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혹시나 해서 몰래 달아놨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무엇보다 치즈 네가 내 편지를 읽고 기쁘게 웃어줘서 나 역시 기뻤다.”
순간 얼굴에 핏기가 쑥 내려가 파랗게 변해버렸다.
“…드, 들었어요? 그, 그, 그거?”
“그렇게 지금처럼 착하게 내 생각만 하고 있어. 저 쓰레기 새끼랑은 어울리지 마.”
끄응. 이건 수치다. 수치야. 이렇게 민망하고 부끄러운 짓을 들키다니! 파이가 보낸 그 편지를 내가 몇 번이나 육성으로 읽었는데.
그저 좋아서 연신 웃어댔던 기억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나를 향해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는 파이가 내 이마와 뺨 그리고 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네 덕분에 잃어버린 감정을 서서히 되찾아가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그걸 재앙이라고 여기지는 마.”
정말 우리 대화를 듣긴 했는지 내가 한 말에 대해 위로하듯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그놈이 미혹하던 말에 넘어가진 않았으니 그놈에게 뽀뽀하던 건 잊어주지. 내 허락 없이 나 이외에 다른 놈과 그런 짓을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
…게다가 은근히 구박까지. 벼르고 있다가 못 참아서 자리를 이탈하고 온 건가 보다. 그가 집중해서 들은 내용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조금 민망해졌다.
내가 무, 무슨 말을 했더라?
“씻는 걸 도와줄 시간까지는 되지 않아서 아쉽네. 보아하니 끈적해서 잘 안 씻기니까 따뜻한 물에 잘 불려서 닦아.”
“아… 응, 응! 자, 잘 씻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요.”
“그래. 시간 맞춰서 저녁식사 가지고 다시 올 테니까 깨끗이 씻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야릇하게 귓가 근처에다가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가 나를 그 손님방에 딸린 욕실 앞에서 잠옷을 벗겨주었다. 붉은 과즙이 잔뜩 묻어버린 잠옷을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기괴하기도 했다. 진짜 꼭 유혈사태가 벌어진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징그럽긴 하다.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걸로 준비해오게.”
“음…….”
아까 샌드위치 먹었으니까 저녁에는 고기로? 빨간 고기… 고기……. 어, 어라?
“치즈?”
“…어지러워.”
갑자기 눈앞이 빙글 돈다. 중심을 잡을 수 없어서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시야가 어지러우니까 속이 울렁거려서 구역질이 절로 난다.
“치즈!”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강한 힘이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어딘가에 기대게 되었다. 그게 파이의 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귓가에서 가까이 들려오는 그의 외침 때문이었다.
“치즈, 치즈? 왜 그래? 왜!”
“토할… 것 같…….”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목구멍이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곧 머리가 깨질 정도로 두통이 몰려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괴롭다가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역류해서 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 순간 흐릿한 시야에 붉은색이 한가득 들어차면서 피의 비린내가 코끝에 진동했다.
“…파이. 피 냄새가… 나…….”
이미 초점이 내 의지를 벗어나 시야가 제대로 트이지 않는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연신 기침과 함께 목구멍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온몸이 욱신거려 달달 떨리기만 했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고, 선명하던 소리들이 어둠속으로 사그라지는 빛처럼 차츰차츰… 사라져간다. 나는 그 미약한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 *
“…어?”
감았던 눈을 뜨니 어느 낯선 초원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나는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녹색의 풀들이 빽빽하게 자란 그곳에 서 있는 채다. 그 푸르른 풀만 가득한 초원 너머에는 밝은 하늘색을 머금은 하늘이 하얀 구름을 가득 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블랑 제국인가?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파이? 에이든?”
혹시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기분 좋은 시원한 공기가 나와 풀들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풀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내 피부에 닿는 것이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설마 꿈인가 싶었지만 꿈이 이렇게까지 현실적이진 않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이가 나를 혼자 둘리 없는데?
누가 있는지 찾아볼까 싶어서 발을 떼려고 했지만 마치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게다가 맨발이고. 이제 보니 하얀 레이스 잠옷을 입은 채다. 이 상태로 나를 밖에 내보낼 파이가 아니다.
그래서 순간 소름이 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 그건 분명 피였다. 붉은 피가 역류해 입 밖으로 한가득 쏟아내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 두통과 함께 온몸이 저릿하고 욱신거렸던 감각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달달 떨던 나를 품에 안던 파이의 몸이 잘게 떨리던 그 감각도.
“아, 아니겠지? 설마 나, 죽은 거야? 열매 먹으면 영원의 수명을 가진다더니?”
…그럼, 에이든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걸까? 날, 죽이려고? 대체 왜?!
“아냐.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아직… 아직 파이하고 해보지 못한 게 많단 말이야! 이 나쁜! 에이든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시끄러워.”
분노에 몸을 떨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웬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랐다. 발은 떨어지지 않아서 대신 고개만 휙 돌려 뒤를 봤다.
