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 붉은 액체는 피라는 것도 잊게 할 만큼 향기가 너무 좋았다. 나는 그 시럽처럼 달콤한 액체를 숨도 쉬지 않고 한 번에 전부 다 마셨다. 그러자 파이가 그 빈 그릇에 다시 피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 사이에 접시에 있던 고기 네 점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서 배가 불룩하다. 그럼에도 아쉬워서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쟁반채로 들어 올려 바닥을 혀로 핥아 먹기까지.
“더 없어요?”
“오늘은 그만 먹어. 네 적정량을 넘어섰어.”
“맛있는데……. 지금까지 먹은 음식들하고 비교도 못할 만큼 너무 맛있어요.”
“내일 또 준비해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먹자. 이거 봐, 배가 볼록 튀어나왔어.”
내 손에서 쟁반을 빼앗은 파이가 젖은 수건으로 붉은 피에 물든 내 손을 깨끗이 닦아준다. 정리된 손바닥으로 배를 어루만지자 진짜 윗배만 뽈록 튀어나와 있었다.
“헉! 정말이네? 꼭 아기 가진 것 같아!”
라고 말했다가 파이한테 꿀밤 한 대를 맞고야 말았다.
“아야! 아파…….”
“일단. 놀라지 말고 내 말 들어, 치즈. 손 줘봐.”
식사정리까지 싹 마치고 나서 파이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턱, 얹어놓고 두 눈을 말똥말똥 떴다.
그러자 나를 일으켜 세워서 마주 안은 파이가 이마에 입을 맞춰준다. 덕분에 또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갑자기 또 왜 이런대?
“놀라지 말고 들어. 네가 변한 모습은 알려줘야 할 것 같으니까 우선 거울을 보여줄게. 보고 너무 놀라지는 말라고.”
“변한 모습? 내가 변했어요? 어디가?”
“…보면 알아.”
대충 얼버무린 파이가 나를 데리고 손님방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멈춰 서서는 깊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다가 내쉰 그가 자못 비장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각오 단단히 해.”
그 말에 나는 잔뜩 겁을 먹고 바짝 긴장했다. 동시에 내 손을 잡은 파이가 자신의 손에 힘을 천천히 빼서 놔주었다. 그러더니 혼자 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인다.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인 거야? 그러니까 더 불안하잖아. 대체 어디가 어떻게 변했기에…….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려 파이를 한번 훔쳐보고는 커다란 전신거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기, 긴장돼. 징그럽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제발. 내 모습 보고 기절하긴 싫단 말이야.
거울 근처에 다다라서 잠시 멈췄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개만 옆으로 기울여 거울 위로 내 눈만 빼꼼 내밀어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오, 눈 예쁘다. 고양이 같아.”
아까 에이든이 내 눈을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랐던 것이 이해가 갔다. 눈동자 가운데에 작고 동그랗던 동공이, 빛에 반사되어 바짝 좁혀진 고양이 눈처럼 세로로 길게 세워진 상태다.
의외로 징그럽진 않은데? 제법 귀여운 것 같기도?
너무 최악의 상황만 생각했나 보다. 눈동자가 변한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생각 외로 평범한 변화라서 안도감이 밀려오더니 기운이 쪽 빠져버렸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면서 눈의 움직임을 살피며 신기해했다. 그랬더니 파이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뒤에서 내 둥근 어깨를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리고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거울속의 나와 눈을 마주보았다.
“놀라지 않았어?”
“놀랄 만큼 이상해요? 난 별로. 괜찮은데?”
“예전에 처음 2차 성징이 나타나서 가슴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도 놀라서 울었었잖아. 이러다가 몸이 터져서 죽는 거 아니냐고 했었던 기억을 벌써 잊었어?”
“…그땐 어리기도 했고, 파이가 인간의 성장에 대해서 한마디도 해준 적 없잖아요. 충분히 놀랄 만도 하지.”
몸의 변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게 된 것도 아카데미 입학해서였다. 파이가 육아는 물론이고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그때 깨달았다. 나중에는 그가 나를 이렇게 살려놓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초경 시작했을 때도 놀랐었거든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 죽는 줄 알았다고요. 지금은 다 컸는데 뭐.”
“표정으로도 다 보였어.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져서는 혼자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울었었지.”
하여간 이 드래곤의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탈이다. 그런 건 좀 잊어버려줬으면.
“그때의 기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죠. 난 또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거나 없어진 줄 알았잖아요.”
“네가 놀라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내 생각에는… 그 금단의 열매나 내 피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뭐라고요?!”
부작용이라는 말에 경악했다. 그 얼음 나무에게서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열매와 내 피가 섞여서 생기는 부작용이길 바랄 뿐이야. 송곳니가 뾰족하게 나온 것도 그렇고 세로동공도 그렇고. 게다가 피와 생고기가 맛있다고 하니까.”
“그, 그럼 나 드래곤으로 변모하는 거예요?”
“그건 아닐 것 같고. 파충류 중 하나겠지?”
내 눈동자가 변한 것보다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파충류라니. 그럼 그때 봤던 그 아나콘다처럼? 배, 뱀으로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싫어요, 파이.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줘요!”
“그래서 생각중이야. 해결 방법이 있을 거다. 조금만 참아, 치즈.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내가 너를 지켜줄 거다. 그러니 겁먹지 마.”
