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아, 너무 달아서 어지러워. 큰일이야.
“그래서 저기 나무에서 뭘 찾아야 하는데? 설마 나더러 땅을 파라는 건……?”
“딩동댕. 자, 어서 파 봐요.”
“…어딜? 뭐로?”
“뭐든 손이든 발이든. 가라! 에이든몬!”
한때 아카데미에서 유행하는 몬스터잡기 게임이 떠올랐다. 그래서 멋지게 한 바퀴 빙글 돌고 한 손을 야무지게 돌려 손가락으로 고목나무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다가 지금 밤이고 학기 중이라 기숙사에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이런, 너무 마음이 급했나봐. 큰소리를 내면 곤란해.
“어서요. 에이든. 저쪽 나무 아래를 조금만 파면 지도가 나와요.”
“…지도?”
“어… 네. 지도요. 그거 나한테 중요한 거라서 누가 훔쳐가기 전에 파야 한다고요. 어서! 빨리!”
혹시나 사감선생님이 소리를 듣고 확인하러 나올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고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작은 목소리로. 들키면 곤란하니까.
그러자 입맛을 쩝쩝 다시는 에이든이 내가 말한 고목나무 아래로 걸어가 바닥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나는 행여나 누가 올까봐 뒷길로 오는 입구 쪽을 경계하면서 겉옷을 더욱 꽁꽁 싸맸다. 곧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쯤이겠네. 여기 바닥을 엎었던 흔적이 있어.”
“그럼 거기가 맞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파지?”
“당연히 손으로 파야죠!”
“왜 손을 써? 마력으로 하면 되지.”
“어어? 안 돼! 그러다가 지도가 망가지면 책임질 거예요? 원형 그대로를 원해요, 난.”
그러자 굉장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지어보이고는 내게서 고개를 돌린다. 아마도 지은 죄가 있어서 뭐라고 불평도 못 하겠고 저가 왜 이러고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모양이다. 하긴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땅을 파본 적이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어서 해요! 어서!”
내 재촉에 못 이긴다는 듯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살살 긁기 시작했다. 대체 저래가지고 언제 바닥을 다 파내나 싶다. 나는 쪼르르 쫒아가 에이든의 반대편 자리에 마주보며 쪼그려 앉았다.
“열심히 좀 해봐요. 왜 이렇게 굼떠? 일할 때도 이렇게 일해요?”
“그거하고 이거는 달라.”
“뭐가 달라요?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해야지요. 그게 인정받는 길 아니겠어요?”
“몰래 땅 파는 일을 누가 인정해준다고.”
내말에 퉁명스레 대꾸하는 에이든이 내 눈치를 슬쩍 살핀다. 그러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고는 혼난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서 나는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얹어놓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죄를 지었으면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겁니다. 아카데미에서도 벌점이 쌓이면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어요.”
“치즈는 너무 사악해.”
손가락으로 바닥을 죽죽 긁어내리는 에이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불평을 늘어놓는다.
“감히 황제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치즈 너 뿐일 거다. 아, 카르디옌도. …이 부부사기단 같으니.”
“부, 부부요?”
나는 쪼그려 앉은 그 자리에서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부부라니. 어쩐지 듣기 민망해지는 단어였다.
하긴 결론만 봐서는 내가 수명이 늘어난 게 나한테는 이득일 수도 있어. 열매를 먹은 뒤에 막 죽도록 아픈 걸 느끼진 못한 상태라 내가 아프긴 했었나 싶을 정도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파이와의 관계를 조금 더 긴밀하게 붙들어 매서 더 단단하게 굳힐 수 있을 거다. 잘만 설득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노를 저어 항해가 가능할지도. 그러니까 내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좋아?”
“뭐, 싫을 것도 없죠.”
“…카르디옌이 사람 목숨 하나에 그렇게까지 전전긍긍하는 건 또 처음 보긴 했지. 외출한 주인 기다리는 개처럼 똥줄 탄다는 듯 안절부절. 그건 좀 흥미진진했거든.”
