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54화 (54/132)

♬  #54

“…파이?”

눈꺼풀을 달싹거리면서 살짝 떴다가 꾹 감자, 물기가 고인 눈가에서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려서 겨우 파이의 이름을 불렀다. 꽤 오래 잠들어있었나 보다. 잔뜩 잠겨있던 목을 갑자기 사용하려니 따끔하다. 목소리도 엉망이고.

그러자 갑자기 우당탕! 큰 소리가 울려와 깜짝 놀랐다.

“치즈? 치즈, 정신이 드나?”

주변이 급격하게 산만해져서 당황했다. 그러다가 돌덩이처럼 무겁던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서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 파이다.’

내가 아는 그 파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것처럼 근사한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흐트러진 채지만. 그랬는데 나를 내려다보는 파이가 얼굴을 확 굳히면서 미세하게 경련을 했다.

왜 저러나 싶어서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거릴 때에 그가 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레 감싸면서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잘 잤어? 이틀 꼬박 잠들어있었는데 어디 아픈 곳은? 배고프지 않아?”

이상하다. 표정은 분명 웃고 있는데 굳어버린 선홍색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겁을 먹었다고 해야 하나?

파이의 이런 표정은 처음이라서 굉장히 어색하면서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이게 현실이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오, 오오… 음, 이건 또 신기하네.”

그러다가 침대 아래쪽에서 에이든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와 아래를 내려다봤다. 침대를 빙 둘러서 내게 다가오던 에이든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에이든이 흠칫 놀라더니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에이든?”

“치즈가… 변했어. 이, 이게 대체…….”

나를 쳐다보는 에이든이 경악하며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막고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변했다고?

“파이. 나 이상해요? 변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 괜찮으니까.”

“치즈 뱀 같, 으악!”

콰당!

마치 이단옆차기를 당한 사람처럼 무언가에 옆구리를 가격당한 에이든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큰 소리가 났음에도 파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깨어났으니 뭐라도 먹어야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물부터 좀…….”

목이 말라붙어서 말하는 것도 힘들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파이가 바로 물을 잔에 담아 나를 일으켜 앉혀놓고 물을 먹여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뜨겁게 달궈지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하아, 시원하다.”

“으으으, 카르디옌 이 자식이! 이러다가 내 허리에 문제 생기면 책임질 거냐! 척추가 부러질 뻔했잖아!”

바닥에 엎어져있던 에이든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곧 사라졌던 그가 침대 위로 팔을 얹고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앙칼지게 외치는 에이든을 향해 파이는 콧방귀를 뀌며 혀를 차더니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한심한 놈. 가서 전쟁 물자 점검이나 해. 나도 치즈 상태 확인하고 합류할 테니까.”

“…쩝. 알았다. 허튼짓 하지 말고 빠르게 복귀해!”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섬주섬 일어난 에이든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또 흠칫거린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지은 죄가 있어서 저러는 걸까? 전과 다르게 거리감이 느껴져서 조금 의아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나 분명히 피를 토했던 것 같은데.”

“네가 먹은 열매의 부작용이래. 그래도 괜찮다. 이제 완전히 다 나았으니 걱정할 것 없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이가 평온하게 대꾸한다.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팔로 어깨를 두르고 밀착해온다. 커다란 손가락을 내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감싸서는 제 어깨에 기대게 당겼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이끄는 대로 얌전히 있자 그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온다. 그게 꽤 부드러운 입맞춤이라 달콤한 사탕을 입안에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꿈에서… 누가 그랬어요. 죽을 거라고.”

“아니야.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 열매가 욕심 부리는 이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 어떻게 살아난 거예요?”

“우선 안정을 되찾는 게 먼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쉬어.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으니까.”

아까 에이든이 나를 쳐다보면서 경악하던 그 눈빛이 자꾸 아른거렸다. 또 파이 역시 뭔가 잔뜩 긴장을 머금은 채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나는 손과 다리를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봤는데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얼굴에 뭐가 있나 싶어서 손으로 여기저기 만져봤는데 평소랑 다름이 없다. 분명 두 사람 다 내 얼굴을 보고 놀랐으니까 뭐가 변하긴 한 것 같은데.

“혹시 나 어디 변했어요?”

“언제나 그랬듯 예뻐.”

고개를 돌려서 파이의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목울대가 크게 넘실거리더니 애써 웃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나와 첫날밤을 치르던 그 날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수상해. 아주 많이.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아주 큰 일이 생겨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나한테.

“피곤하긴 하지만… 거울 좀 보면 안 될까요?”

“피곤하면 자.”

“배가 살짝 고파지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간단하게 수프라도 먼저 먹어볼래?”

수프. 옥수수수프는 고소하지.

“그럴까요? 그럼 옥수수수프 먹을래요.”

