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51화 (51/132)

♬  #51

그 열매의 과즙이 얼마나 새빨간지 턱과 목하고 옷은 물론이며 가슴까지 적셔버린 모양새가 꼭 피를 토한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맛은 좋네. 얼마나 달달한 지 꼭 시럽을 입안에 부어버린 느낌이었다.

입술에 잔뜩 묻은 과즙을 혀로 몇 번이나 핥았는데도 단맛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까 뭐 복숭아 맛이라더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는 딸기하고 레몬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맛이었다. 그게 또 은근 중독성이… 으어, 손가락에도 다 묻었잖아?

“우선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누가 보면 살인현장인 줄 알거예요.”

“누가 본다고. 괜찮으니까 어서 다 먹어.”

좀 찝찝하지만 일단 맛있는 건 빼앗기지 않도록 잽싸게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허겁지겁 빨간 열매를 베어 먹었다. 껍질도 얇고 약간 잘 익은 망고같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일품이다. 머리가 띵, 할 정도로 달긴 하지만 또 약간 시큼한 맛이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는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조각까지 전부 다 입에 넣고도 손가락과 손바닥을 전부 적신 과즙을 혀로 핥아 먹었다.

“맛있어?”

“네. 복숭아는 아니고 딸기에 약간 신맛이 더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달아. 나도 단 걸 좋아하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럼 그렇게 기록해놓으면 되겠네. 정보 고마워. 그럼 나도 맛 좀 볼까?”

라면서 다가온 에이든이 내 손목을 잡아 살짝 당겨서는 붉은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할짝, 가볍게 핥았다. 그 축축한 감각에 흠칫 놀랐다.

“으, 으악? 뭐하는…….”

“와, 진짜 달구나? 아주 맛있게 열심히 잘 먹어서 어떤 맛인가 궁금했는데. 진짜 달아. 맛있다.”

연신 감탄사를 흘리면서 내 손바닥에 묻은 과즙을 핥아 먹는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하게 야릇했다. 손바닥이 질척한 혀에 닿을 때마다 간질거리면서도 묘하게 날이 선 감각이 찌릿하게 울렸다. 움찔거리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에이든은 놔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 나를 경계하던 그 얼음 고양이 나비가 코를 벌름벌름하면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에 가볍게 올라타서는 에이든의 어깨에 안착했다.

아까는 그렇게 경계하더니 너무 쉽게 다가오는 거 아니야?

그러더니 에이든이 핥아 먹은 내 손바닥에 흥건한 열매의 과즙을 핥아 먹기 시작했다.

…이 못된 짐승들이 진짜?

“나는 먹는 게 아닌데. 가, 간지러워! 간지럽다고!”

“어차피 닦아야 하잖아. 얌전히 있어 봐. 닦아줄게.”

“간지러운데, 픗, 아… 끅, 간지러운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요!”

한 제국의 황제와 얼음 고양이가 빨간 과즙이 잔뜩 묻어난 내 손바닥과 팔뚝을 맛있게 핥아 먹는다. 꼭 양념에 버무려진 고기가 된 것 같다. 이러다가 물어뜯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 와중에 온 신경을 건드리는 간지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결국 발을 버둥거리고 꺅꺅 소리를 질러대기 바빴다.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정신없이 웃어대다가 손가락 사이를 핥는 야릇한 느낌에 움찔 떨었다.

“악! 잠깐, 잠깐 저기… 읏!”

아직도 손에 잔뜩 묻어있는 과즙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뒤로 확 뺐다. 하지만 아까부터 내 손목을 잡아 쥐고 있는 에이든이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당긴다. 덕분에 나는 그의 품에 덥석 안기게 되었다.

“헉?”

“미안해, 치즈.”

…응?

“내가,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에이든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파이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갑자기 실내 분위기가 음산하게 가라앉아 화들짝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떴다.

“파이?”

그제야 에이든이 나를 품에서 떨어트리고 파이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에이든을 죽일 듯 노려보면서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는 파이가 확실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게 느껴진다.

“파이! 왔어요?”

나는 활짝 웃으면서 기쁘게 외쳤으나 딱딱하게 굳은 파이의 얼굴은 분노를 참는 듯 꿈틀거렸다. 죽일 듯 살벌한 눈초리가 에이든을 향한 채다. 조금만 더 건드렸다가는 무시무시한 드래곤 비늘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참 기가 막힌 순간에 딱 걸리네. 에이든 이 바보 아저씨 같으니라고.

“으음, 카르디옌?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오해? 뻔뻔한 놈. 그럴 줄 알고 미리 도청마력을 걸어놨지. 네 녀석의 썩어빠진 비열함을 예상했거든.”

“아, 아니. 비열함이라니? 내가 어딜 봐서? 도청하는 네가 더 비열하다!”

“…그 더러운 혀를 뽑아내 버리…….”

“어허! 감히 블랑 제국의 황제인 나를! 그러다가 우리 블랑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발생한다, 너? 잘 생각해? 날 건드리면 치즈가 무사할 성싶나?”

…되게… 얍삽하다. 응. 파이도 만만치 않지만 에이든은 더 하네. 황제인데도 착하다고 생각했더니 못돼 처먹었잖아?

그러자 파이가 얼굴을 확 구기면서 짐승처럼 목 긁는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그에 나비가 더 깜짝 놀라 후다닥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나와 에이든 역시 움찔거리면서 어깨를 바짝 굳혔다.

저러다 진짜 큰일 치르겠어.

