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네가 카르디옌을 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성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 그리고 카르디옌의 행동도 수상하거든.”
“수상… 하다니요?”
“혼인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드래곤이 인간과 연애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곱게 키운 제 새끼한테 주는 정 치고는 꽤 대단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순간 프리센 왕국에서 파이가 내게 보였던 그 대단한 집착이 떠올랐다. 그때는 문란한 남자에게 나를 시집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파이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다.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대단한 독점욕이라든지, 별일 아닌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든지.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라고. 여기서. 지금. 당장.]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종용하던 그의 말은, 평생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는 뜻과 일맥상통하게 느껴졌다.
“무려 사천 년을 넘게 홀로, 누구와의 접점도 없이 살아가다 보면 감정이 메마르게 되겠지. 카르디옌도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파이가 설마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내 표정을 내려다보는 에이든이 조금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움의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카르디옌 본인만 알 수 있는 거라 장담은 못 하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물론 시간을 주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소용없겠고.”
그건 파이가 내게 아무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레이라도 프리센 왕세자도 에이든도, 다들 보기에는 파이가 나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내가 봤을 때, 그건 나와 같은 사랑이라는 마음은 아니다. 단지 가지고 있던 예쁜 인형 하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성향과 비슷할 뿐.
뭐가 정답일까? 그를 오랫동안 봐온 내 생각이 맞는 걸까? 아니면 정말 파이가 나를?
“치즈.”
“네?”
“네가 카르디옌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는 건 너일 거다. 드래곤은 인간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그건 종족특성이니까.”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이든이 내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면서 손을 더 꼭 쥐었다.
“내 생각에는… 당장은 힘들더라도 더 상처받기 전에 카르디옌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제국에 와있어도 괜찮아.”
“그러면서 은근슬쩍 날 어떻게 해볼 심산인 거 다 보여요.”
“…티 많이 났어?”
내가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투덜거리자 에이든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파이처럼 말을 돌리지는 않아서 사람이 참 착하긴 하다고 느꼈다.
“아니 나는… 일단 네가 카르디옌의 레어에서 나오면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겸사겸사.”
“그 제안은 좀 더 생각해볼게요.”
“여기 황궁을 네 집이라고 생각하면 더 좋고.”
“그러다가 전 재산도 선뜻 주겠다고 하겠어요?”
“내가 카르디옌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기왕이면, 나랑 혼인하면 안 될까?”
…기승전 혼인이로군. 그렇게 끈질기게 유혹하면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어요.”
“그럼 나하고 하룻밤만이라도… 어때?”
…이 요망한 황제 같으니라고. 속셈이 따로 있었어.
“저더러 바람 피우라는 말이에요?”
“어차피 연애만 하는 거고 혼인은 다른 사람이랑 할 거라며. 기왕이면 나하고 혼인한다 생각하고… 어때?”
“일단 사양합니다. 전 파이만으로도 벅차다고요.”
파이 때문에 속이 상하는 것도, 매일 파이와 그런저런 야한 행위를 받아내는 것도. 하여간 지금은 파이 이외에 다른 남자와 그런저런 일을 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 내 가슴에는 파이가 전부라.
“너무 냉정해, 치즈. 나는 이날 이때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십 년을 너만 생각하면서 여태 참았다고.”
“내가 혼인해주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또 시무룩하게 울상을 짓는 에이든의 표정이 순진한 어린아이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파이하고 완전히 다른 매력이라 귀엽긴 하지만, 내 취향은 온전히 파이라서. 안타깝네.
“그래. 알았어. 네 말이 맞네. 혼인을 약속하진 않았지. 내가 설레발을 친 게 맞아.”
“이해해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그렇게 심란해하지 말아요.”
“…심란할 수밖에 없다고.”
“왜요?”
에이든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새빨갛게 변하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래서 대충 뭐가 심란한지 눈치를 채 버리고 말았다.
파이도 하루가 멀다 않고 나한테 하체를 비벼오면서 만날 나 때문에 죽질 않는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내 성욕에 대한 호기심을 자기가 풀어주겠다더니 요즘 보면 자기 성욕을 주체못해 안달인 것 같다.
…뭔가 바뀐 거 아니야? 원래 남자가 더 성욕을 참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치즈. 정말 안 되겠어?”
“하룻밤은 더더욱 안 되고, 혼인은 아직이에요. 딴 남자 맘에 품은 사람을 곁에 둬봐야 서로 힘들지 않을까요?”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습니다.”
다시 딱 잘라서 대꾸하자 그렇지 않아도 처진 어깨가 더 축 처지면서 훌쩍거리기까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우리 쪽으로 소리 없이 걸어오는 얼음 고양이 나비가 멀찍이서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낸다. 날카로워 보이는 얼음 송곳니가 빛에 반짝거려서 급격하게 울적해졌다.
아니, 네 집사 내가 울린 거 아니거든? 자기 혼자 제 감정에 못 이겨서 그러는 거라고.
“에, 에이든. 나비가 오해해요. 저러다가 내가 얼음 이빨에 물리겠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비를 쳐다본 에이든이 한숨을 폭 내쉬면서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냈다.
그나저나 지금 전쟁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한가하게 나랑 노닥거릴 시간이 있는 거야? 파이는 그 전쟁에 참석하려고 갔다면서.