수프는 수프고. 아직도 이 현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내가 정말 살아난 건지 의문이다. 혹시 이것도 꿈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 전에 나 좀 안아줄래요? 파이 품이 그리웠어.”

내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파이가 망설임 없이 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번쩍 들어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혀 마주 안는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달다.”

그의 체취가 원래 이렇게 달았던가? 그의 피부에 배어있는 냄새를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행복하기만 했지.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 달콤하다. 마치 그의 단단한 피부 아래 벌꿀이 한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맛있겠어. 엄청.’

목구멍이 바짝 마르기 시작하면서 갈증이 인다. 머릿속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치즈?”

그가 짧은 신음성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곧 흐릿하게 번지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파이의 목덜미를 핥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러지?

파이의 손이 내 팔을 잡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그를 껴안았다. 그의 매끄러운 목덜미를 핥을수록 그 달달한 향이 더욱더 진해져 침샘을 자극했다.

이 안에 더 맛있는 거. 달콤하고 향긋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정신없이 할짝거리다가 입을 벌려 파이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그리고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그대로 바짝 얼어버렸다.

“헉?!”

내가 더 놀라서 다급히 입을 떼었다. 그러자 내가 방금 물었던 그의 목덜미에 두 개의 구멍이 나란히 생긴 채였다. 마치 굵은 송곳으로 뚫어놓은 것처럼. 게다가 그 찢어진 피부 사이에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당황해서 손으로 입을 닦아냈다. 순간 손끝에 낯선 송곳니가 뾰족하니 날카롭게 튀어나와 걸린다. 결국 나는 소리 없이 경악한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파이? 이, 이게 뭐, 왜……?”

손바닥에 살짝 묻어나는 붉은 핏자국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때 파이가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그에게 안기고 나서 알았다. 내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

“괜찮다. 진정해. 괜찮아, 치즈. 괜찮아.”

“어, 어떡해…….”

그의 목덜미가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굵직한 송곳니에 뚫려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등을 쓸어내려 주면서 위로를 해온다. 정작 다친 건 자기인데. 혹시나 내가 충격 받았을까 봐 전전긍긍하니까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입가에 묻은 피 냄새가 비릿하다. 하지만… 입안에 머금어진 그의 피 맛은 꽤 달았다. 진짜 꿀을 한입에 가득 넣었을 때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그래서 조금 더 충격적이었다. 아까 에이든이 나더러 변했다고 했던 말처럼, 확실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내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드래곤의 피에는 불로장생의 힘이 담겨있어. 그들에게 정해진 수명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거지. 자신의 피를 네게 먹이면 진정한 불사의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돼.]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전신의 피가 증발해서 죽는다. 살리려면 드래곤의 피를 먹어야 하고, 그 얼음나무는 나를 도와준다고 했다.

그럼 나는 파이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거겠지?

나는 일단 입에 묻은 달콤한 피를 혀로 핥아 목구멍으로 꼴깍 넘겼다.

큰일이다, 정말. 너무 맛있어서.

“파이, 나한테 파이의 피를 먹인 거 맞아요?”

일단 지금처럼 파이의 품에 안겨있다가는 또 이성을 잃을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그의 눈을 마주보다가 또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깨끗하게 정수된 피처럼 맛있어 보이는 선홍빛의 눈동자를 마주보자마자 갈증이 일어나버려서.

내 표정을 확인한 파이가 아까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 표정의 의미를 알았는지 소리 없이 한숨을 뱉어냈다.

“그래. 내 피를 먹였어. 드래곤의 피에는 불로장생의 힘이 담겨있으니까. 아마도… 인간이 드래곤의 피를 마신 부작용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꽤 솔직하게 말하면서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쥔 그가 내게 반대쪽 손목을 내민다. 곧 아까 맡았던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서 나를 유혹해 이성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왜, 왜요?”

“일단 마셔. 네게 지금 필요한 건 수프보다는 피 같거든.”

…머, 먹어도 되는 건가?

아직 송곳니가 뾰족하게 드러난 채다. 혀끝에 걸리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맹수의 이빨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서.”

아예 내 입술 앞에다가 손목을 들이미는 파이 때문에 잠시 갈등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어서. 마치 인간임을 포기하게 되는 기분이라 싱숭생숭. 그러다가도 눈앞이 빙글 돌 정도로 맛있는 향기에 이성이 곧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 아프면 말려요.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걱정 말고.”

나는 입에 잔뜩 고인 침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인간답지 못한 일을 저질러본 역사가 없는데.

이상하게 붉은색만 보면 금단의 열매의 달콤했던 그 맛이 떠올랐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고 맛있었던 과즙. 그 맛을 생각하니까 또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확실한 건 파이의 피도 그만큼 맛있었다는 거지.

“미안해요, 파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이성을 다잡으려고 노력하면서 파이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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