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억울하고 원통해서 가슴이 찢겨지는 기분을 여지없이 느꼈다. 그 사이 어딘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팔짱을 끼며 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흐음……. 놀라운데? 정말이잖아? 드래곤 따위가 사랑을?”
마치 혼자 무언가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그가 헛웃음을 흘린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정말이야?”
“지금 네게 처한 상황을 보고 있는 중이야. 카르디옌이 저런 얼굴을 지을 줄 알게 되다니.”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진다. 파이가 왜? 어떤 표정인데?
“이런 경우도 생기는군. 운이 좋은가보다, 넌.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은 이었나 보군.”
“…운이 좋았지.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는데 지금까지 무사하게 잘 살아왔으니까.”
“아니. 금단의 열매를 먹고도 살아난 유일한 인간이 되겠어. 굳이 열매를 먹지 않아도 영원불멸의 수명을 얻을 수 있기도 했었지만.”
“열매를 먹지 않아도 가능하다고? 어떻게?”
“역시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사랑이야말로 더 애틋하고 소중한 거지. 아무렴. 살다 살다 이런 상황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나보다 훨씬 꼬맹이 모습인 주제에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려서 어이가 없었다. 애늙은이 같은 느낌이다.
“노인네 같아, 너.”
“이래 봬도 나 역시 사천 년을 살아왔다고.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사천 년을 살아왔다고? 그럼 파이와 같잖아? 어… 어?
“설마… 그 금단의 열매?”
“아니. 그 열매를 낳는 얼음나무. 블랑 제국의 그 나무가 바로 나야.”
와……. 세상에, 얼음나무가 말도 할 줄이야. 물론 꿈이니까 가능하겠지만. 그래서 내가 열매를 먹었다는 걸 아는구나. 아니, 얼음이면 얼음으로 변신해서 등장할 것이지. 왜 하필 파이의 어린 모습이람?
“취향 참 특이하네. 파이의 얼굴로 나타나서 나를 현혹하다니!”
“착각하지 마. 네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 네가 보고 싶은 상대가 투영되어 나타나는 거니까.”
“아, 그, 그래?”
그렇게 따지니까 내가 파이를 엄청 좋아하기는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무의식적으로도 보고 싶은 사람이 파이뿐이라니.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은 내가 파이를 그만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구나. 알았어. 그건 됐고, 나 그럼… 죽지 않아? 살 수 있는 거야?”
나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절실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카르디옌이 침착하게 방법을 떠올리면 가능하겠지. 그런데 사천 년 만에 찾은 자신의 반쪽이 죽어 가는데 과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야.”
…저게 진짜 아까부터!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처럼 얄밉게 저러네? 저 얄미운 얼굴을 두 손으로 꽈악 꼬집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주먹으로 정수리를 콱 내리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일단 내가 저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죄인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
“금단의 열매는 신의 장난이나 마찬가지야. 블랑 제국의 황족들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재판이지.”
“그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살 수 있는 방법, 그게 뭐냐고.”
“성격이 급하군 그래? 뭐 결론 먼저 말하자면 신이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드래곤에게 내린 축복이 하나 있다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집중하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정확하게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드래곤의 피에는 불로장생의 힘이 담겨있어. 그들에게 정해진 수명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거지. 자신의 피를 네게 먹이면 진정한 불사의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돼.”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 드래곤의 피. 그들이 영원을 사는 것은 타고난 거라고만 여겼으니까.
“도와줄까?”
“…응?”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여서 정신이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귀에 콕 박혀왔다. 어쩐지 달콤한 신의 음성처럼 들려오는 것 같다. 늪으로 점점 깊이 빠져서 옴짝달싹도 못 할 때, 눈앞에 던져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내가 직접적인 말을 전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카르디옌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너의 죽음을 늦춰줄 수는 있어.”
“어떻게?!”
그가 작달막한 손을 들어 올려 다섯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그러자 곧 투명한 얼음이 그의 손을 뒤덮어 꽁꽁 얼어붙는다. 그래서 단번에 눈치챘다. 그의 정체는 그 얼음나무라고 했으니까.
“얼음으로 나를 얼려놓겠다는 거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해. 그랬다가 네 심장이 완전히 얼어붙어 멈춰버릴지도 모르거든. 그래도 전신의 피가 증발해서 죽는 속도보다는 더디게 할 수는 있어.”
“…요는 이거나 저거나 파이가 내게 자신의 피를 먹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네.”
“그렇지. 어때? 한번 도전해보겠어?”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대로 죽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놈의 미련이 뭔지. 혹시, 라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과연 파이는 내가 자신과 같은 영생을 살길 바랄까? 행여 파이가 내게 자신의 피를 주지 않는다면 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내게 조금의 마음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그대로 죽어버리면, 그로 인해 파이에게서 완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우 슬프겠지만.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너는 왜 날 도우려고 해? 내가 욕심을 부려서 먹으면 안 되는 열매를 먹어 죽게 되는 건데?”