“일단 우리 나가요. 전쟁부터 잘 끝내야지요.”
“알아서 잘할 거야. 전쟁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지도자가 그렇게 한심한 소리를!”
“일단 저 열매, 처음부터 너 주려고 했던 거니까 먹어볼래?”
뜬금없이 열매를 주겠다고 하니까 수상하다. 저 열매가 그냥 맛있는 과일 정도도 아니고 제국을 위해 귀하게 쓸 수 있는 거라더니.
“내가 저 귀한 걸 왜 먹어요? 멀쩡한 내가 먹으면 너무 아까운 고급 약이나 다름없는데?”
“그냥 네게 주고 싶어졌어. 내가 생각할 때 저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거든.”
어딘지 의심이 간다. 아까부터 에이든이 비밀로 하는 게 너무 많아서 그의 말에 믿음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또 나를 해하려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내가 너무 앞서갔나 싶기도 하고.
“내가 저 열매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요?”
“저 열매 하나를 다 먹으면 수명이 늘어서 불사에 가까워져.”
…불사?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게, 정말이에요?”
“응. 내가 신의 피라고 했잖아. 먹으면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했어. 어차피 저건 네 거나 다름없으니까. 지금 네게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수명이 늘어나 불사의 몸을 가지게 되면, 파이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 그 생각에 다다르자 순간 전신에 솜털이 곤두서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머릿속에는 온통 불사의 육체가 된다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파이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어. 내가 늙어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떠나지 않아도 돼. 일단 수명이 길어지는 걸 빌미로 인간과 혼인을 하지 못한다고 잡아떼면…….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잔뜩 들떠있는 상태에서 에이든이 고민 하나 없이 손을 뻗어 열매를 똑, 땄다. 그리고 파이의 눈동자만큼이나 새빨간 열매를 내게 내민다.
“어차피 네가 먹지 않으면 내가 먹어버릴 생각이었거든.”
“…다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약이라면서요.”
“이 열매로 만들 수 있는 치유약은 한정되어있어. 겨우 이 열매 하나로 블랑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없지.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주고, 꽤 문제가 많아서.”
“에이든도… 불멸의 생명을 갖고 싶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꼭 밤하늘의 별빛을 보는 기분이다.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거려서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 그런 기묘함을 담고 있었다.
“에이든……?”
“혹시라도 누군가 이걸 탐내는 사람이 있으면 내란이 일어나니까. 차라리 내가 먹어버리고 백 년간의 평화를 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어.”
“…그럼 에이든이 그 긴 세월을 홀로 살아야 하잖아요? 파이처럼…….”
“걱정해주는 거야? 나를?”
“몇 천 년을 살아 감정을 잃어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할 테니까… 그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과거 파이의 표정이 그렇게 딱딱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에게 감정도 없는 나쁜 드래곤이라고 욕했던 내가 너무 철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파이 원망만 해서…….
“갑자기 더 카르디옌이 부러워지는데? 이렇게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치즈라니. 굉장히… 질투가 나.”
가슴이 저며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어쩐지 복받쳐 오르던 감정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에이든 덕분에 쑥 가라앉았다.
“질투는 무슨…….”
“어찌 되었든 나는 치즈 네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야. 네가 카르디옌의 옆에 있는 게 진심으로 행복하다 여기면 이걸 먹도록 해.”
다시 내 앞에 불쑥 내미는 빨간 열매의 빛깔이 너무 선명했다. 정말 피처럼 보여서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걱정하지 마. 어차피 불사의 육체가 된다 한들 목과 심장을 동시에 찌르면 죽게 되어있어. 아예 죽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그게 더 겁주는 것 같은데요?”
“사실이잖아. 신이 아닌 이상 신의 모든 피조물은 영원을 살 수 없으니까. 자, 받아.”
나는 에이든이 내 손에 넘겨주는 빨간 열매를 받아들고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무겁진 않은데 생각보다 커서 두 손으로 감싸야 할 정도다. 표면은 사과처럼 반질거렸지만 단단하지 않고 복숭아처럼 말랑하긴 했다. 손가락으로 열매의 겉 표면을 쿡 찌르자, 탱글탱글한지 쏙 들어갔다가 다시 원형을 유지한다.
속은 액체인가보네. 신기하다.
“그런데 진짜 먹어도 돼요?”
“응. 먹으라고 주는 거야.”
“껍질도요?”
“응. 씨도 없어서 그냥 다 꿀꺽 해도 돼.”
그렇다면!
나는 심호흡을 고르면서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입맛을 다셨다.
이걸 먹으면 수명이 늘어난다. 파이와 함께 불멸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늙어 죽을 걱정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다 보면 파이도 생각이 달라지겠지? 잘하면… 나와 혼인하는 것을 고려해줄지도 몰라!
“잘 먹겠습니다!”
잔뜩 기대감에 부푼 마음을 안고 새빨간 열매를 한입 크게 텁, 베어 물었다. 그러자 주륵, 하고 끈적한 빨간 과즙이 터지듯 흘러나와서 깜짝 놀랐다.
“흡?”
“아, 맞다. 그 속 안에 음료처럼 즙이 고여 있다는 얘기를 깜박했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천연덕스럽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