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우아한 모란꽃이 피어난 것 같은 장면에 가슴이 다 세차게 뛰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랑거리는 날개를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파이에게 제지당했다.
[보기엔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저 날개를 만지면 전신이 얼어버릴 거다. 마력이거든.]
[마력?]
[블랑 제국의 황족들에게만 내려오는 저들의 강력한 무기야.]
자세히 보니 남자의 은발보다 날개가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게다가 깃털처럼 보이는 것들이 전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뾰족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림으로만 봤던 오로라보다 더 아름다웠다.
마, 만지고 싶어! 하지만 전신이 얼어버린다고 했으니 참아야 했다. 아픈 건 싫으니까.
곧 남자가 눈가에 맺혔던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아내면서 다시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무 귀엽다, 너. 나한테 시집올래?]
남자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파이는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며 잇새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헛소리 지껄일 생각이면 꺼져. 쓰레기 새끼.]
라고 공격했으나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시집오면 제국의 황후가 될 수 있어. 우리 블랑 제국은 드래곤의 레어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근사하고 살기 좋을 거다.]
[거기는 동굴이 아니에요?]
[물론이지. 우리 제국의 황궁은 얼음으로 된 성이라고. 얼마나 멋진데. 보자마자 아마 한눈에 반할지도?]
[우와, 정말이요?]
얼음으로 된 성이라는 말에, 나는 두 눈을 더욱 더 빛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응. 진짜야.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지 않을래?]
[파이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어. 저어얼대! 안 돼.]
[그럼 나도 저어어얼대! 안 가요.]
우선 내겐 파이가 전부였으니까. 그러자 남자가 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참 많은 남자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시 진정하고 말을 꺼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일단 아까 그 말들 취소하고 다시. 그래서 몇 살?]
[열 살이에요.]
[오, 앞으로 십년이면 성인이 되는군. 아까도 말했듯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네가 나의 반려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반려가 뭔데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할 사람을 뜻하지.]
[그런데 왜 나예요?]
[너하고 같이 살면 꽤 재미있을 것 같거든.]
[나도 아저씨랑 있으면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거 꽤 상처라고.]
[그럼 뭐라고 불러요?]
[오라버니, 라고 부르는 거다.]
[오라버니?]
내 말에 남자가 또 혼자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몸을 이리저리 꼬아댔다. 뭔가 뱀이 똬리를 트는 것 같기도 하고.
[흠흠, 아무튼 나를 선택하면 저 무식하고 섬세하지 못한 드래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드래곤은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놈들이라.]
말하면서 파이를 노려보던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딘지 원망이 섞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이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인가?
[나는 귀여운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아, 우리 통성명도 아직이던가? 내 이름은 ‘에이든’이다. ‘에이든’. 외우기 쉽지? 다시 만날 때는 꼭 기억해주길 바라.]
“…에이든?”
기억났어. 맞아. 에이든.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였지. 그가 십년 뒤에 내가 성인이 되면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 의미가 뭔지 몰라서 그냥 배시시 웃으면서 넘겼는데 분명 그랬었다. 파이하고도 아예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경계를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파이가 빵과 샌드위치하고 음료수를 가져와 두 남자가 보는 앞에서 냠냠 맛있게 잘도 먹었었다. 그리고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그곳에서 셋이 같이 놀았고, 두 남자는 종일 서로 말다툼을 끊이지 않곤 했다.
그게 또 은근 재미는 있었는데. 파이는 굉장히 피곤해했고, 에이든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드높이며 건방진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기억났어요. 에이든 맞죠?”
그때의 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그때 에이든이 두 손을 꼭 맞잡고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격렬히 끄덕거렸다.
“오오, 날 기억해주다니 영광이야. 역시 치즈는 착하구나. 저 못된 드래곤 밑에서 이렇게 똑똑하고 아름답게 자라다니.”
아름답다니. 나보다 당신이 더 아름다운데. 정말 진짜 예쁜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몸이 배배 꼬였다.
“내가 좀 똑똑해요.”
“그럼, 그럼. 아주 똑똑해. 예상보다 더 잘 자라주어서 나는 참으로도 기쁘고 감격스럽다.”
에이든은 누구보다도 대하기가 아주 편한 상대였다. 대화도 잘 통하고. 에이든과 그날 하루 놀았을 뿐이었는데도 그때는 헤어진 게 너무 아쉽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파이한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묻던 적이 있다. 그때 파이가 그랬지.
[잊어버려. 그런 쓰레기 새끼는.]
마치 또 같은 질문을 하면 벌을 주겠다는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봐서 그 이후로는 절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가 최근에 어쩌다가 슬쩍 한번 떠올렸던 건데. 설마 진짜 나타날 줄이야.
“그런데 에이든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설마… 파이의 보석을 훔치러 온 건 아니겠죠?”
“보석? 그런 건 관심 없는데?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하나다.”
…설마, 그 이유가……?
