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36화 (36/132)

♬  #36

[파이! 나 이거 하나만! 하나만 주세요!]

[하나? 여기 절반이 다 네 것이다. 고작 하나 가지고 되겠어?]

가출을 마음먹었을 때야 그것도 전부 포기할 생각이었었다. 재물이 많아 봐야 가슴이 허한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계획은 보류되었으니까.

나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비장하게 물었다. 그러자 파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춰왔다.

“글쎄. 그건 가서 확인해봐야지. 아무튼, 얌전히 있어.”

“싫어! 나도 갈래요! 나도 데려가!”

살면서 거의 보기 힘들다는 레드 다이아몬드! 그게 레어 안의 보물창고에 수두룩했단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수업 도중에 레드 다이아몬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공급이 적어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귀하다는 레드 다이아몬드. 나는 그 레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던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냈었다. 그 뒤로 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더랬지.

아무튼, 구하기 어렵다는 보석들을 훔치러 드래곤의 레어에 침입한다는 사람이 종종 있긴 했었다. 내 보석들이 무사한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레어에 가겠다고 투정 부리는 건 또 처음이군.”

“구, 궁금하니까?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요! 나도 옷을 입혀줘요!”

파이는 이미 마력으로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뒤였다. 그래서 혹시나 그가 나를 놓고 가 버릴까 봐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덥석 잡아버렸다. 그러자 파이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아까 막 화가 나있던 표정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알았다. 그럼 내 옆에 꼭 붙어있어.”

그 말에 나는 격렬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랬는데 파이가 어디선가 연분홍색 이불을 가져와 내 어깨에 걸쳐 주면서 나를 꽁꽁 싸맨다.

“옷은? 이건 이불이잖아요.”

“시간이 없어.”

…이 뻥쟁이 변태가 진짜? 시간이 없긴 뭐가 없어! 자기 옷도 눈 깜짝할 사이에 챙겨 입었으면서!

“자기는 멀쩡하게 다 차려입었으면서 나는 베이컨 말이라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얼굴과 목을 빼놓고 그 아래가 전부 이불에 똘똘 말린 채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봤다.

하지만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게 쓰는 마력과 남에게 쓰는 마력은 달라.”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너무 당돌하게 뱉어내서 코웃음을 쳤다.

이 여우 같은 얄미운 드래곤!

그러나 파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한쪽 팔로 가볍게 안아 팔뚝에 내 엉덩이를 안착시켰다. 분홍색 이불에 말린 것이 진짜 베이컨에 말린 샛노란 파프리카가 된 느낌이다. 어쩐지 갓 태어난 아기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눈감아. 바로 이동할 거다.”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코끝에 밀려오는 퀴퀴한 먼지 냄새가 비강을 타고 침입해왔다. 덕분에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마구 토해내느라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는 나를 재빨리 받아낸 파이가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이 냄새는 대체 뭐지?

“파이, 이제 눈 떠도……?”

“어? 치즈 베이컨 말이잖아?”

파이의 품에 기댄 채로 물어보려던 내 말을 단번에 자른 낯선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파이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되게 가벼워서 팔랑거리는 느낌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런데… 치즈 베이컨 말이? 어쩜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눈을 뜨려다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다시 질끈 감았다. 그리고 파이의 가슴팍에 이마를 콩 찍었다. 동시에 파이의 목구멍에서 굉장히 짜증이 가득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떤 놈이 결계에 손을 대나 했더니, 아저씨로군.”

아저씨?

“이 버르장머리 없는 못된 드래곤 새끼… 아니, 아니지. 귀여운 꼬마 아가씨의 귀를 어지럽힐 수는 없지. 아무튼, 오랜만이다, 카르디옌. 치즈도 안녕?”

코웃음을 치는 낯선 남자가 파이의 본명을 씹어 먹을 듯 나직하게 뱉어내는 음성을 듣고 확실히 알았다. 그때 그 남자다. 10년 전에 나한테 아저씨라 불리고 좌절하던 그 예쁜 남자.

나는 바람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손을 움직일 수가 없는 관계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등 뒤로 모았다. 그리고 눈을 반짝 떠서 고개를 휙 돌려 뒤를 쳐다봤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남자는 확실히 은발의 푸른 눈을 가진 그 남자였다. 그런데 꽤 많이 큰 것 같기도 하고? 내 기억 속의 남자는 조금 앳된 얼굴의 아리따운 미소년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완전한 어른이자 미남이었다.

그리고 방금 기침이 나도록 한껏 일었던 먼지가 남자의 근처에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가 사방에 둘러진 것 같았다. 그 먼지구름은 우리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주위에 맴돌기만 했다. 이건 분명 파이의 정화마법에 의해서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파이의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저 남자의 등 뒤로 옅은 빛이 진하게 퍼진다. 마치 후광이 비춰지는 것처럼. 그 장면을 미루어보아 여기는 레어의 동굴 초입이 분명하다.

…훗, 역시. 레어에서 20년을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이거지. 파이를 빼고 나보다 이 동굴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오랜만이에요. 음… 아저씨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도 한번 본 기억이 있는 덕분에 낯설지는 않았다. 게다가 절대 잊혀 지지 않을 미남이라서. 나는 예쁜 남자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짓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사실 목 아래로는 꽁꽁 이불에 묶인 채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분명컨대 파이가 보이지 않는 줄로 이불을 전부 동여맸을 거라고 확신한다. 진짜 손가락하고 발가락만 꼬물거릴 수 있을 정도거든.

