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어내면서 키스를 퍼부었다. 덕분에 또 동이 틀 때까지 기운이 넘치는 파이에게 시달려야했다. 그리고 거의 기절 수준의 잠에 빠져들고 뒤늦게 부스스한 몰골로 잠과 헤어진 것이 바로 지금이다.
“우리 치즈 늦잠꾸러기네?”
그것도 천연덕스럽게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 에이든의 목소리에 의해서.
나는 파이가 아닌 낯선 이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꺅!”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바짝 끌어모아 몸부터 가렸다. 다행인지 익숙한 잠옷을 입은 채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조금 안도하긴 했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몸을 섞은 채로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찝찝함도 없는 걸 보니 씻겨준 것 같기도 하고. 대신 허리와 허벅지가 삐걱거렸지만.
“배고파? 식사 준비해줄까? 치즈에게는 하루 세끼 기본이라던데.”
“파이… 는요?”
휑한 침대에는 나뿐이었다. 옆에 있어야 할 파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반짝거리는 예쁜 은발을 찰랑거리는 에이든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쟁 준비가 잘 되어 가는지 상황을 좀 파악해야겠다고 나갔어. 네가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가는 길을 배웅이라도 해줬을 텐데 아쉽게 되었네?”
최근 며칠간 계속 함께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도 늘 곁을 지키던 파이가 없으니까 굉장히 낯설었다. 공간 자체가 낯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낯설다고? 아니 이건 좀… 웃기잖아? 아카데미 기숙사에 다닐 때도 무려 2년간 따로 지냈건만. 그 전에 같이 살 때도 잠을 재워주긴 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늘 혼자였단 말이다. 그런데 낯설다니. 같은 침대를 사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리자 에이든이 눈썹을 휙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순식간에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네. 어디 아파?”
“…아침부터 잘생긴 남자가 날 깨우러 와서 그래요.”
파이와는 다른 의미로 눈이 부신 남자에게 아직 눈곱도 떼지 못한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다.
게다가 이 남자는 내게 고백이 아닌 청혼까지 한 남자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더 막 민망해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목 아래까지 덮은 이불을 더 끌어올려 코 위를 덮고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시, 식사 하고 싶어요.”
그랬는데 에이든이 입꼬리와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면서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헛기침을 한다.
“식사라면… 나?”
촉촉하면서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내게 고정한 채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어냈다.
이 요망한 아저씨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는 콧등을 찡긋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살점이라도 발라주시게요? 몇 점 안 나올 것 같은데. 황제 살코기는 맛이 색다른가?”
농담으로 한 이야기에 붉게 달아올랐던 에이든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다. 너무 진담같이 들렸나?
“농담이에요. 에이든도 나한테 농담해서 나도 농담한 건데.”
“아… 그, 그래? 나는 또… 인육을 먹는 식인종도 있다는 얘길 들어서… 설마 네가 카르디옌처럼 인육을 먹나 싶었어. 놀랐잖아.”
의외로… 순진하다. 아니, 이거 꼭 그거 같잖아? 천연기념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는 순박한 청년. 무슨 황제라는 사람이 저래? 이러면 놀려주고 싶잖아!
나는 혀로 윗입술을 사악 핥고 눈가를 곱게 접어 가늘게 뜨면서 씨익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네요? 에이든의 살은 어떤 맛이려나? 파이한테 에이든을 통째로 구워달라고 하면…….”
그러자 이번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나, 날 먹기 전에 양념은 해줘야 덜 억울해. 죽는 거에 미련은 없지만… 기왕이면 후회 없이 보내주길 바라.”
잔뜩 경직된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꿋꿋이 제 할 말을 다 한다. 그래서 나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양념이요? 양념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랬더니 에이든이 창백해진 얼굴을 다시 발갛게 물들이고는 갑자기 입맛을 다시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 행동에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하긴 황제라도 사내이니 욕정이 있겠지. 드래곤도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데 인간이 다를 게 뭐 있겠어?
그래서 나는 모른 척 하품을 크게 하고 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크게 했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아, 삭신이야. 벌써부터 온몸이 다 찌뿌둥하고 쑤시고 그러네요. 큰일이야. 이러다가 제명에 살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깨 주물러줄게.”
마침 푸른 눈동자를 번뜩거리는 에이든이 침대 위로 성큼 올라탄다. 그러더니 바로 내 앞에 자리를 잡고는 두 팔을 뻗어서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쥔다. 그래서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면서 얼굴을 확 붉혔다.
‘너, 너무 가까워!’
자세히 봐도 여자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남자의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보고 있으려니 눈도 못 마주치겠다.
그리고 보통 어깨 주물러준다고 하면 뒤에서 하지 않아? 왜 앞인데?
“많이 굳어있네. 딱딱한 게 느껴질 정도야. 긴장 풀어, 치즈.”