“궁금해서.”
“궁금하다고?”
“과거 열매를 먹고 이곳으로 온 인간은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회생불가능한 놈들이었어.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쳤지. 그건 좀, 추악하다고 느꼈어.”
무심하던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면서 조금 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그러나 곧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천천히 걸어 내 앞에 마주보고 섰다.
“내가 생각할 때 인간이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부러운 게 바로 사랑이야. 뜨거운 불길속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 정도로 대단한 힘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렇고.”
그렇기는 하다. 사랑이라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진심을 담은 애정이지. 더군다나 돌덩이처럼 단단해서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드래곤의 감정도 서서히 일깨워주게 했으니까.
“궁금해졌어. 천 년에 한 번씩 폭주하는 드래곤을 얌전한 짐승으로 만드는 것도 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그 폭주라는 거, 왜 그러는 거야?”
“희망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아가면 무기력해져. 그럼 육체와 정신이 점점 망가지고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지게 돼. 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간혹 드래곤이 폭주하면 세계의 절반이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재앙이 펼쳐진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드래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며 꾸준히 제물과 보석을 아낌없이 바친다고. 그런다고 드래곤이 폭주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도 말이다.
“아마 지금 네가 죽으면 저 카르디옌이 멀쩡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도 불안하네. 저러다가 자칫 나 역시 전부 부서져 깨질 것 같기도 하네.”
“부서지면 너도… 위험해지는 거야?”
“글쎄? 부서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픈 건 딱 질색이거든.”
얼음도 아픈 걸 느끼는구나. 그건 또 신기하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래? 카르디옌을 자극하는 방법도 떠올랐는데. 시도해보겠어?”
이대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건 싫다.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것 같으니까. 뭐든 시도는 해봐야 하는 법. 그래야 후회를 하지 않을 테니까.
“해볼래. 부탁할게. 파이를… 도와줘.”
그러자 그가 해사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발바닥부터 시작해 얼음조각이 천천히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윽……!”
피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온몸이 따끔거렸다. 추워서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다.
“행운을 빌어. 아참! 살아남게 되면 우리 블랑 제국 전통 의상인 베숄린을 입은 모습을 내게 보여줬으면 좋겠어. 네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뜬금없이 웬 베숄린?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목까지 차오른 얼음이 순식간에 입과 코를 덮는다. 동시에 눈과 머리끝까지 얼음으로 뒤덮이는 순간, 내 세계가 우뚝 멈춰져버렸다.
* * *
“치즈는?”
“…아직.”
무의식 속에서 배회하다가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런데 눈은 안 떠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해지지가 않아서 당황했다.
왜… 이러지?
“신기하네. 치즈라면 배고파서라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닥치고 꺼져.”
당장에라도 씹어 삼켜버리겠다는 것처럼 작게 으르렁거리는 파이의 목소리가 섬뜩하다. 그럼에도 내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건 피부로 느껴지는데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새까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이의 목소리에 이어 에이든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결과적으로 좋게 되었잖아? 비록… 치즈가 죽을 뻔한 위기에 놓이게 된 원인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선택한 건 치즈였어.”
“종용한 건 네놈이지.”
“치즈가 영생을 원하는 이유가 카르디옌 너 때문이니까 완전히 내 잘못은 아니라고.”
웃기게도 서로 책임전가를 하고 있다. 게다가 에이든은 내 탓까지. 없던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에이든의 말처럼 선택은 내가 했으니까 누굴 원망하지는 못하겠다.
“그나저나 카르디옌 네가 그렇게까지 사람 목숨 하나 때문에 세상 다 무너지는 얼굴이라니. 내가 내 눈으로 봤지만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사천 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적도 처음이다. 이 망할 쓰레기 새끼.”
“나한테 화풀이는 그만 좀 하고. 욕도 하루 이틀이지, 이래 봬도 황제인데!”
“…죽인다.”
“그건 곤란해. 자꾸 그러면 치즈하고 같이 죽어버릴 거다? 혼자는 억울해서 못 죽어! 못 죽는다고! 이대로 죽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즈하고 같이 갈 거다!”
“그럼 입이나 닥치고 있어.”
에이든 하는 말이 꽤 얄미워서 파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음을 그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기가 차는데 파이는 오죽할까?
그 뒤로는 조용해져서 방금 그 목소리가 꿈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파이와 에이든의 옅은 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아직 정신이 깨어있기는 한 것 같은데.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
“치즈…….”
그때 굉장히 서글프게 들리는 파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가느다랗게 흘렸다. 어딘지 나약하게 느껴지는 낯선 느낌이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이렇게 애틋한 감정을 가득 안고 나를 부르다니.
호흡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폭우로 불어난 강물처럼 온몸의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서서히 잠들어있던 신경이 하나둘씩 깨어나 감각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