뿐.
“다 입었어요.”
나는 팔과 손을 이용해 최대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리며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 안에 파이뿐만 아니라 에이든까지 들어와 있어서 그대로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 오오… 오, 치즈가 베숄린… 악! 내 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던 에이든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덮으며 비명을 질렀다. 확신하건대 저건 파이가 일부러 저런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에이든을 노려본 파이가 내 망토를 마력으로 꺼내와 재빨리 내 어깨 위에 둘러주었으니까.
“가리고 있어.”
“응.”
“카르디옌 이… 이 못된 드래곤 놈이! 당장 이 마력 떼어놔!”
나는 파이가 시킨 대로 망토를 조금 더 꼼꼼하게 둘러서 얼굴과 다리 이외에 피부가 드러나질 않게끔 했다. 완전히 다 가린 것을 확인한 파이가 에이든의 눈을 가렸던 마력을 풀어냈다. 에이든은 꽁꽁 싸맨 나를 보고는 꽤나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으로 망토 안의 베숄린을 가리키고 물었다.
“그래서 그걸 입고 얼음나무를 보러 가겠다고?”
“네. 뭐라도 해봐야죠. 그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그렇긴 하지. 좋아. 내가 선심 써서 데려다주마. 거기는 황족 이외에 출입 금지라 내가 꼭 가야 하니까.”
뒷말을 강조하는 걸 보면 어떻게든 내가 베숄린을 입은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어떻게 보면 귀엽고, 어떻게 보면 징그럽고, 또 어떻게 보면 얄밉고.
파이도 그 얼음나무가 블랑 제국의 귀한 보물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에이든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았다. 대신 내 어깨를 바짝 쥐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우리를 안내하는 에이든의 뒤를 따를 뿐이다.
곧 황궁 지하로 내려와 얼음나무가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서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들어오지 말라는 뜻인가?”
파이가 내 어깨를 더욱 꽉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눈앞에 드리워진 신기한 얼음 덩굴을 보며 눈꺼풀을 빠르게 파닥거렸다.
지난번에는 문 근처를 제외하고 얼음으로 된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봉쇄하기 위한 것처럼 문 앞에 나뭇가지들이 엉겨있는 상태다. 그것도 뾰족뾰족 얼음 가시가 잔뜩 돋아난 채로. 마치 봉인을 해놓은 것처럼.
진짜 나무가 살아있긴 하구나. 그냥 예쁜 얼음 조각인 줄 알았는데.
나는 파이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파이가 순순히 놓아주긴 했지만 대신 내 한 손을 꼭 잡아 쥐었다. 그래서 나는 반대편 손을 그 얼음 가지에 살포시 얹어 가볍게 쓸어내렸다.
얼음인데도 심하게 차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서늘한 유리를 만지는 느낌.
“거기 누구 없나요? 나 왔어.”
반쯤은 장난삼아서 한 말인데 그 얼음가지가 꿈틀거리면서 움직여 깜짝 놀랐다. 곧 얼기설기 꼬여있던 가지들이 천천히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나는 그 놀라운 장면을 보고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에이든, 이거 무슨 경우예요?”
“그,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에이든도 당황했는지 꽤 심각하게 그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곧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그것도 딱 내가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공간이었다. 저 두 남자는 절대 못 들어갈 것 같다.
이건 분명 나 혼자 들어오라는 뜻이다.
“둘 다 여기에서 기다려요. 다녀올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파이가 걱정스럽게 내 손을 붙잡고 말렸지만 나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파이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생길 거면 진작 생겼어요. 저 열매를 먹은 사람은 다 죽는다고, 나도 죽을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마음을 바꿔서 나를 살린 이유가 바로 파이 때문이라고요.”
“무슨… 뜻이지?”
나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등을 반대 손으로 조심히 감싸 쥐고 방긋 웃어보였다.
“얼음나무는 인간의 그 뜨거운 사랑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궁금하대요. 가장 부럽고 가장 위대한 것이 그 사랑이 아닐까 싶다고요.”
“…….”
“이제 와 날 해칠 이유가 없어요. 나는 이미 그의 시험을 통과했으니까요.”
파이의 행동은 누가 봐도 나를 진짜 연인으로 여기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했다. 파이가 내게 아예 마음이 없었다면 내가 제안했던 하룻밤도 수락하지 않았을 거다. 아직 파이의 진심을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조금씩 이 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사천 년간 멈춰있던 그의 심장을 움직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여기 얌전히 있어요.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길 전부 다 폭파해도 좋아요. 파이가 원하는 대로 해요.”