“…응? 파이?”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눈꺼풀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미간을 모으고 집중해서 빤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의 풀숲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민 아이는 파이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파이하고 똑같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무심하게 올려다보는데 심장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귀, 귀여워! 뭐야? 뭐야, 뭐야? 파이가 왜 이렇게 어려졌지?
“여긴 내 영역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나가.”
…말투도 눈빛도 파이가 확실하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까만 머리카락까지 완벽한데 어쩐지 나를 몰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파이, 나 누군지 몰라요?”
“…파이라니.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파이가 아닌가? 설마 여기, 꿈이야? 천국이 아니고? 꿈이 이렇게 현실적이던가?
“나가라고 했다. 죽고 싶어?”
“아, 아니! 나도 나가고 싶은데 이거 발이… 떠, 떨어지지가 않아서.”
진짜 죽일 마음이 가득한 표정이라 나는 다급히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파이를 닮은 남자아이의 붉은 눈동자가 내 다리 쪽으로 옮겨졌다. 풀숲에 가려진 내 발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면서 갸우뚱거린다. 그러고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너, 누구야?”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야말로 누구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나, 나는 치즈야. 치즈.”
“치즈는 먹는 음식이잖아.”
…네가 지어줬잖아! 저게 진짜?! 아오, 내가 정말 화를 낼 수도 없고!
“그게 내 이름이야. 먹는 음식인데… 어떤 나쁜 놈이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줬어.”
“이상한 놈이군.”
그 이상한 놈이 바로 너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그나저나 너도 이상해. 인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드래곤도 아닌 것 같은데. 네 체취가 왜 그따위지?”
“…내 체취가 어떤데?”
“끔찍하게 달아. 가까이 가면 두통이 일어날 정도야.”
나는 팔을 들어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하지만 딱히 단내는 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 드래곤이라 코가 예민해서 그런 건가?
“그리고 너 지금 네 몸의 피가 증발하고 있어.”
“뭐?!”
“그러다가 금방 죽겠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마치 붉은 노을을 보고 ‘아, 해가 지는구나’라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뱉어낸다. 인간의 목숨을 한낱 들판의 잡초로밖에 보지 않는 드래곤하고 다를 바가 없다. 파이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파이의 얼굴을 하고서 내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한다니 급격하게 울적해지기도.
“그, 그럼 어떡해? 나 아직은 죽으면 안 되는데.”
“죽음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신의 은총이야. 고통도 삶의 괴로움도 느낄 수 없이 안락함을 영위할 수 있어. 그냥 좋게 받아들이도록.”
“그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내가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렸다고 생각할 때나 그런 거지! 나는 아니라고!”
“불사의 육체를 갖기 위해 욕심을 부렸잖아? 네 것이 아닌 물건에 손을 댔고, 입에 발린 거짓말에 속고 유혹을 이기지 못한 건 너 자신이야.”
“…그걸 어, 어떻게?”
깜짝 놀랐다. 마치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사람처럼 파이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내가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도 못하고 당황해하자, 어린 그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과거에도 이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네가 먹은 그것은 금단의 열매로, 과한 욕심을 가진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신이 내린 하나의 형벌이지.”
“금단의 열매…….”
“여러 사람이 조금씩 나눠 먹으면 치유약이 될 수 있지만, 욕심내서 하나를 전부 다 먹으면 너처럼 돼.”
에이든이 완전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설마 몰라서 말을 안 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하나를 다 먹으면… 불사의 육체를 가질 수 있다고… 했어.”
“물론 수명이 늘어나는 건 거짓이 아니야. 다만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지. 여태까지, 단 한 명의 인간도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럼 정말 나 역시 탐욕에 휩쓸린 대가로 죽게 되는 거구나.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 파이하고 오래 함께 있고 싶은 욕심만 내세우다가 이 꼴이라니.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이대로, 파이와 마지막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런데 왜 네게서 블랙 드래곤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군. 카르디옌과 어떤 사이지?”
호기심이 가득한 그의 물음에, 나는 넋 나간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대답해줬다.
“카르디옌이라면… 내가 말한 파이야.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파이랑 쭉 같이 살아왔어.”
“블랙 드래곤과 살아왔다고?”
“응.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어서 자기가 거뒀다고 그랬으니까.”
“…희한하군.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먹지 않은 맹수라니. 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한 건가?”
“파이는 날 잡아먹지 않아. 파이하고 나는… 여, 연인관계였다고. 가족보다 더 진한 연인 사이.”
내 입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사이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워지는지. 상대가 어린 모습이다 보니 어쩐지 더 민망해지는 기분이다.
“드래곤이 연애를 해? 인간하고? 그 말을 누가 믿어?”
“믿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사실이라서. 그런데 내가 죽어버리면… 다 무슨 소용이겠어? 파이가 대단히, 상처받을 텐데.”
또 침울해져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파이가 너무 보고 싶다. 만지고 싶고, 그 단단했던 품에 안기고 싶고. 아직 마음껏… 그를 전부 느끼지 못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