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애칭…….
그건 또 그렇다. 나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이긴 하지. 솔직히 어린 나이에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가 너무 어렵긴 했다. 그래서 편하게 파이라고 멋대로 부른 거였고. 파이는 또 대수롭지 않게 그게 자기 이름인 것처럼 반응을 보였으니까.
“그럼 파이가 투입된다는 그 전투라는 거, 자세하게 설명…….”
“얘기하지 말래. 나도 별로 얘기해주고 싶지 않아. 너는 그냥 여기서 편안하게 놀고 있으면 돼. 뭐 아무튼 여행 왔다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놀고먹어.”
지금 전쟁이 곧 시작될 비상시국인데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으라니. 남들은 죽을 각오로 전쟁에 임하고 있을 텐데. 그러다가 또 이게 여행이라 생각하면 이만한 여행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다. 남의 제국, 그것도 황궁을 여행으로 오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호기롭게 샌드위치를 한입 더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었다. 바로 에이든이 건네주는 오렌지 주스를 꼴깍꼴깍 마셔서 목구멍 뒤로 넘기고 입맛을 다셨다.
“에이든은 그 전쟁하는 곳 안 가요?”
“나? 음… 원래 황제는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지. 카르디옌이 내 몫의 열 배는 해줄 테니까.”
“설마… 우리 파이한테 다 막 떠넘기는 건 아니죠? 그 전투라는 거.”
그러자 뜨끔했는지 에이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차마 내 눈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아하니… 내 생각이 맞는 거 같다.
파이가 많이 다치면 어떡하지?
“드래곤은…….”
행여 파이가 어떻게 될까 봐 가슴이 저릿해져서 시무룩해하고 있자,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연다. 그래서 나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귀를 활짝 열었다.
“드래곤은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아예 다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십 년 전에도 에이든 때문에 파이가 다쳤던 걸 기억한단 말이에요.”
“…내가 더 다쳤어. 내가 더 많이 아팠는데?”
“먼저 시비건 쪽이 누구더라? 그러게 누가 가만히 있는 드래곤한테 시비를 걸어요?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바, 바보라니…….”
매우 충격적이라는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에이든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굉장히 섬세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긴 하다. 그러다가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혹시나 우리 대화를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저 멀리 서 있… 으윽, 남자도 저 옷을 입고 있다니. 아무리 전통의상이라고 해도 저건 좀…….
“치즈. 그거 알아?
“뭐요?”
“원래 드래곤은 중립이야.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는 유일한 종족이 드래곤인데, 카르디옌이 우리 블랑 제국을 돕겠다고 한 게 딱 3년 전이야. 왜일 거라 생각해?”
“음…….”
머리를 열심히 데굴데굴 굴려가며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먹어 배를 채웠다. 아카데미에서 배웠을 때 블랑 제국과 그 옆의 루즈 제국 사이가 안 좋은 건 유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전쟁이 꽤 자주 발발한다고.
그러고 보니 귀찮은 걸 매우 싫어하는 파이가 어느 한쪽 편에 선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또 남 좋을 일 하는 파이가 아닌데. 워낙 자기밖에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남자라 이득 없는 도움 따위 할 성격은 못 된다. 그걸 내가 가장 잘 안다. 최근에… 음, 최, 최근에 나와 첫날밤을 지낸 이후로는 좀 변한 것 같긴 하지만.
아, 아, 아무튼 파이는 이유 없이 누굴 돕진 않아. 그런데 왜 일까?
“잘 모르겠는데요?”
“치즈 너 때문이야.”
“…나요?”
“그래.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파이가 나 때문에, 그것도 내가 아카데미 입학한 뒤에 블랑 제국과 손을 잡았다고? 왜? 인간 나부랭이들이야 어찌되든 자기 알바 아니고, 그에게 개미만도 못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데?
파이의 곁에서 파이만 탐색하고 살아온 지 이십 년. 내가 아는 그라면 절대 자신의 영역 외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에이든을 향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맛없는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블랑 제국을 돕는 거 하고 저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모르겠다고?”
“네. 설명이 부족해요. 파이한테는 인간세계야 어찌 되든 상관없고, 자기와 관련 없는 쪽이라면 더욱더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파이가 왜 나 때문에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어요?”
그러자 에이든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풋, 하고 작게 웃는다. 그래서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면서 매너가 왜 이 모양이야? 나는 진지하게 말을 한 건데 비웃는 건가? 내가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왜 그래요? 기분 나쁘게.”
“아, 미안. 흠흠, 다른 게 아니고 어쩐지… 카르디옌이 불쌍하게 보이네. 픕, 크흠흠.”
눈을 내리깔고 표정을 갈무리하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다만. 자꾸만 씰룩거리는 얼굴과 함께 그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얄밉다.
“파이가 왜 불쌍해요?”
“불쌍하지. 세상에서 가장 약해빠진 인간 하나가 행여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드래곤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희귀하고 재미있는 일을 또 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싶다.”