진짜 이대로 뱀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막 온몸에 비늘이 돋아나면 어떡하지? 다리가 뱀의 꼬리로 변하는 걸까? 혹시 뭐 신화에나 나오는 반인반수처럼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뱀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뱀으로 변하는 내 징그러운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입맛조차 뚝 떨어져 버렸다. 온종일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지하를 파고 들어갈 정도로 침울해졌다. 그러다가도 결국 쫄쫄 굶은 배꼽시계는 못 참겠다는 듯 내 감정을 배신하고 우렁차게 울려댔다.
그래서 파이가 새로 가져다준 싱싱한 생고기를 보자마자 또 군침이 흘렀다. 대신 피만큼은 절대 사양하겠다고 입에 대지도 않았다. 지금 내가 본능에 충실해지면 그 부작용에 지는 꼴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꾹 참고 있는 거다.
물론… 그건 아주 대단한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는 거였다. 내가 맛있는 꿀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느낌과 비슷할 정도로.
흑, 너무 슬퍼. 우울해. 파이한테 고백하고 차일 때보다 더 슬픈 것 같아.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밤새 파이의 품에 안겨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되었는지 노크소리와 함께 황궁 시녀가 들어왔다.
“식사?”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라면 파이가 다 챙겨 주는데.
곧 시녀가 손에 커다란 은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와 조용히 내려놓는다. 여전히 익숙하지 못할, 속이 다 비치는 베숄린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은 시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통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여자든 남자든… 그… 아래가 훤히 다 비친다고.
지금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괜히 눈동자를 허공에 돌렸다. 그러다가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행운을 빌어. 살아남게 되면 우리 블랑 제국 전통 의상인 베숄린을 입은 모습을 내게 보여줬으면 좋겠어. 네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얼음나무. 금단의 열매를 만드는 그 나무가 그랬었지. …앗? 혹시 그 나무라면 지금 내 부작용을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파이. 나 가야할 곳이 생겼어요.”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다가 진짜 뱀으로 변하기라도 한다면 영생의 수명을 얻은 걸 원망하게 될 거다. 기왕 살아난 거라면 파이처럼 멀쩡하게 인간의 형태이길 바란다고.
나는 파이의 품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들어와 있던 시녀가 나를 보고 흠칫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저런 반응을 보니까 더 마음이 급하다. 레이라도 만나야 하는데 이 꼴을 하고 만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다. 제발.
“어딜 가려고?”
“얼음 나무. 그리고 나 베숄린도 필요해요.”
나는 시녀가 입고 있는 베숄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파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파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늘게 좁히고는 나를 노려본다.
“네가 왜 저 옷이 필요하지?”
“그럴 일이 있어요. 잔말 말고 어서! 급해요!”
하지만 파이는 움직일 생각도 없다는 듯 침대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을 잔뜩 굳힌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왜 베숄린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라는 듯.
덕분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아서 죄 없는 시녀만 오들오들 떨 뿐이다.
“파이. 나중에 다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내 말에 좀 따라줘요. 내가 저 옷을 입고 싶어서 이러는 거 같아요?”
“지금 설명해봐. 네가 왜 저 옷 같지도 않은 거적때기를 입어야 하는지.”
“거적때기라니. 나름 블랑 제국의 전통 의상이라잖아요. 이 언니 상처받게!”
물론 시녀는 이곳을 당장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듯 초조하게 우리의 눈치만 살폈다.
“알았어요.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내 피가 증발해서 죽는다고 했을 때 꿈을 꿨는데, 그 얼음나무가 나왔거든요?”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면서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파이도 꽤 호기심이 생겼는지 침대머리맡에 대고 있던 등을 떼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꿈에 얼음나무가 나타났었다고?”
“네. 파이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더라고요. 자기는 사천 년을 살아온 나무래요. 내가 파이의 피를 먹으면 살 수 있다고 알려준 이도 그 나무고요.”
어딘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하는 파이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신이 내린 선물이라더니 정말인가 보군. 그래서?”
“내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얼음에 뒤덮이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리고 내가 그 뾰족한 얼음에 손이 찔렸어. 그때 우리 드래곤의 피에 불로장생의 힘이 담겨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맞아요. 그게 바로 그 얼음나무가 도와준 거였어요. 그리고 도와주는 대가로 나한테 저 베숄린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거든요.”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파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그러더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봐서 나는 재빨리 손과 고개를 흔들며 빠르게 해명을 했다.
“오, 오해하지 마요? 나 그 나무랑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겨우 나무 따위와 뭘 하겠어요? 나는 단지 얼음 나무에게 가서 혹시 이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좀 물어보려고…….”
“나무 따위가 그 부작용을 알 리가 없지. 헛수고다.”
“그걸 파이가 어떻게 알아요? 해봤어요?”
“…아무튼, 허락할 수 없어.”
…진짜 이 고집통머리를 어쩌면 좋은지. 역시 방법은 눈물 연기 뿐인가.
“너무해. 그럼 나더러 이러고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라고.”
눈물을 쥐어짜야 되는데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눈물샘은 왜 일을 하지 않는 건지.
부탁이다, 눈물아. 지금 네 힘이 필요할 때야. 어서 나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