손끝으로 뭉친 근육을 살짝 눌러보는 에이든이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긴장을 머금는다. 긴장을 풀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 같은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곧 마사지를 시작하는 바람에 얼굴을 붉힌 채 몸에 힘을 쭉 뺐다.
“으… 하, 시원해. 아! 잠깐, 거기 응… 힘주지 마요. 아파요.”
그 뒤로 말없이 목과 어깨부근의 근육을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러주는데 은근 시원하다. 파이만큼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마사지는 아니었지만 에이든도 꽤 섬세했다. 굳어있는 근육을 엄지로 꾹꾹 눌러가면서 손아귀의 힘으로 말랑하게 풀어주는 손길이 제법 익숙해 보이기도. 많이 해본 솜씨 같았다.
“에이든. 혹시 마사지가 주특기예요?”
“…아니?”
“너무 잘하는데요? 파이만큼. 윽, 하아… 얼얼하긴 해도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온몸이 녹진하게 흘러내려 퍼지는 기분이다. 달걀프라이가 될 것 같아.
흐느적거리면서 에이든의 어깨마사지를 받으며 좋다고 끙끙 앓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발라당 넘어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게 된 건,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이든의 표정이었다. 거친 숨을 헐떡거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까와 다르다. 어쩐지 살짝, 맛이 가버린 것 같아 보였다.
오, 이런. 음… 이건 좀 큰일인데?
나는 우선 아직 이불 속에 담겨있는 내 두 허벅지를 꼭 맞붙였다. 대충 에이든이 어떤 생각으로 나를 침대에 밀쳐놨는지 알 것 같아서.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불을 쥔 손을 더욱 꽉 말아서 잡고 팔뚝을 몸에 빈틈없이 붙여서 잔뜩 웅크렸다.
에이든이 두 팔로 내 어깨를 침대에 꾹 누르고 있는 채라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저 자유로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바빴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냐. 열심히 뇌를 바삐 움직이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다가 이것이 또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든은 십 년간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된 것을 잊지 않고 나를 데리러 왔다고 했지.
…미치광이에 남색가라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잘하면 파이에게서 떨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 무거운데…….”
내가 끙,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낑낑거리자 그가 움찔거리면서 내 어깨를 쥔 손을 풀었다. 하지만 그 손이 내 어깨 위를 짚는 바람에 제대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그냥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다. 바로 날 어떻게 할 줄 알았더니 그 어떤 이야기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질 않는다.
고민하는 걸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에이든?”
“…참아야지. 나는 짐승이 아니니까. 내게 먼저 매달리는 경우라면 모를까, 이렇게 불안해하는 너를 어떻게 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아직 이성이 남아있나 보다. 늘 내 앞에서 몸을 배배 꼬며 쑥스러워하던 그였는데. 이제 보니 남자다운 면이 있는 것 같아 굉장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지만 내게도 기회를 줘. 나는 진심으로 너를 내 곁에 두고 싶고, 너를 내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 그만큼 너를 은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줘.”
반려…….
그 진지한 고백에 가슴이 시려왔다. 내가 파이에게 너무나도 듣고 싶던 고백이었으니까.
에이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십 년 간 나를 잊지 않고 나만을 생각했다고 하는 이 남자. 그라면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에이든.”
“알아.”
“귀족도 아니고 왕족도 아닌, 보통 일반 평민이라고요. 그걸 알면서 나를 반려로 맞이하겠다는 거예요?”
“물론이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는 황족이다. 그것도 제국의 황제.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프리센 왕국의 국왕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 거지.
그런 사람이 나와 혼인을 해준단다. 파이는 고작 내게 연애 상대만 되어주겠다고 했었는데.
드래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파이는 인간들의 허례허식인 혼인 따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신랑감을 찾지 못하면 평생 이대로 연애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그때가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 시간일 거라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파이와 함께 연애를 시작하면서 점점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가끔 두통이 일기도 했다. 지금 파이와 나는 혼인서약 같은 것도 없이… 말 그대로 동거를 하는 것뿐이잖아? 구속 없이 자유로운 연애이긴 하지만 어느 한쪽의 마음이 식어버려 헤어지면 그만인 연인사이.
솔직히 그게 불안했다. 지금도 파이가 언제 내게서 등을 돌릴지 걱정이 되어서. 이젠 네가 질린다고 연애도 그만하자고 하면 어쩌나 싶어 하루하루 불안감이 조금씩 덧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이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한창 불타오를 시기니까 물불 안 가리고 매일같이 내게 덤벼들지만. 아무리 사이좋은 부부라도 애정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표정이 그래? 내 청혼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낯선 손길이 뺨에 살포시 내려앉아서 흠칫 놀랐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뜨거워진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 느낌이 뭔가 묘하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애매함.
“이 자세, 불편한데… 그만 좀 비켜주시면…….”
“대답부터 해야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널 확… 아, 아니, 내 청혼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데?”
“나야말로 묻고 싶어요. 블랑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평민인 저와 혼인을 하고 싶은 건데요?”
“맛있어 보여서.”
…식인종은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