곧 나를 향해 다가오는 파이를 본 에이든이 뒷걸음질을 쳤고, 파이가 한 팔로 나를 감싸 품에 안는다. 순간 어깨뼈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하여간 힘이 장사야!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파이가 이를 갈면서 낮은 목소리로 재차 경고했다.

“만일 이후에도 내 아이에게 멋대로 손대면 너희와의 계약을 엎어버리는 수가 있어. 명심해라, 에이든. 우리 드래곤이 소유한 것에 함부로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흠흠, 아 날씨 참 좋네. 후우!”

파이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에이든이 모른 척 헛기침을 뱉어내며 방문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역시 뻔뻔한 건 타고나는 건가 보다. 나는 파이를 상대로 저렇게까지 뻔뻔해지지 못할 것 같은데 대단해.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파이의 서늘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순간 흠칫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 무, 무서워!

“치즈.”

“으응?”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쪼그라드는 느낌이라 목소리마저 떨려 나왔다. 툭 치면 바로 목덜미를 콱! 물어버릴 것 같은 기세라 입술이 바짝 말라오기까지.

그러자 파이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뜨면서 다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파이가 내 하얀 잠옷과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뻗어와 입술과 턱을 엄지로 가볍게 쓸어서 닦아낸다. 그의 손가락에 붉은 과즙이 잔뜩 묻어나왔다.

“예전에도 몇 번 가르쳐줬었던 것 같은데. 누가 맛있는 음식을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거나 아무나 쭐레쭐레 쫓아가지 말라고. 그새 잊었어?”

“…에이든이 준 거니까… 아, 아까 샌드위치도…….”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겁을 먹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떳떳해. 내가 뭐 실수한 적 없다고!

…하지만 지금 파이가 무섭긴 하다. 평소하고 조금 다르게 잔뜩 날이 서 있는 상태라 지금 반박하면 곤란하다. 투정도 때를 봐가면서 부려야지. 눈치 없이 덤벼들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걸 그동안 많이 경험해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열매 먹은 게 어떤 거라고 설명도 못 꺼내겠어서.

“몸은 어때? 괜찮아?”

그러다가 뜬금없이 내 몸 상태를 물어봐서 축 내렸던 눈썹이 확 올라가 버렸다.

“몸이요?”

“수상한 열매를 몰래 먹었잖아. 내 기억으로 이 얼음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인간이 먹기에 적합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음… 글쎄요? 딱히 나쁘지도 않고… 속이 더부룩하지도 않아서.”

“그럼 다행이지만. 이 이상 다른 음식은 손대지 마. 저녁도 따로 챙겨다 줄 테니까 내가 주는 것만 먹어.”

나를 빤히 쳐다보는 파이의 눈동자가 살짝 불안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청했다더니 열매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않았나 보다. 다행인 걸까?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파이가 고개를 돌려 에이든이 나가버린 방문을 찌릿 노려본다. 아무래도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못 참겠다는 표정이다. 더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전에 재빠른 대응이 필요한 순간이다!

“알았어요, 파이. 내가 모르고 먹은 거지만, 나 괜찮으니까 기분 풀어요, 네? 파이 말대로 할게요. 파이가 내 맛있는 저녁 챙겨올 때까지 파이 기다리면 되죠? 응? 응응?”

새초롬한 표정으로 파이의 옷깃을 살짝 잡아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건 나의 생존본능이나 마찬가지다. 그러자 다시 나를 쳐다보는 파이의 굳었던 표정이 살짝 풀린 것 같았다.

아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딱딱한 얼굴이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저 무표정이 백배 천배 훨씬 낫다.

그래서 나는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최대한 예쁘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웃지 마. 누가 보면 산짐승 하나 잡아먹은 걸로 보겠어. 이까지 전부 새빨개.”

그러나 타박하는 말에 입술을 말아 물고 눈꺼풀만 빠르게 팔랑거렸다.

“우선 가서 좀 씻자. 엉망이라 못 봐주겠다.”

말하면서 내 손을 잡는 파이가 나를 당기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헉! 자, 잠깐요!”

“…왜?”

…응? 어라? 분명히 에이든이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발을 디뎠다가는 바닥이 깨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파이가 너무 멀쩡하게 서 있는 게 말이 돼? 머릿속에 온통 나를 어떻게 요리할지에 대한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드래곤이라고! 설마 종족차별?

나는 얼음으로 되어있으나 미끄럽지 않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에이든이 여기 제가 밟으면 얼음이 깨질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바닥이 깨진다고?”

“응.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파이가 순수할 리 없잖아!”

그러자 피식 웃는 파이가 다시 내 손을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동시에 웃음기를 머금은 파이가 귓불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 말을 믿어? 순진하기는. 네가 이러니까 저 음흉한 놈의 먹잇감이 되는 거라고.”

덕분에 내가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저! 저 나쁜 거짓말쟁이 황제 같으니!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부터 절대 에이든이 하는 말은 의심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파이와 함께 그 신비로운 장소를 빠져 나와 다시 손님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파이. 아직 전쟁인지 뭔지 시작하기 전이에요?”

“진행 중인데?”

“…응? 그럼 어떡해요? 전투 하다가 말고 와버리면 어떡해! 무책임하게!”

“알아서 하겠지. 꼴 같지 않게 구는 저 새끼 죽이려고 온 거였으니까.”

파이가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내 귀 뒤쪽을 툭, 건드리는 느낌에 알았다. 귓불 바로 뒤쪽에 동그란 반원의 무언가가 부착되어 있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