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그러나, 떨리는 입술이 도무지 벌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까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물어서 그에게 상처를 준 이가 나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치즈. 당장은 네 몸 안에 있는 피가 부족할 수도 있어. 어차피 보충해야 하는 거다.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파이가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얼굴을 보니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허기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파이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니까 그게 괴로운 거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어깨를 축 늘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치즈.”
“이러니까… 내가 너무 한심하잖아.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나아요.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어. 네가 한심한 게 아니고 그저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을 맞이한 것뿐이다.”
“이러다가 나 진짜 짐승으로 변해버리면 어떡해요?”
걱정을 한가득 담아 파이를 올려다봤다. 파르르 떨리는 내 시선을 바라보는 그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내 뺨을 엄지로 가볍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냥 짐승이 되면 상관없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으니 더 걱정인 거지.”
매우, 아주 많이 울적해진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진다. 아까 잠시 방심하던 찰나에 머릿속이 뿌연 안개에 뒤덮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던 것처럼. 그리고 그 정신없는 틈에 또 파이의 목덜미를 짐승처럼 물어뜯게 될까 봐.
“얼음꽃 보고 싶어요, 파이.”
당장 해결이 날 상황도 아닌 것 같다. 우선은 예쁜 꽃이라도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겠다.
기죽은 강아지처럼 잔뜩 풀이 죽어서 늘어져있는 나를 파이가 품에 안아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난번 에이든과 함께 점심을 먹던 정원으로 향했다.
그때 봤을 때 하고 변한 것이 없는 근사한 정원을 마주하니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간절하던 파이의 피 생각도 별로 안 나는 것 같고.
“예뻐. 예쁘다.”
콧노래를 흥얼흥얼. 얼굴은 배시시.
나는 정원에 깔린 예쁜 색색별의 앙증맞은 꽃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자태에 미소가 절로 그려진다. 살랑살랑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여유로운 꽃구경을 한참 이어갔다.
지난번에는 그 예쁜 얼음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붉은 장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양분이 많아서 그런지 아주 꽃잎 색도 예쁘고 빨간 것이 과즙 줄줄… 꿀꺽, 머… 먹고 싶…….
“치즈. 그건 먹는 게 아니야.”
어느새 다가온 파이가 나를 일으켜 세워서는 다정하게 제지를 하는 바람에 또 정신이 번쩍 든다. 몰랐는데 그 붉은 장미의 꽃잎을 쳐다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동시에 빨간 과즙이 줄줄 흐르던 금단의 열매의 모양과 맛이 눈과 혀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리고 입에 침이 흥건하게 고인다.
내가 장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파이가 내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잡아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하지만 파이의 눈동자가 또 꽃잎처럼 예쁜 선홍색이라 군침이 절로 돈다.
그러자 파이가 땅이 꺼질 듯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 나를 조심히 품에 안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먹고 싶어? 먹고 싶으면 다른 걸 먹어야지. 네가 내걸 먹으려면 우선 그 송곳니부터 없애야 할 텐데. 정말 큰일이군…….”
그가 말하는 다른 것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려서 아주 잠깐 갈증 대신 하체가 움찔거렸다. 순간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러자 파이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 번쩍 안아들고 정원의 테이블 의자에 조심히 앉혀두었다.
“아무래도 내 피가 입맛을 변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어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직은 완전히 너와 섞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어.”
“…파이의 피를 먹으면 나도 파이랑 같아지는 거예요?”
“글쎄. 드래곤의 피를 마신 인간은 네가 처음이라. 너를 실험대상으로 사용한 것 같아서 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내 앞에 파이가 무릎을 세워 앉아 내 손을 꼭 잡아 쥔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또 한 번 군침이 돌아서 입맛을 다셨다. 딱히 몸에 이상이 있거나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빨간 것만 보면 이성을 잃을 것 같다는 거다.
“혹시 모르니 네가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해올게.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인간이었을 때 먹었던 음식은 소용없을 것 같아.”
“그럼 뭘 먹어요?”
그리고 파이가 내게 가져온 것은 갓 도축한 소의 생고기였다. 그의 손에 짠, 하고 나타난 커다란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쟁반의 하얀 접시에는 짙은 분홍빛 속살을 간직한 생고기가 요염하게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그릇에 붉은색의 액체가 가득 담긴 채다.
“이 액체는, 뭐예요?”
“소 피인데 가공한 거라 그냥 마셔도 돼.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따로 챙겨달라고 했다.”
피라는 말에 얼굴이 확 구겨졌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붉은 냄새가 어서 자기를 마셔달라는 듯 달콤한 향을 뿜어내면서 유혹한다.
머, 먹어도 되겠지? 저건 음료야, 음료. 피가 아니고 주스 같은 거라고. 딸기주스? 아니, 석류주스?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아니 그래도 그냥 맛있을 것 같아.
나는 일단 두 손으로 붉은 액체가 담긴 그릇을 조심히 잡아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꿀꺽. 마, 맛있겠다!
순간 정신이 확 날아가면서 달콤한 과즙처럼 좋은 향을 흘리는 액체를 전부 마셨다. 숨도 쉬지 않고 목구멍 너머로 털어 넣었다. 다 마셔버려 비어버린 그릇을 쳐다보고도 아쉬워서 혀로 그릇 여기저기를 핥아먹었다.