“약속대로 치즈 너를 데리러 왔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진짜다! 일단 나는 파이와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러자 내 어깨를 감싸 쥔 파이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나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약속? 나는 허락한 적도, 허락할 생각도 없으니 당장 꺼져라, 에이든.”
“치즈를 데려가겠다는데 왜 네 허락이 필요하지? 설마 아직도 자신이 치즈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착각하지 마. 치즈는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카르디옌.”
맞아. 나는 다 큰 성인이지!
코웃음을 치면서 건들거리는 에이든의 말에 격렬히 공감하려다가 참았다. 그랬다간 파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게 되는 쪽은 또 나니까.
그냥 이럴 때는 가만히 있어야 중간이라도 간다. 그래서 나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저거 봐. 치즈도 내 말에 동의하잖아.”
그랬건만! 저, 저, 저 눈치도 없는 에이든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뱉어낸 말에 나는 동공지진. 정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순간 정적이 그 자리에 머물러 식은땀이 삐죽 흘러나왔다.
“동의……?”
그 침묵을 깨고 정수리 위에서 들려오는 파이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날카로운 바늘이 전신에 푹푹 꽂히는 것 같았다. 딱 두 음절이었는데 뭔가 묵직한 것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파이의 팔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져서 그런 듯. 흑흑,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을!
나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파이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파이.”
“오오, 맙소사! 지금 저 못된 드래곤이 선량하고 고귀한 인간을 협박하는 거야? 우리 치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살고 있었다니!”
자꾸 저 눈치 없는 남자가 불난 집에다가 부채질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불안함에 입술을 말아 물어 잘근 씹으며 그 입 좀 다물라고 에이든을 노려봤다.
“하긴 드래곤 놈들은 죄다 제 힘만 믿고 까부는 독불장군이지. 그럼 다시 정정해야겠군.”
하지만 에이든은 내 눈빛을 보지도 않고 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고개를 끄덕거린다. 덕분에 나만 초조하게 파이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에이든이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혼자 여유작작하게 꽃단장을 마치더니 등 뒤로 커다랗고 새하얀 날개를 꺼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날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날개의 깃털부분이 유리 같은 느낌이 강했다. 얼음 같기도 하고. 약간 반투명이라 빛이 관통해서 반짝거리는 느낌이 드는 거였다.
어쨌든 예쁘긴 예쁘네.
막 목구멍에서 환호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려는 걸 꾹 참느라 고역이었다. 그저 그 예쁜 날개를 내 눈에 열심히 담기 바빴다.
그때, 다시 몸을 휙 돌린 에이든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 발 더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면서 입을 열었다.
“너를 구하러 왔다, 치즈. 이 추악하고 냄새나는 드래곤의 둥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으윽, 소름.
갑자기 막 온몸이 간질거리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참 느끼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잘하는 것 같다. 파이라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고.
그래서 슬쩍 파이를 올려다보다가 또 흠칫 놀랐다. 파이의 선홍색 눈동자가 진한 핏빛으로 변했다. 게다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과 함께 턱 아래부터 뺨까지 어두운 잿빛의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으악, 위험해!
지금까지 딱 두 번 이 모습을 봤었다. 처음으로 이 무시무시한 장면을 봤을 때가 바로 저 에이든과의 싸움을 치를 때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각인했었다.
드래곤이 폭주하면 그 주변의 마을 몇 개가 통째로 날아간다는 것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드래곤은 원래 자신의 소유물에 각별한 애정을 과시한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몰래 자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드래곤의 레어에 발을 들이는 거라고 하던가.
파이가 나를 워낙 어릴 때부터 품 안에 싸고도는 경향이 있었다. 또, 누가 나한테 접근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소유욕이 굉장하다고 해야 하나? 자기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멋대로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도 질색했으니까.
“파이!”
그래서 나는 꽁꽁 묶인 몸을 그에게 쿵 박으면서 냅다 그를 불렀다.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러자 얼굴을 한번 크게 일그러트리는 파이가 눈동자를 휘릭 굴려 나를 쳐다본다. 그것도 에이든을 노려보던 그 사나운 눈빛으로.
이, 일단 이 위험한 분위기를 먼저 바꿔야겠어!
“파이! 나 배고파요! 배고프다고! 그리고 나 쉬 마려. 화장실! 화장실!”
당장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마침 생각해보니 아직 아침 식사도 하기 전이긴 했다. 게다가 지금 방금 오금이 확 저려서 진짜 쉬가 마려워졌다.
다행히 파이의 구겨져있던 미간이 슬쩍 풀리면서 짙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동시에 입술 끝을 바짝 끌어올리면서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에 내가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순식간에 변한 모습을 보면서 두 눈을 끔뻑거렸다.
벌렁거리는 심장이 날뛰는 사이에 파이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춰온다.
“배고플 만하지. 기왕 온 김에 들어가서 볼일 보고 식사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