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사실 나 너한테 칭찬받고 싶은 게 있어. 네가 입학했던 그 아카데미에서 무사히 졸업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쓴 사람이 나야.”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너를 보호하기 위해 아카데미에다가 우리 쪽 사람을 몇 명 심어놨었거든.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곤란해지니까.”
“왜 곤란해지는데요?”
“그건 비밀.”
…이 여우 같은 황제가, 꼭 내가 묻는 말은 다 비밀이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에이든에게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전 그런 거 잘 몰랐는데… 언제부터 그랬던 거예요?”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얼마 뒤부터였으니까.”
“…그럼 설마, 아카데미에 다니던 나를 몰래 지켜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 아카데미가 워낙 출입이 엄중하다보니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블랑 제국에서 교사 몇 명하고 학생 일곱 명을 투입하기도 했고.”
어쩐지. 아카데미에서 날 보는 눈들이 너무 많다 싶더라니. 워낙 내가 지나갈 때마다 꽤 많은 시선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 집요한 시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질 않아서 꼭 감시하는 것 같아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아카데미에서 수상하게 보인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다방면으로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고.
혼자 막 심각한 얼굴을 하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고 있는 나를 향해 에이든이 가볍게 웃는다. 그리고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설명했다.
“너와 가깝던 사이는 아니야. 아마 얼굴도 모를걸? 뭐,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얘기해도 상관없을 거라 여겨서 솔직히 털어놓은 거야. 그러니까 나도 선물을 줘.”
뜬금없이 선물타령을 하는 에이든이 갑자기 내게 한쪽 뺨을 들이밀더니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볼 뽀뽀를 해달라는 건가? 저러다가 파이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거면서.
그래서 나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중얼거렸다.
“파이한테 이길 자신 있어요? 파이랑 싸워서 이기면 볼에 뽀뽀는 해드릴게.”
그러자 입술 끝을 축 내리면서 울상을 지어보이는 에이든이 억울한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십 년 전에는 잘만 해주더니. 나는 치즈에 대한 마음이 그때와 변한 것이 없건만 너는 너무 변했어. 정말 너무한데?”
“그때는 어렸잖아요! 애가 뭘 알고 했겠어? 그렇게 따지면 저도 에이든에게 한결같다고요.”
“정말? 어, 어떤 의미로 한결같은 건데?”
“에이든은 정말 그냥 잘생긴 꽃미남 아저씨거든요.”
잔뜩 기대하던 에이든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테이블에 이마를 쾅 박은 채로 훌쩍거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달콤 상큼한 딸기를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마지막 딸기까지 야무지게 위장에 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부른 배를 손바닥으로 토닥거렸다.
아아, 너무 맛있었어. 행복해.
“잘 먹었어요, 에이든. 정말 마음에 드는 식사였어요. 저녁도 기대해도 될까요?”
“…뽀뽀해주면 생각해볼게.”
가만히 보면 에이든도 은근 집요하다. 파이처럼 무작정 밀어붙이진 않아서 다행이야.
“뽀뽀쯤이야 뭐, 닳는 건도 아니라서 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뽀뽀하다가 파이한테 걸려도 난 몰라요?”
“네가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면 되겠지.”
라고 말하면서 다시 상체를 일으켜 앉은 에이든이 왼쪽 볼을 내게 들이밀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걸 보니 정말 속상해서 눈물이 핑 돌았나보다. 하여간 무슨 황제가 이렇게 유약하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앞으로 숙이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의 매끈한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해줬다.
“됐죠?”
“기왕이면 입술에도…….”
“아! 배도 부르니 이제 꽃이나 좀 구경 해야겠네요!”
저, 저 양심 없는 황제 같으니. 황제나 드래곤이나 욕심은 끝도 없는 것 같다.
나는 못 들은 척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에 예쁘게 피어난 꽃밭 앞에 쪼그려 앉아 눈에 열심히 담았다. 특히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얼음꽃을 집중해서 탐색했다.
꽃모양이 동글동글한 걸 보니 작약 같기도 하고. 장미보다 더 꽃잎이 많은데 이 얇은 잎이 다 얼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닿기만 해도 다 부서질 것 같아서 차마 건드리지는 못하겠다. 그 주위에는 또렷한 색감과 모양의 갖가지 꽃들이 가득하긴 했지만 나는 그 얼음꽃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그림으로 그려놔야 할까 봐. 그럼 나중에 더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치즈.”
“응?”
“황궁의 지하에는 얼음나무도 있어. 한번 보러 갈래?”
“와! 정말요? 갈래갈래!”
한참동안 내가 꽃구경하는 걸 지켜보던 에이든의 말에 나는 좋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내게 다가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얼음 나무에도 꽃이 있어요?”
“꽃은 아니지만, 거기에 열매가 하나 있지.”
“열매?”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야. 백 년에 한번 열리는 열매지. 지금 딱 그 백 년이 와서 얼마 전에 열매가 완벽하게 맺혔거든.”
아니 그런 진귀한 장면을 내게 보여주겠다니!
나는 잔뜩 부푼 가슴을 안고 백 년에 한번 열린다는 그 열매를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얼음으로 되어있는 열매일까? 얼음나무에 맺힌 열매라. 궁금해!
그리고 에이든과 함께 정원을 벗어나 황궁 지하로 향했다. 가는 내내 보이는 내부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드는 건 덤.
