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지금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용서해줄게요.”
“응. 맞아. 알고 먹였어.”
순순히 털어놓는 에이든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쉬며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까 에이든이 파이한테 그랬지. 결과적으로 잘된 거 아니냐고.
“에이든은 알고 있었어요? 내가 파이의 피를 마시게 되어 살아날 거라는 거?”
“그건 몰랐어. 드래곤의 피에 그런 힘이 있을 줄은… 나도 이번에 알아서…….”
“…그럼 진짜, 나를 죽일 셈이었다는 뜻……?”
너무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황제 놈이 지금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얘기니까.
에이든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인 줄 몰랐어! 블랑 제국의 황제가 미치광이라더니 사실이었잖아?
“다 널 위해서였어. 네가 카르디옌 때문에 힘들어하니까. 그렇게 괴로워할 거라면 차라리 죽는 게, 네가 카르디옌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고 생각했어.”
“…뭐, 뭐라고요?”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할 거라면… 카르디옌 그놈에게도 주기 싫었거든.”
블랑 제국의 황제가 미쳤다는 이야기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뜬구름 같은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이런 남자가 어떻게 제국의 황제를 하고 있담? 블랑 제국은 망했군. 망했어!
“내가 살아서 미안하네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죽일 거예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데!”
“…나도 반성 많이 했어.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내가 날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훌쩍거리는 에이든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어린다. 완전히 그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공감이 가는 건 있었다. 나 역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로 괴롭기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에이든처럼 그걸 실행에 옮길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파이가 에이든 더러 왜 쓰레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그거랑 이거는 별개라고요. 지금 나한테 독을 먹인 사람과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미안해, 치즈.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백 번 사죄해도 내가 죽일 놈이야.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용서해줘, 응?”
내가 진짜 상대가 황제니까 참는다. 나 대신 파이가 알아서 혼꾸멍을 있는 대로 내줄 거라 믿고.
…그래도 완전히 용서하진 않겠어.
“아, 어깨 아파. 너무 화를 냈더니 어깨가 욱신욱신하네요.”
나는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어깨와 목 사이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그러자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난 에이든이 내게 다가와 내 등 뒤에서 열심히 안마해준다. 조금 더 편하게 받아볼까 싶어 의자에 앉아 온몸에 힘을 쭉 빼고 나른한 상태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거기 말고 오른쪽, 좀 더… 응, 거기요. 목도 해줘요. 뒷골이 당겨서 골이 다 울려요.”
“여기?”
“아파요! 살살해. 내 목 따버리려고 작정했어요?”
“아, 알았어…….”
“뭐 죽일 셈이면 죽이든가. 뒷일은 책임 못 져요.”
“아니라니까 그런다.”
내가 까칠하게 대할 때마다 에이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적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래도 손아귀의 힘은 부드럽기만 하다.
“전쟁 상황은 어때요?”
“드래곤이 합류하니까 뭐, 이미 승패는 결정 난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 잡아들였다던 루즈 제국의 황족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고민 중이야. 그래도 적국의 황족이라 쉽게 죽일 수는 없지만, 그 작자가 자기는 더 이상 황족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일한 사람이라면서요?”
“응. 이미 루즈 제국을 떠나 마세티앙 제국에서 머물고 있으니 자신은 루즈 제국과는 무관하다 이거지.”
“난해하네요.”
워낙 서로 적대시하는 제국이다 보니 일이 제법 까다로워진 것 같다. 이건 전쟁의 승패를 떠나 나중에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복잡해질 테니까.
“그럼 정말 에이든의 여동생하고 둘이 좋아하는 사이?”
“그것도 애매해. 내 동생은 맞다고 하는데 그놈은 아니라고 하니까.”
“어머, 그 남자 매력 있네.”
“…대체 어디가?”
“여동생 데리고 도망가려다 잡힌 거면 분명 둘이 사랑하는 사이일 거예요. 그런데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다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요! 아휴, 세기의 로맨스다, 정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것이야말로 소설 속의 근사한 사랑이야기가 떠오를 만큼 로맨틱한 상황이지 않은가!
아카데미에서 만난 두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서로 적국의 황족!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려고 했으나 사람 마음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결국 남자가 잊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서 함께 사랑의 도피를 꾸민다! 하지만 결국 붙잡히게 되어 그 운명은 또 헤어질 위기에 처했으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내용인 것 같다. 아, 나를 닮았다던 프리센 왕국의 공주가 왕국 기사와 그렇게 사랑의 도피에 성공했다고 했던가? 그 두 사람은 도피에 성공해서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네.
아무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 비화들을 나만 듣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럴 때 레이라가 있었어야 하는데. 레이라와 함께 기숙사에 머물 때에는 이런 소설을 서로 같이 보면서 같이 울고 웃었다. 그나저나 레이라는 언제 만나지… 어라?
“앗! 나 아카데미에 갈 일이 생겼어!”
“아카데미에? 거긴 왜?”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요.”
잊고 있었다. 파이랑 하룻밤 보내고 나서 가출하면 가장 먼저 아카데미에 가려고 했었다. 거기 나무 아래 숨겨놓은 지도를 찾아서 레이라를 찾아가야 했으니까. 그런데 제국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바로 붙잡혀서 그대로 레어에 오는 바람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매, 매일 야한 짓만 하느라 정신을 쏙 빼놓고 있어서. 흠흠.
