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49화 (49/132)

♬  #49

“괜찮다. 널 해치지 않아. 너를 보러 온 손님이니까 반갑게 맞이했으면 해.”

에이든의 손길에 나비가 그르렁거리면서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에이든의 손에 얼굴을 비벼오기까지 한다.

‘부러워! 부럽다고! 나도 저렇게 만지고 싶어!’

곧 에이든이 손을 거두자 아쉬워하면서 몸을 발라당 뒤집어 배를 보인다. 그 뒷다리 사이에 달린 것을 보고 나비가 수컷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그마한 콩알 두 개가 대롱대롱. 굳이 저거까지 정교할 필요는 없지 않아?

“수컷이에요?”

“블랑 제국의 초대 왕이 남성이었거든.”

수컷의 제국이라도 만들고 싶은 참이었던가.

“나비 성격이 순해서 사람을 잘 따라. 그러니까 걱정 말고 목 아래를 만져줘.”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비장하게 굳은 결심을 하고 나비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비가 코를 크게 벌름거리고는 내 손가락에 코를 박아 냄새를 맡는다.

“캬아옹!”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치면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경계한다. 덕분에 나도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거두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아이, 진짜. 왜 저러는 거야? 나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응? 나비가 왜 저러지?”

에이든도 나비의 행동에 놀라했다. 평소에 저런 일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로서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동물에게 완전히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속상해! 대체 왜? 왜 나만 미워하는데!’

억울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사이 한참 고민하던 에이든이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조금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눈동자만 굴려 나를 쳐다봤다.

“설마 그건가? 카르디옌의 체취가 치즈 너한테 배여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요?”

“드래곤이잖아. 짐승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먹이사슬에서 가장 위에 있는 드래곤.”

…그럼 내가 드래곤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내 몸에 드래곤의 냄새가 배여서 내가 드래곤 같이 보이는 걸까? 그런 거라면 굉장히 억울하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건만.

너무도 울적해지는 상황이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도 절대 동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럼 이게 다 파이 때문이라는 거잖아?’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도망간 나비가 나를 빙 둘러서 내 옆에 있는 에이든에게 다가온다. 꼬리를 가볍게 휘날리는 나비가 에이든의 다리에 들러붙어 몸을 비벼댄다. 그러자 기분 좋게 웃는 그가 그 자리에 다시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가볍게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걸 보고 또 얼마나 부럽던지.

에이든의 손길을 느끼는 귀여운 아이가 좋다고 그르렁 거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보인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잘 쓰다듬어줄 수 있는데.

“그건 그렇고 그 열매라는 건 어디 있어요?”

“어, 그건 저쪽이야.”

나비의 머리와 등을 쓸어내리고 손바닥으로 꼬리가 이어진 엉덩이 위쪽을 톡톡 두드려주던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쥔 채로 나무의 몸통이 세워진 곳으로 걸어간다. 그 나무기둥을 지나가자 새빨갛고 동그란 무언가가 아래로 뻗어있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있었다.

“오, 얼음이 아니네요? 사과 같기도 하고? 말랑해 보이기도 하고? 신기하다.”

“우리는 저걸 신의 피라고 생각해. 백 년 동안 아주 미세한 입자가 모이고 모여서 단 하나의 열매를 생성해내지.”

“그럴듯해요.”

“저 열매에 대한 문건의 기록에는 당도 높은 복숭아의 맛을 가지고 있고 식감은 푸딩 같은 느낌이래. 나는 먹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푸딩! 복숭아 푸딩! 말만 들어도 맛있겠다.

“먹고 싶어?”

“…네?”

“저거 먹고 싶으면 말해. 줄 수 있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빨간 열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에이든의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저 한 열매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백 년이라며? 백 년간 길러온 열매를 나한테 덥석 주겠다는 저 남자, 제정신이야? 그것도 블랑 제국 사람도 아닌… 설마 그걸 빌미로……?

“무슨 꿍꿍이에요?”

“꿍꿍이라니?”

“제국의 귀한 열매를 아무에게나 줘도 되는 거예요? 타인에게 아무 대가없이 선뜻 주기에는 너무 과해서 아무래도 수상하네요.”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듯 에이든에게 물었다. 그러자 너무 티 나게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니까 더 수상하다.

“에이든. 설마 저 열매를 주는 조건으로 황후가 되어라, 뭐 이런 얘기는 아니겠지요?”

“그래주면 좋지. 사실… 저거 꽤 귀한 거니까. 새끼손톱만큼만 먹어도 칼에 찔린 상처가 금세 회복될 정도로 강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거든.”

“아니! 그런 귀한 걸 지금 나한테 주겠다는 거예요?”

“준다기보다… 황후가 되면 네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황후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만한 자리는 아니라고 배웠어요. 나는 그런 자리에 오르기에는 아주 부족한 사람이라고요.”