그가 콧방귀를 뀌면서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가만히 보면 에이든은 마조히스트인 것 같아요. 맞는 거 좋아할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봐요. 파이한테 맞을 때 기분 좋았죠?”
“왜 그런 말을 해?”
“파이가 나한테 도청장치 부착해놓은 거 기억 안 나요?”
에이든이 다시 입을 다물더니 마른 침을 꼴깍 삼킨다. 아무래도 잊고 있던 모양이다. 또 잔뜩 풀이 죽은 에이든은 손가락으로 손톱높이만큼 판 곳을 깔짝깔짝 긁으며 중얼거렸다.
“카르디옌의 마력은 아파. 그놈은 자비라는 게 없어서 상대방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거침이 없거든. 알아서 살아남아라, 이런 느낌이라.”
음, 파이의 성향을 보자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겪어본 적은 없지만… 파이가 화날 때의 눈빛은 살벌하지. 블랙 드래곤이 파괴의 대명사라는데 오죽하겠냐마는.
“아무튼 그렇게 파다가 해 뜨겠어요. 작은 삽 같은 거 만들 수 없어요?”
“어마마마께서 아무 데서나 마력 쓰는 거 아니랬어.”
“아까는 뭐 마력을 쓰겠다더니?”
내가 핀잔을 주자 에이든이 눈동자를 굴린다. 그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깜박했다.”
하여간, 저 변덕쟁이 같으니라고. 황제라면서 그릇이 저렇게 작아서 어디에 쓴담?
“레어 공격할 때는 마력 썼잖아요.”
“거긴 예외구역.”
“…무슨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네.”
기가 차서 콧방귀를 뀌다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근처에 조금 굵은 나뭇가지가 있어서 그걸 주워 다가 에이든을 도와 열심히 바닥을 파냈다. 전에도 레이라와 이렇게 나뭇가지로 바닥을 팠던 기억이 있어서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 지도 숨겼을 때는 막 비가 온 뒤라서 땅이 조금 질척했었거든요? 파는데 막 지렁이가… 으으, 다 집어던지고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다가 넘어지고…….”
“무슨 지도인데 여기에 숨겨놓은 거야?”
…말해도 되나? 파이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비밀이에요. 어서 좀 열심히 파기나 해요.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다 파서 꺼내려고!”
일단 지도를 파내서 내 수중에 넣어놓는 게 먼저다. 그래서 다른 나뭇가지 하나를 더 찾아 에이든에게 넘겨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파라고 알려주었다. 앉아서 공부만 한 황제 폐하라서 땅 파는 일을 하나도 모르나보다.
그렇게 한참 열심히 땅을 쑤셔대고 파내다가 나뭇가지 끝에 뭐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 이건가보다.”
나뭇가지로 콕콕 두드리자 딱딱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곳을 집중적으로 살살 긁어보니 나무판으로 보이는 익숙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걸 묻어놓은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원형 그대로 남아있긴 했다.
“자 조금만 더 힘내요.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요 주위로 파면 될 거예요.”
“뽀뽀 한번 해준다고 하면 열심히 할게.”
“…뽀뽀 못해서 죽은 유령이 들러붙었나. 뽀뽀 참 좋아하시네. 알았으니까 어서 파기나 해요.”
그러자 두 눈을 반짝 빛내는 에이든이 내 손에 든 나뭇가지까지 뺏어 양손에 쥔다. 그러더니 굉장히 저돌적으로 저 혼자 열심히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심드렁하던 아까와 다르게 넘쳐흐를 정도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음, 진작 해준다고 할 걸. 볼 뽀뽀야 뭐 닳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쯤이야 파이도 이해해줄 거야. …못해주면 어쩔 수 없고. 이미 해버렸는데 뭐 어쩌겠어?
“자, 여기 있어.”