아무튼 레이라와의 추억이 담긴 그것을 땅에 묻어놓은 채 방치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레이라와의 만남이 이대로 계속 늦춰지면 나 혼자라도 찾아가야 하니까. 그 지도가 꼭 필요하다.
“어떡하지? 파이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어떻게 간담?”
“내가 데려다줄게.”
“어떻게?”
반문하다가 에이든이 마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든 역시 파이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대단한 마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도.
이건 절호의 기회잖아? 파이에게 들키지 않고 지도를 꺼내올 수 있는!
“그래줄래요?”
“얼마든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나를 보는 에이든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눈을 치뜨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나한테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요.”
“…안 그런다니까. 나도 내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고.”
“그건 변명할 거리가 되지 못해요.”
또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에이든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한다?”
그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머리카락이 한번 허공에 붕 떴다가 가라앉는 기분을 느낀 뒤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다행히 밤이라 사람은 없네. 다 왔어, 치즈. 아카데미 어디로 갈까?”
“벌써 밤이에요?”
“시차가 있어서 우리 제국은 늦은 오후쯤이야. 여긴 이른 새벽인 것 같아.”
레어와 블랑 제국이 멀리 떨어진 곳이라더니 정말인가보다. 그래도 레어에서 여기 마세티앙 제국의 아카데미의 시간은 얼마 차이나지 않았었는데.
나는 익숙한 아카데미의 건물을 빙 둘러봤다. 졸업하고 보니까 또 느낌이 색다르다. 여기 다닐 때만 해도 파이와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사람 일은 앞날을 예상할 수 없다더니.
“그 루즈 제국의 그 남자분은 어느 소속이었대요?”
“몰라. 너희가 다니던 고등부는 아니랬어.”
“…그런데 에이든, 왜 그렇게 나만 보면 놀라요? 내 송곳니 때문에 그래요?”
나하고 눈만 마주치면 움찔, 떠는 에이든이 내 시선을 피하니까 이상하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얼굴까지 창백해져서.
“그, 그런 건 아니야. 흠, 아무튼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아가씨?”
그건 그렇고 에이든에게서 느껴지는 체취가 전과 사뭇 다르다. 옅은 밤바람에 실려 오는 그의 체취가 너무 향긋하다. 딸기를 꿀에 퐁당 담가서 절여놓은 것처럼 달콤한 향이라 군침이 흘렀다.
되게 맛있는 냄새. 빨간색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인데도 향기가… 예술이다. 이렇게 목덜미를 한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는 체취는 아니었단 말이지. 뭔가… 여기 뽀얀 피부를 이렇게 물면 맛있고 상큼한 과즙이 주륵주륵 흐를 것 같았다. 이 안에 가득 들어있는 붉은 피가 지난번에 먹었던 금단의 열매처럼 붉은 과즙 맛일 것 같은 느낌.
꿀꺽.
“…뭐하는 거야, 치즈?”
바로 귓가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흠칫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그의 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까치발을 들고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게다가 입을 쩍 벌려 송곳니로 그의 목을 콱 깨물 뻔.
‘위, 위험했어. 방금.’
나는 그냥 입맛만 다시고 아무것도 아닌 척 헤벌쭉 웃으면서 에이든과 떨어졌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어서 가요. 기숙사 건물 뒤편으로 가야 해요. 되게 오래된 고목나무가 있는 곳.”
내가 배시시 웃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이든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방향을 틀어 아카데미의 커다란 건물을 빙 둘러서 뒤쪽으로 향했다.
높은 건물을 지나 아카데미의 가장 안쪽에 있는 기숙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 뒤편에 가장 키가 높고 오래된 고목이 한눈에 보이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에요. 저기. …그런데 밤에 보니까 좀 으스스하다.”
“치즈 겁쟁이네.”
“…흥! 그래 나 겁쟁이다.”
놀리는 에이든의 말에 콧방귀로 대응하며 팔짱을 꼈다. 그러다가 알았다. 내가 지금 맨발에 잠옷차림이라는 것을.
너, 너무 자연스럽게 잠옷만 입고 생활하다 보니 이게 옷인지 잠옷인지 구분이 안 가는 느낌이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두 팔로 몸을 살짝 가리고 울상을 지어보였다.
“뭐 가릴 거 없어요?”
“왜? 누가 본다고.”
“그래도. 나 추워요. 감기 걸린다고.”
사실 별로 춥진 않았지만 아직 초봄이라 바람이 쌀쌀하긴 했다. 파이라면 진작 덮을 담요를 준비해서 말하기도 전에 어깨에다가 둘러줬을 텐데.
에이든과 함께 있다 보니 파이가 얼마나 섬세한 드래곤인지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떨어져 있으면 소중함을 안다더니 정말인가보네.
“빨리 담요나 겉옷 좀 내놔 봐요.”
“아, 겉옷? 그럼 내걸 줄게.”
말하면서 주섬주섬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위에 둘러준다. 그래도 체온이 남아있어서 따뜻한데… 하아, 냄새가 너무 좋아서 큰일이다. 에이든의 달콤한 체취가 한가득 배어있는 겉옷을 덮으니까 꼭 꿀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