그러자 그 남자가 손바닥으로 제 입을 턱, 막으면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휙 돌리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덩치는 파이보다 왜소해도 남자답게 큰 편인데 어쩜 몸짓이 저렇게 우아할 수 있지? 그런데 우는 거야, 웃는 거야?

“너무해, 치즈. 아저씨라니.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 같아 보이는 거지? 일부러 더 신경 써서 차려입고 멋지게 단장까지 하고 왔는데?”

“아… 아저씨가 어때서요? 파이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었는데?”

그러자 남자가 풋, 하는 비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더니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우리를 쳐다보면서 손가락으로 파이를 가리켰다.

“그렇지? 아저씨는 저놈이지 내가 아니라고. 그리고 내 이름을 그새 까먹었나? 우리 치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데?”

“…십년이나 지났거든요? 내가 그쪽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고요. 내가 그쪽한테 누구세요, 라고 했으면?”

“오! 그건 더 충격이지! 그래그래, 날 잊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당돌한 건 여전하군그래? 뭐 좋다. 그런데… 정말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거냐?”

손바닥을 마주대고 살살 비비면서 싱긋 웃는 남자가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가만있어보자……. 그러니까 그 십년 전에… 이 남자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더라? 음, 음음, 그때는 바깥에 외출했었던 것 같다. 레어 안쪽은 아니었어, 분명.

“아!”

기억났다. 그때가 봄이 왔던 때라 아침부터 꽃밭에서 놀고 싶어서 파이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징징거렸을 때다.

[놀아, 놀래, 나갈 거야, 나가자요! 응?! 꽃향기가 잔뜩 있는데서 뒹굴고 싶다고. 네?]

[…벌레 많아.]

[파이가 지켜주면 되잖아요. 응? 넘어져도 안 다치게 보호해주는 귀걸이도 만들어 줘놓고! 가자가자, 응?]

칭얼칭얼. 가자는 말만 한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결국, 저도 듣기 괴로웠는지 한숨을 푹 내쉬는 파이가 별수 없이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예쁜 드레스를 입혀주고 레어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낯선 어느 평지에 순식간에 도달했는데, 파이는 거기가 산꼭대기라고 했다. 그곳에 들꽃들이 한가득 피어있어서 환호하며 방방 뛰었었다. 잔디 위를 구르고 뛰고 꽃을 따서 파이한테 선물하기도 하면서 놀고 있었더랬다.

[엄마야!]

그러다가 저 멀리에서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어, 맞아. 나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주시하던 파이를 공격한 남자가 바로 저 남자였어! 물론 파이는 처음에 한번은 방심해서 당했지만, 그 이후로는 죽일 듯 공격을 퍼부었지. 결국, 저 남자가 항복했는데 그래도 죽이겠다고 덤비는 파이를 내가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만, 그만해요! 죽이려고 작정했어? 살인은 나쁘다고!]

마지막 발악으로 외쳤던 말이 저거였고, 그제야 파이가 진정했다. 파이는 그나마 멀쩡한 편이고 옷만 너덜너덜 찢어진 상태였는데 저 남자는 좀 많이 다쳤더랬지. 이마에서 피도 나고 입술도 찢어지고 하여간 엉망진창이라 걱정했었다. 그랬는데 마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멀쩡한 모습이 되었었다.

그걸 굉장히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그 남자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넌 정체가 뭐지, 꼬마 아가씨? 인간?]

[나? 나는 치즈야. 그런데 우리 파이를 왜 괴롭히는 거야?]

[…파이?]

[응! 우리 파이.]

나는 파이의 바짓단을 붙잡고 턱짓으로 파이를 가리키며 맞은 편 남자를 빤히 노려봤다. 겁도 없었지.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그 사이를 가로막았던 나 스스로가 참 대단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책 없기도 하고. 그땐 어리기도 해서 목숨 귀한 줄 몰랐으니까.

[파이라. 꽤 귀여운 이름을 가지고 있네, 카르디옌. 그건 그렇고 우리 제국 영역 근처에 찾아와 결계를 쳐놓은 이유를 좀 묻고 싶은데?]

그랬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들꽃이 잔뜩 피어있던 곳의 땅 주인이 바로 당시 블랑 제국의 황태자였던 저 남자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저들 구역을 침입한 파이를 위협적인 상대로 간주하고 공격을 했던 거라고.

나는 그 사실을 듣게 되자마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내가 파이한테 가자고 했어요. 내가 놀고 싶다고 해서 여기 온 거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네?]

진심으로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서로 싸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파이의 옷자락을 절대 놓지 않았던 나를 그가 한참동안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나와 시선을 맞추는 남자가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착하구나. 저 건방진 드래곤 따위하고는 참 달라. 역시 인간은 고귀한 존재지. 아무렴. 이름이 치즈라고 했나?]

[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라고 했다가 남자가 얼음처럼 굳어버려서 흠칫 놀랐다. 그대로 심장이 멈춰서 죽은 줄 알았지.

[뭐, 뭐라고……?]

그랬는데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옆으로 풀썩 쓰러진 남자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훌쩍였다. 어떻게 자기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리고 그때 보게 되었다. 남자의 등에 꽃처럼 활짝 피어난 새하얀 날개를. 남자의 키보다 더 크고 길어서 한 눈에 다 들어차지도 않았다.

게다가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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