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나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어이없다는 듯 썩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싱긋 웃어 보이는 에이든이 고개를 숙여와 반대쪽 뺨에 쪽, 짧은 뽀뽀를 해왔다. 가벼운 접촉인데도 어딘지 거부반응이 일어나 미간을 확 좁히는 사이에 에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르디옌이 왜 널 놔두지 못해서 안달인지 이해가 될 정도로 군침이 도는 체취야.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나는 먹을 게 아니라고요.”
“알아. 아무튼 그래서 곁에 두고 싶어. 치즈 네가 내 사람이길 원해.”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만 방심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래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에이든의 손을 조심히 밀어내면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내게서 떨어져 나간 그가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는다.
나 역시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짐승처럼 덮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몰라. 파이한테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때?”
“네? 뭐, 뭐가요?”
“듣기로는 아직 카르디옌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던데.”
“파이가… 그래요? 파이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파이가 정말 그렇게 말한 걸까? 그렇다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상천데.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려서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사이에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어쨌든 혼인할 사이는 아니라고 하던데? 뭐… 음, 그랬어.”
심장이 쩍,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그렇게 확인당하고 나니 어쩐지 울컥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내게 청혼을 한 타인의 입으로 듣게 되니까 심장이 짓이겨지는 통증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정말 파이가, 나와 연애를 하자는 것이… 내가 예상했던 그런 뜻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나와의 정사가 제법 재미있어서. 사천 년간 여자라면 치를 떨었다던 그가 이제야 그 야한 밤을 보내는 게 즐거웠던 거지. 내 기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려고 나를 이용하려는 것.
나는 이를 악물면서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꾹 참았다. 그동안 그런 게 아닐까 의심은 했지만 아니기를 바랐는데. 아니기를 믿었는데!
분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던 찰나. 방문이 쿵쿵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와 에이든이 동시에 방문을 쳐다봤지만, 누군가 들어오진 않았다. 잠시 방문을 노려보던 에이든이 가볍게 손짓하자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무언가 안으로 휙 들어온다.
…나비?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는 새하얀 나비가 내 쪽으로 향해 날아온다. 그것이 내 바로 앞에 우뚝 멈춰서더니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편지다. 파이가 보내는 편지.
가끔 아카데미에 있을 때 파이가 눈빛 대신 잔소리를 하기 위해 보내왔던 나비편지와 똑같다. 그래서 나는 방금까지 침울하던 기분을 유지하며 조금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 꾸깃꾸깃 접어놓은 새하얀 편지에 파이의 익숙한 필체가 그림처럼 예쁘게 적혀있었다.
치즈에게.
생각보다 일이 급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 전투에 바로 투입될지도 모르겠다. 금방 해결하고 돌아갈 테니까 굶지는 말고 식사 꼬박꼬박 챙겨 먹어. 에이든을 하인처럼 부려먹어도 괜찮아. 대신 그 쓰레기 새끼가 무슨 말을 하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멋대로 손대면 물어버려도 좋아. 모쪼록 무탈하게 조심히 지내고 있길 바라.
너의 정인, 파이가.
너의 정인…….
마지막 글귀에 쓰여 있는 단어를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나 손등으로 손을 문질렀다. 재차 확인을 해봐도 확실히 그 단어가 맞았다.
정인. 정인이라니. 정인이래. 파이가… 파이가 파이 손으로 정인이라고 쓴 거야?
다시 그 단어를 눈에 담아 확인하자 괜히 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조금 원망스럽던 감정이 쑤욱 내려가 버렸다. 비록 가짜지만 연인을 향한 진심이 잘게 부스러져 글귀에 그대로 녹아내려 있었다. 그게 너무 애틋했다. 예전에는 그냥 잔소리라고만 여겼던 내용들인데. 지금은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더 그랬다.
아이, 정말 방심도 못 하게 한다니까? 이러면 내가 또 미워할 수가 없잖아! 파이는 요망해, 정말!
“편지야? 누가 보낸 거야? 설마… 카르디옌 그놈이 보낸 편지는 아니겠지?”
에이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휙 들어 올리면서 새하얀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나는 빙긋 웃어주면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주었다.
“응. 파이가 보낸 편지예요.”
“…그놈이 편지를 다 보내? 말도 안 돼. 이리 줘봐!”
내 손에 든 편지를 냅다 낚아채간 에이든이 편지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린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래서 나 역시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재빨리 편지를 회수해 품에 꼭 안으며 투덜거렸다.
“남의 개인적인 편지는 함부로 보는 게 아니에요. 매너가 없네! 어서 가서 식사나 챙겨다 줘요! 나 곧 배고파질 예정이에요!”
진짜 하인처럼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나는 지금 여기 손님으로 와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손님인 내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잖아?
그랬더니 에이든이 아까 나처럼 침울하게 그늘진 얼굴로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를 벗어난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가버렸다.