순식간에 땅을 파낸 에이든이 작은 황토색의 상자를 꺼내 흙먼지를 탈탈 털어 내게 건네준다. 그러고는 잔뜩 기대를 머금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상자를 받아들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망설임 없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입술을 쭉 내민다.
“거기 말고 뺨이요.”
“왜? 여기도 뺨하고 똑같아. 자. 어서.”
“…파이한테 이를 겁니다.”
파이 얘기에 바로 고개를 휙 돌려 뺨을 내보인다. 저 앙큼한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제 뺨 위를 톡톡 건드리면서 재촉했다.
“그럼 두 번 해줘. 두 번. 길게.”
“애기도 아니고. 길게는 뭐예요?”
“아무튼. 자, 어서.”
기왕 해주는 거 불쌍하니까 소원대로.
나는 목을 조금 가다듬고 상자를 옆에 내려놓은 뒤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숨을 꾹 참은 뒤에 에이든의 매끄러운 뺨 위로 입술을 가볍게 얹었다. 내 코가 그의 뺨에 파묻힐 만큼 꾸우욱 길게 눌러 입을 맞춰주었다. 이어서 한 번 더 쪽, 짧은 뽀뽀로 마무리를 지었다.
“됐죠? 땅 파느라 고생했어요.”
그러자 뺨이 발그레해진 에이든이 괜히 딴청을 피우며 손으로 목 뒤를 긁적거렸다. 저렇게 좋을까? 에이든에게도 빨리 다른 좋은 여자가 생겨야 할 텐데.
나는 상자를 더 털어내서 상자 끝에 새겨진 나와 레이라의 이름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일단 한 건 해결했고. 이제 돌아가요.”
“응.”
다시 에이든의 손을 잡고 이동 마법으로 블랑 제국의 정원에 도착했다.
“치즈!”
곧 정원으로 들어서는 파이가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나와 에이든이 손을 잡고 같이 서 있는 걸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에이든의 손을 놓고 파이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왔어요? 일찍 왔네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괜찮지?”
내가 파이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거리면서 훑어보자 파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도청도 위치도 전부 잡히지 않아서 걱정했다.”
“아카데미에 잠깐 다녀왔어요. 에이든이 데려다줬고요. 방금 갔다가 방금 왔는데?”
“…적정 거리를 넘어가면 위치가 잡히지 않나보군. 조금 더 보완할 필요가 있겠어.”
두 팔로 나를 품에 꼭 안아서 정수리에 입을 맞춰오는 파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두피에 내려앉아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으, 간지러워.
“그 상자는 뭐지?”
“아… 이거요? 이거… 어…….”
마, 망했다. 아니 뭐 어차피 내 가출에 관한 이야기를 어렴풋 알고는 있으니까 얘기해도 상관없나 싶고. 하지만 이 이상 파이의 신경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지.
“아카데미에 숨겨놨던 제 보물이에요. 비밀이니까 궁금해 하지 마요. 말 안 해줄 거니까.”
그러자 파이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은 듯.
“저녁식사를 챙겨왔어. 우선 식사부터 하자.”
“응!”
“에이든. 전쟁이 곧 끝날 것 같다. 너는 가서 나머지 지휘를 하도록 해.”
“뭐? 벌써?”
나야말로 벌써?
나는 에이든과 똑같은 표정으로 파이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데리고 정원을 나서서 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테이블 의자로 안내해서 나를 앉혀둔 파이가 아까 낮에 봤던 익숙한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는다. 그 접시에는 잠들기 전에 먹었던 남은 생고기와 붉은 피가 담긴 새 그릇도 함께 있었다.
미리 준비해놓았나 보다. 당연히 내가 그 피를 찾을 거라고 예상한 거겠지. 파이니까.
“진정하고 천천히 먹도록 해.”
“…응.”
새빨간 속살을 간직한 생고기를 보자마자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는 파이의 당부도 잊은 채 손으로 답삭 잡아 정신없이 물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