확실히 평범한 곳과는 다르다. 얼음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다니. 그러고 보니 가끔 에이든의 등에 나타나는 그 날개도 얼음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전부 다 어디 가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이긴 하다. 전체적으로 하얀 도화지처럼 순백색이기도 하다가 하늘색에 약간 회색이 섞인 느낌이기도 하고.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의 밝은 느낌에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있어서 건조하지도 눅눅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면서 뭔가… 신선한 야채가 된 느낌이다.
“이쪽이야.”
아까 중앙 홀이라는 곳을 지나 아래로 2층 정도 더 내려온 뒤, 에이든이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얼음으로 된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소리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중에 파이한테도 내 방을 얼음으로 만들어달라고 할까? 적당히 시원하고 예쁘기도 해서 탐나네.
“아, 맞다. 안에 동물도 한 마리 있어. 보고 놀라지 말라고.”
“…동물, 이요?”
“응. 고양이인데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라 보통 고양이는 아니지만.”
고양이!
내가 동물 중에서 가장 예뻐하는 동물이 바로 고양이였다. 도도하고 무심하면서도 콧대 높은 아가씨의 성향을 가진 매력덩어리! 액체같이 유연한 몸짓에 곧게 뻗은 꼬리 끝을 살랑살랑 흔들 때가 최고지.
하지만 고양이들이 나를 싫어해서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하악질을 해대면서 막 공격태세를 갖추거나 눈만 마주쳐도 도망을 쳤다.
그래서 얼마나 슬펐다고. 나는 엄청 귀여워해 줄 의향이 다분한데! 왜 날 싫어하는 거야?
“일단 내 손을 꼭 잡아. 혹시 모르니까.”
“왜요?”
“원래 여기는 황족 외 출입금지구역이야. 황족이 아닌 네가 방문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바닥이 깨질 수도 있어서.”
“이… 이건 깨지지 않는다면서요!”
“신이 내려주신 신성한 곳이기도 해서.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발을 딛게 되면 혹시 모르지.”
“…지금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웃겨 진짜? 나보다 당신이 더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아닌가? 설마 내가 저 엉큼한 에이든보다 마음이 더럽다는 거야? 인정할 수 없어!
“아, 알았어요. 진짜 바닥이 깨지기라도 하면 에이든이 잡아줘요.”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 무섭지만 얼음나무도 고양이도 궁금하고.
나는 내 앞에 내민 에이든의 손을 꽉 쥐고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열린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디뎠다. 그러자 복도보다 더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공기가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정면의 거대한 나무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그냥 작은 나무인줄 알았는데…….”
높고 커다란 나무의 가지가 천장을 타고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뻗어 나와 있었다. 정교한 조각물처럼 세워진 나무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컸다. 몸통도 한 팔에 감싸지지 않을 정도로 굵고 가지도 무수히 많아 화려하게 보인다. 게다가 사방에서 밝히는 빛에 반사가 되어서 나뭇잎이 하나 없는데도 풍성하게 보였다.
여기 진짜 현실 맞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황홀한 장관에 입이 떡 벌어진 채 열심히 눈에 담는 사이, 나뭇가지 위에서 뭔가가 움직여서 움찔 놀랐다.
‘어, 얼음조각이 움직여! 움직이는데… 엇? 꼬리다!’
투명하고 기다란 꼬리가 허공에 뻗어져 올라가더니 끄트머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 꼬리를 따라 내려오자 얼음나무의 가지위에 보호색을 띠고 있는 얼음 고양이가 얌전히 엎드려있었다.
…저게 고양이라고?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데?
덩치가 성체 고양이의 두 배는 되어 보인다. 웬만한 대형견 몸통과 비슷하다. 개처럼 투박하진 않고 우아하게 잘 빠져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몸 전체가 얼음이라 마치 정교한 유리공예 같다.
그런데 쟤, 지금 나 보고 있는 거 맞지?
“눈이, 있어요? 눈도 보여요? 쟤?”
“보이진 않을걸? 유일하게 얼음으로 만든 것들 중에서 살아 움직이기는 해도 신이 만드는 피조물 같진 않지.”
“보이지 않는데 왜 눈이 마주치는 기분일까요……?”
“아주 예민한 아이거든.”
마치 우리 대화를 듣고 있다는 듯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기까지.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묘기 부리듯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크게 켜고 하품까지 한다. 행동은 진짜 고양이와 다를 게 없었다.
“이름은 있어요?”
“이름? ‘나비’라고 불러”
…고리타분해.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고양이한테 나비라고 하냐고.
그런데 정말 고양이 이름이 나비인지 에이든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귀를 바짝 세운다.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바닥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안착했다.
오, 떨어지는데 유리처럼 와장창 깨질 줄 알았어. 깜짝 놀랐네.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은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나비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나비라고 했지? 이리 오련?”
일반적인 고양이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쟤는 날 미워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지금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야.
나비도 그 자리에 상체를 살짝 숙여서 허리를 둥글게 말더니 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 좌우로 고개를 움직인다. 그렇게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꼬리를 가볍게 살랑거리면서 한발씩 천천히 다가왔다.
오, 온다!
한껏 긴장하고 눈이 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민하다고 하니까 조금만 분위기가 달라져도 도망칠 것 같아서 더 조심했다.
곧 고개만 내밀면 손가락 끝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온 나비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에이든도 그걸 느꼈는지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나비에게 손을 뻗어 익숙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