방문 사이로 사라진 에이든의 뒷모습이 축 늘어져있는 게 신경 쓰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 다시 편지를 내려다보면서 글귀 하나하나를 망막에 열심히 새겨 넣었다. 가슴이 벅차서 기쁜 감정에 날개가 달려 훨훨 날아가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곧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에이든이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도 그 편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예전에는 정말 잔소리만 가득 담겨있어서 질색했는데. 그놈의 ‘정인’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용서를 해주면 곤란하다. 어쨌든 파이가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혼인을 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설레는 건 설레는 거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러니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 일단 파이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그동안 에이든과의 관계를 이용해 파이와의 정리가 가능할 수 있는지 천천히 가늠을 해봐야겠다. 어찌되었든 에이든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다가 종이 안에 빨려 들어가겠어.”
“그보다 잠옷 차림으로 가도 돼요?”
나는 원피스 잠옷 밑단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팔랑이면서 물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아직도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 편하게 있어도 되니까. 아! 그럼 베숄린을 줄까?”
“베숄린?”
처음 듣는 단어라 뭔가 싶었더니 에이든이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리고는 어떤 여자를 끌고 돌아왔다.
“이 옷이야. 블랑 제국의 황궁 시녀들이 입는 의복.”
“어머!”
에이든이 데려온 여자를 보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뒤돌아섰다.
‘저런 게 무슨 옷이야? 말도 안 돼!’
그냥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커튼 천을 딱 한 겹만 몸에 두른 느낌이다. 피부는 물론이고 몸매가 전부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가슴의 유두 색이 무슨 색인지 음모의 숱이 얼마나 되는지도 어렴풋이 다 보인다. 하늘하늘 얇은 슬립만 입은 느낌. 아무튼 내 잠옷보다 훨씬 더 야했다.
속옷은? 가슴 따위 가리지 않는 거야?!
“치즈. 뭘 부끄러워해?”
“어, 어떻게 그런 옷을 입고 다녀요? 남 보기 부끄럽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데 혼자 민망해해? 황궁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볼 사람도 나밖에 없어. 특히나 여긴 황제궁이라 더 그렇고.”
“…그, 그럼 그건가? 하렘 같은 거?”
“어허. 그런 거 아니래도. 베숄린은 우리 블랑 제국의 전통의상이야. 과거에는 남녀노소 베숄린을 입고 생활했다고.”
에이든이 베숄린을 입은 여자 치맛자락을 잡아 펄럭거리면서 투덜거린다. 그리고 여자는 두 손을 다소곳 모아서 꼭 잡은 채로 나와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눈앞에 황제가 있어서 그런지 여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질려가는 것 같았다.
에이든이 미치광이라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
그래서 나는 입맛을 다시며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그냥 이 옷을 입겠어요. 잠옷이지만 여기 옷보다는 나을 것 같네요.”
“…이거 진짜 편한데?”
그가 아쉬워하면서 몸매가 적나라하게 비치는 여자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빙 돌려서 뒤태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또 생판 모르는 여자의 동그란 엉덩이를 내 눈에 담게 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 그러면 파이한테 이를 거예요?”
라는 한마디에 에이든이 큰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럼 식사하러 갈까?”
파이가 무섭긴 한지 재빨리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와 함께 방을 나서면서도 신기한 얼음벽을 구경하며 휘둥그레진 눈을 열심히 굴렸다. 그렇게 처음 보는 복도를 지나 야외로 이어진 또 다른 정원으로 나가기에 깜짝 놀랐다.
“식사하러 간다며 왜 밖이에요?”
“어제 정원구경하고 싶다고 했잖아. 여기는 내 개인 공간이라 편하게 식사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해보니 그랬다. 정원 구경하고 싶다고 파이를 졸랐었는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종일 이런저런 짓만…….
사실 그래. 좋기는 했어. 하지만 정말 파이가 내 몸만 원하는 걸까? 아니길 바라는데… 가면 갈수록 그 사실이 더욱더 확고해지는 느낌이라 괴로워진다.
나는 어깨에 힘을 쭉 빼면서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오! 예뻐요!”
밖에서 봤었던 얼음꽃은 물론이고 주위에 오색 빛이 가득한 꽃들이 즐비해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어도 황궁의 얼음과 저 얼음꽃이 조금도 녹지 않아서 굉장히 신기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정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에 나무 테이블 하나가 떡하니 놓여 있다. 그 위에 군침이 돌 만큼 맛있는 핫도그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크, 잘 먹겠습니다!”
시각과 후각과 미각의 즐거움을 기쁘게 맞이하겠다는 의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식사를 시작했다. 했는데… 슬프게도 나는 그 음식에 손도 대지 못했다.
에이든이 파이에 빙의한 것처럼 직접 작은 빵의 가운데를 칼로 갈랐다. 그러더니 맛없어 보이는 야채들로만 이것저것 골고루 올려주면서 내게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싫어하는 건데……!”
“카르디옌이 골고루 먹이랬어. 어릴 때부터 편식이 심하고 단 것만 좋아한다고 걱정이래.”
“…카르디옌 말고 파이라고 하면 안돼요?”
“왜?”
“뭔가, 카르디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 같아요. 파이 같지 않아서… 낯설다고 해야 하나?”
나는 에이든이 준 야채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으며 울상을 지었다.
‘힝, 맛없어.’
그러자 에이든이 콧등을 찡긋거리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네가 부르는 그놈의 애칭 따위를 내가 부르면 웃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