일부러 저 얼음나무 들으라는 식으로 조금 크게 이야기했다. 저도 아픈 건 싫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으면 날 어쩌지 못할 거다.
나와 얼음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던 파이가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더욱 더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 까치발을 들어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물론 숨을 멈춘 채로.
“무사히 돌아올게요. 걱정 말고 기다려요.”
“알았다. 다녀와.”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이긴 하지만 파이가 나를 믿고 손을 놓아주었다는 것에 조금 감격했다. 뭔가 조금 뿌듯하다고 해야 할까? 비록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표정이긴 하지만.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얼음나무 틈의 좁은 입구를 쳐다보며 비장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 겁은 나지만, 이 또한 내가 헤치고 나가야 할 운명이다. 파충류로 변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참이다. 파이에게는 미안하지만 파충류는 너무 끔찍하다고.
그렇게 심호흡을 고르면서 그 좁은 입구 안으로 다리를 스윽 밀어 넣었다. 그러자 내가 몸을 욱여넣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옆으로 넓어졌다. 덕분에 상체만 살짝 숙여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대로네.”
입구만 봉쇄했지, 나머지는 전과 똑같았다. 혹시 얼음 고양이 나비는 어디 있나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위를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머리 위의 얇은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나비가 이빨을 드러내서 잽싸게 그 자리를 피했다.
“아 왜! 넌 나만 보면 그런다? 누가 보면 내가 뭐 너한테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어!”
“겁이 많은 애라서 그래.”
그랬는데 또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휙 돌렸다. 단단해 보이는 나무 가지 위에 또 다른 얼음 고양이가 꼬리를 가볍게 휘저으며 엎드려있었다.
“어, 고양이. 고양이가 두 마리?”
“네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고, 고양이가… 말을……?”
새로 나타난 고양이가 사람처럼 입을 움직여 저 얼음 목구멍에서 말소리를 냈다.
동물이 사람 말을 하다니! 아무리 얼음이라도… 어라? 저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데?
“서, 설마… 너?”
“네가 찾는 얼음 나무라면 내가 맞아. 인간 모습은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일부러 고양이 모습을 한 건데 놀랐어?”
오, 얼음 나무답게 얼음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구나. 신기하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실제로 들어서 더 놀랐어.”
“나야말로 놀랐어. 드래곤의 피가 사람에게 그런 영향을 미치는 줄 몰랐거든. 너 되게 징그러워.”
지금 누가 누구더러 징그럽다는 거야? 자기는 얼음덩어리인 주제에!
“징그러워져서 미안하네. 흥. 너도 이렇게 될 걸 알고 나한테 파이의 피를 마시게 한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아무리 신목이라 해도 미래를 알 힘은 없어. 그리고 드래곤의 피는 아무나 마실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겠지. 그게 뭐 흔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확실히 너는 신의 은총을 받는 것 같아. 마침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열매 하나가 더 맺어지고 있었거든.”
“새로운 열매?”
열매라고 하니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내가 겁을 다 먹기도 전에 나뭇가지 하나가 내 아래로 쑥 내려와서 더 깜짝 놀랐다.
“신의 눈물이야. 열매와는 다르지. 그거 먹으면 아마 몸속에서 섞이지 못하는 피가 다 골고루 섞이면서 괜찮아질 수도 있어.”
가느다란 나뭇가지 끝에는 물방울 모양의 말랑해 보이는 무언가가 매달려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것이 새벽이슬 같아 보이기도 하고.
“…괜찮아질 수도 있다는 뜻은, 나빠질 수도 있다는 거야?”
“말했듯 미래는 장담 못해. 다만 네가 여기까지 다시 나를 찾아온 이 시점에 그 신의 눈물이 맺혔으니까.”
“이게 나를 위한 거다?”
“확신하진 못해. 그저 운명에 맡기는 거지.”
“실험대상이 따로 없네.”
“그래도 나는 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 눈물을 먹는 건 너의 선택이야. 강요는 하지 않아.”
그렇지. 나의 선택이지. 열매도 내가 먹겠다는 의지를 갖추고 먹었던 것처럼. 하지만 과연 내가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내가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건데.
“그보다 그 망토 거슬리니 벗지 않을래? 베숄린 입은 거 보여주러 온 거잖아.”
…신목이라더니 순 변태 아니야? 그래서 에이든도 그렇게 밝히는 건가? 블랑 제국은 성적인 면에서 그렇게 개방적이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나는 조금 뾰로통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몸에 두른 망토를 풀어내 벗었다. 어깨 위를 스치고 내려가는 망토가 바닥에 풀썩 떨어지자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내려앉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가벼움을 자랑하는 베숄린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