어쩐지 에이든이 파이를 놀리는 것 같아서 내가 더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의미예요, 그거?”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카르디옌이 바보라는 사실이지.”
“왜 파이가 바보예요?”
“물론 나한테는 그게 더 이득이라 나쁘진 않아.”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꾸 내 물음을 회피하려는 그가 매우 얄미워진다.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심통을 부렸다.
“파이한테 다 일러바칠까보다.”
“어허. 하여간 카르디옌에게 못된 것만 배우다니. 야채 샌드위치 하나 더 만들어줄까 보다.”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코를 훌쩍거리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맛없는 건 하나로도 족해!
“일단 어서 먹어. 그거 다 먹으면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게 해줄게.”
“오! 진짜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나는 내 앞에 내려놓은 야채 샌드위치가 너무 맛없어서 이걸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확 날리고 다시 집어서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리고 눈으로 고기볶음과 치즈가루, 빨갛게 잘 익어서 말랑한 식감을 자랑하는 딸기들을 점찍어놓았다.
빨리. 빨리.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면 곤란해.”
볼이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입안 가득 집어넣은 채라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에이든이 손을 뻗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엄지로 내 입술에 묻은 샐러드 소스를 닦아내 줬다.
파이랑 똑같은 행동에 아주 조금 심장이 두근거렸다. 또 에이든이 자신의 엄지에 묻은 소스를 혀로 핥아먹는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 진짜 파이한테 뭐 배웠나? 파이 따라쟁이네!
“소스는 맛있는 것 같은데. 야채하고도 좀 친해지고 그래야지. 우선 건강이 최고잖아?”
“지금도 충분히 건강하거든요.”
“하지만 나와 혼인해서 함께 지내면 굳이 이런 야채 따위를 골고루 먹지 않아도 돼. 네가 먹고 싶은 음식만 편식해서 마음껏 먹어도 된다? 어때? 솔깃하지?”
오, 진짜 솔깃할 이야기다. 맛있는 걸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 음흉한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 게다가 혼인을 빌미로 유혹을 하다니.
“그런 식으로 회유하려고 하지 마요.”
약간 심술이 나서 눈을 치뜨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에이든이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며 입맛을 다신다.
“회유라니.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
혼자 구시렁거리던 에이든이 다른 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선점해놨던 볶은 고기를 가득 집어넣고 그 위에 치즈가루를 왕창 뿌려주었다.
공기를 타고 흘러와 내 비강을 자극하는 고소함과 매콤한 향기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남은 야채 샌드위치를 한입에 욱여넣고 에이든을 향해 어서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고기 샌드위치 위에 잘게 다져놓은 양상추를 조금만 더 얹어주고 내 손에 쥐여주었다.
“꼭 다람쥐 같아. 귀여워, 치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손에 맛좋은 고기 샌드위치를 쥐고 오렌지 주스로 입을 헹궜다. 그리고 비장한 마음으로 고기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과 약간 매우면서도 달달한 양념의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처음 흘러왔던 향보다 맛이 기가 막히다.
“정말 맛있어요! 최고야!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
“사왔어. 아까 오전에 카르디옌이 직접 사온 거야.”
“어쩐지! 내 입맛에 딱 맞더라니!”
역시 파이야! 역시 파이는 날 너무 잘 알아! 혼잣말로 파이를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샌드위치를 후딱 해치우고 딸기로 입가심을 했다.
하아, 살살 녹는다, 녹아.
“그래서 우리가 아까 어디까지 얘기하다 말았지?”
나는 한입 먹을 때마다 파이의 칭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게 꽤나 거슬렸는지 에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민다.
그러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음… 에이든이 파이가 불쌍하다고 그랬어요.”
“아, 그랬지. 그건 나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해둬야겠어.”
“…지금 누구 놀려요?”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아니요.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치즈 너는 왜 카르디옌에게 집착해? 어차피 카르디옌은 너와 혼인할 생각도 없다고 하는데. 왜 끝이 보이는 관계를 딱 잘라 거부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입에 문 딸기를 씹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정곡이 찔려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에이든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디옌과의 관계, 그거 네가 허락한 거야? 언제까지 그런 관계를 유지하려고? 어차피 상처받는 건 카르디옌이 아니라 치즈 너야. 미래가 훤히 보이는데도 왜 끊어내지 못하는지 궁금하네.”
“…그건, 그건…….”
사실 언젠가는 파이의 마음이 변하길 바라고 있어서. 긴 시간이 흐르기 전에, 파이의 그 심장에 나에 대한 진심이라는 꽃이 피어나길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물론 가망이 없음을 피부로 느끼고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서 포기하지 못하는 채다.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기는 해.
만약 파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는 애써 착잡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딸기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그러게요.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 느끼고 있기는 해요.”
“아, 그건 나도 인정. 인생이 쉽지만은 않지. 상대방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니까. 그럼 하나 더, 나는 어떻게 생각해?”
“…응?”
에이든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조금 놀랐다. 그러자 수줍다는 듯 양 볼을 다홍빛으로 물들인다. 곧 그가 손가락에 감기지도 않는 제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