“더 갖다 줄까?”
파이가 묻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파이의 피보다는 덜 맛있지만 그래도 입맛에 맞아서 혀로 입술을 핥아대며 맛을 음미했다. 그러다가 눈앞에 있는 생고기를 손으로 덥석 잡아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파이.”
“응?”
“혹시 여기 꿀을 발라놓은 건 아니죠?”
조금 놀랐다. 누가 봐도 생고기인데 구웠을 때 먹었던 그 맛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고 맛있었다. 이렇게 생으로 아무 양념도 없이 먹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내 상태가 조금 이상해지긴 했나 보다. 평소라면 비리다고 절대 안 먹을 음식을 잘도 먹고 있으니 말이다.
꼭 야생의 짐승에 빙의된 것 같지만 별수 없지. 그보다 육질이 살살 녹을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커다란 한 덩어리를 입에 다 쑤셔 넣고 두 번째 덩어리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안에 있는 고기를 오물오물 빠르게 씹어 넘겼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파이가 방금과 똑같이 붉은 액체가 담긴 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두 눈을 번뜩거리고 그릇을 들어 음료를 마시듯 절반이나 한 번에 후루룩 마셔버렸다. 암만 봐도 딸기주스에 시럽을 왕창 들이부은 것처럼 너무 달고 맛있다.
“그렇게 맛있어?”
“엄청! 완전! 진짜! 너무 맛있어요, 파이!”
“다행히 입맛이 맛나보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안심이고. 적당히 먹어. 나머지는 놔뒀다가 배가 고파질 때 먹었으면 한다.”
큰 고깃덩어리 두 점을 전부 다 해치우는 사이에 파이가 나머지 고기에 보존마법을 걸어둔다. 접시를 옆으로 밀어놓은 파이가 내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젖은 손수건으로 닦아내주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남은 고기들을 아쉬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전부 다 위장에 넣을 수 있는데. 일단 내가 과식을 하면 파이가 걱정을 하니까 그건 관두기로 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곤란하니까… 데려갈 수도 없고……. 큰일이군, 망할 놈의 새끼.”
또 잇새로 나직하게 에이든을 욕하는 파이를 향해 나는 두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방긋 웃어주었다.
“나 지금 괜찮은 것 같아요. 아까는 진짜 배고파서 뭐든 먹어버리고 싶었는데. 배를 채웠더니 나른해서 좀 자두려고요.”
“그럼 재워주고 가야겠군. 들어가자.”
“괜찮은데. 나 혼자 잘 수 있어요.”
“내가 안심이 안 돼.”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아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귀한 도자기를 공손하게 모시듯 나를 침대 위에 눕혀놓았다. 그러더니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아기를 재우듯 손바닥으로 내 배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가 갑자기 배가 차서 그런지는 몰라도 잠이 솔솔 와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파이.”
“응?”
“나 너무… 웃기죠. 짐승 같아. 배부르다고 잠이 오고 막 그래.”
“조금도 웃기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고.”
“이러고 있으니까 아기가 된 기분이에요. 아기는 모유를 먹다가도 배가 부르면 잔다면서요? 나도 그랬어요?”
“…염소젖을 챙겨다가 먹였지. 내 손가락에 꿀을 묻혀서 주기만 해도 쪽쪽 빨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신기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꿀을 좋아했구나.”
“생각은 그만하고 어서 자. 곧 괜찮아질 거다.”
말하면서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눈두덩을 덮어주었다. 마력인지, 아니면 그의 뜨거운 온기에 취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 * *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파이는 없었고 에이든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나는 눈뜨자마자 흠칫 놀랐지만.
“에이든?”
“아, 나 무슨 짓 안 했어. 오해하지 말고. 카르디옌이 다녀오는 사이에 네 상태를 봐달라고 해서, 흠흠.”
침대 가장자리, 그것도 아래쪽에 걸터앉아있던 그가 정말 결백하다며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인다. 나와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걸 보니 그가 나한테 허튼수작을 부리지는 않았음을 짐작만 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보네.
처음 나한테 당당하게 들이대던 에이든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주눅이 든 채로 내 눈치만 슬쩍 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의 행동이 영 수상쩍다.
“에이든. 나한테 죄지은 거 있어서 그래요?”
“…조, 조금?”
조금이라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딱히.”
…이 황제가 정말. 사람을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해?
“실망이네요, 에이든. 나는 죽을 뻔했다고요. 에이든이 준 그 열매, 에이든 나한테 알고 먹였잖아요.”
“아니야! 아닌데? 난 몰랐어!”
“거짓말. 그럼 나한테 열매 먹이고 나서 미안하다고 한 건 뭐라고 설명할 건데요?”
열매를 내게 들이밀고 파이가 나타나기 전. 그는 내 손에 가득 묻은 열매의 즙을 핥다가 나를 품에 안고 그랬었다.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안해, 치즈.]
분명 그건 죄책감을 담은 사과였다. 내가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먹인 죄의식에서 비롯된 본심. 그 사과의 말이 아니었으면 나도 에이든의 저 변명에 속았을 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이든을 노려봤다. 그러자 식은땀까지 흘리는 그가 마치 두려운 맹수를 마주한 사람처럼 달달 떨었다.
“아, 아니… 그, 그,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