물론 에이든이 십 년간 나를 잊지 않고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에 기쁘긴 했다. 그 기다림이 쉽지는 않았을 건데. 황제인 것만 제외하면 혼인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다. 착하지, 다정하지, 순수하지, 나만 바라봐주지. 혼기가 지났을 텐데 아직도 혼자서 나를 기다릴 만큼 인내심도 대단하지.

…아, 설마 에이든 이 사람도 사생아가 막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너는 충분히 황후의 자리에 올라 모두의 추앙을 받을 수 있어. 내가 선택한 사람인데 내가 그 정도 보는 눈도 없을까 봐?”

나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뱉어내는 그가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내려다본다. 어찌나 단호한지, 그가 한 나라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근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 손에 꼭 쥐어진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가볍게 맞추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이 설레어 조금 뛰기도 했고.

“강요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나는 진지해. 네가 황후의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내려놓을 수도 있어. 나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그런…….”

“하지만 내 옆에서 나와 나란히 서야 하는 자리는 네가 아니면 안 돼. 이미 십 년 전부터 그 자리는 네 자리였어. 그러니까… 진지하게 고민해줄래?”

이렇게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청혼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파이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만약 파이와 연인관계로 진척되지 않았다면. 파이가 나와 하룻밤을 보내고 서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더라면. 그랬다면 더 쉬웠을 거다. 에이든의 이 진지한 사랑 고백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당신과 나란히 서겠다고 대꾸했을 것이다.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직은 파이와의 연인 놀이를 끝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비록 끝이 보이는 관계지만… 그래도 아직은 파이의 곁에 머무는 게 더 좋았다.

“에이든이 나를 십 년간 기다려줬다는 거, 잘 알아요. 알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왜? 카르디옌 때문이야?”

어휴……. 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만 했는데 어쩜 저렇게 정곡을 찌르는 건지.

“아, 아니라고는 말 못 해요. 나는 아직… 이제 갓 성인이 되었고 이십 년간 파이와 함께 지낸 정이 있어요. 그걸 완전히 끊어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끊어지기는 할까? 누군가 억지로 끊어내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처럼 욱신거려서 어깨가 절로 오그라들었다.

늘 파이가 함께 있어서 몰랐다. 특히 요즘 들어 혼자만의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 파이 때문에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적도 있긴 했지만.

파이가 나와 연인이 되겠다고 했던 건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내가 좋은 신랑감을 만나 혼인하겠다고 결정짓는 그 날이 바로 그와 내가 헤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헤어진다는 생각 하나에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파올 줄 몰랐다.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려는 이 통증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

그에게 매번 차이기만 하던 그때의 통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런 아픔이다. 늘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했지, 헤어지게 되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지 않아서 더 그랬다. 아마… 이렇게 괴로워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파이와 헤어지는 걸 결정하는 건 나예요. 파이를 떠날 결심을 먼저 하고, 서서히 떨어질 생각이에요. 그래야 덜 아플 테니까.”

“…꼭 연인 사이처럼 보이는군.”

조금 까칠하게 대꾸하는 에이든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무, 무슨……?”

“이렇게까지 눈물을 맺혀가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인데, 마치 떨어지면 앞으로 영영 보지 않을 사이처럼 느껴져. 그리고…….”

나와 마주 보고 선 에이든이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연애에 무지한 나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마.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끼리는 그런 야한 짓을 하지 않아. 서로 떨어져서는 죽고 못 사는 그런 사이처럼 굴지 않는다고.”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파이와 내가 그런 사이로 보이는 걸까?

“…그거야… 내게 유일한 가족이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어렸을 때도, 커가면서도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늘 파이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나는 그게 당연한 거로 여겼지. 아마 지금까지 그가 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을 다 합치면 하루도 채 안 될 거다.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머물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만큼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눈빛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마 가족보다 더한 유대감을 형성해서 파이와 내가 완전히 남남처럼 갈라서기는 어려울 거다.

우리 둘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도 온전히 내 선택이고 내 결정이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한 것뿐이니까.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도,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비록 가짜 연애 중이긴 하지만 그건 나와 파이만의 비밀이다. 어쨌든 누가 봐도 우리는 연인 사이처럼 행동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맞아요. 네. 나는 지금 파이하고 연애 중이라고요. 제안은 파이가 했지만 결정은 내가 했어요. 하지만 파이는 나와 혼인해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드래곤은 혼인 따위와 먼 존재지. 그런 걸로 스스로를 구속할 그런 성격도 아니고.”

“잘 아시네요?”

“우리 블랑 제국의 역사가 카르디옌과 함께 컸다고 해도 무방해. 카르디옌도 우리 블랑 제국도 태초부터 존재했으니까.”

“알아요. 수업시간에 배웠으니까요.”

“카르디옌이 그렇게 좋아?”

“…네?”

벌써 세 번째 정곡을 찔러서 나도 모르게 되물으며 당황했다. 에이든은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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