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31화 (31/132)

♬  #31

“어? 아까 그 핫도그 가게요?”

“응. 그때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아카데미에서도 매번 듣던 말이라 조금 심드렁해졌다. 하지만 나는 옆에서 듣고 있을 파이를 의식해서 더 격렬하게 맞장구를 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어머! 그러셨구나. 그 핫도그 가게에서는 칠리 소시지가 일품이거든요!”

“그래. 나도 먹어봤다. 그 음식점에서 칠리소스를 직접 개발했다고 하더군. 내가 맛보던 소스보다 조금 더 향이 진했지만 소시지와 빵이 어우러지니 그 강한 향을 잡아 섞이는 맛이 기가 막혔다.”

“그렇죠? 역시 맛을 아시네요. 누구랑 참! 많이 다르게 말이죠.”

말하면서 흘끗 파이를 쳐다보고 배시시 웃어주었다. 내가 왜 웃었냐면, 파이의 선홍색 눈동자가 점점 핏빛을 띠우며 살벌하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화산폭발이 일어나 용암이 흐를 것처럼 거칠게 타오르고 있어서.

무, 무서워…….

“흐흠, 그런데 배가 많이 고픈데 음식은 아직 인가요?”

“자흐틴!”

왕세자가 방문을 향해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문이 열리고 시종 하나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예, 저하.”

“오찬 준비는 아직 멀었나?”

“다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시종들이 바퀴가 달린 커다란 서빙카트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원탁에 그릇을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원탁이 제법 크기도 했지만 그 안을 가득 메우는 갖가지 종류의 요리 가짓수에 꽤 놀랐다. 그 요리마다 정성이 가득 들어갔다는 듯 예쁘게 장식된 모양을 보고 두 번 놀랐다. 이게 다 뭔가 싶기도 하고. 내 성년을 축하하는 생일 때의 음식들보다 더 화려하고 엄청났다.

이게 바로 왕궁의 수준 높은 양질의 식사인가.

“배가 고플 테니 어서 식사를 시작하지.”

“잘 먹겠습니다!”

정말 말도 없이 먹는데 집중했다. 맛은 뭐, 그냥 우리 주방장의 요리솜씨와 비슷했다. 다만 보기에 좋아야 맛이 좋다는 의미로, 정성이 더 첨가되었을 뿐?

파이와 왕세자가 이것저것 내 앞 접시에 음식을 놔주는 대로 남기지 않고 전부 흡입했다. 그 자그마한 위장을 정신없이 꽉꽉 채우고 포만감을 느낀 뒤에야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너무 먹는데 집중했었나보다.

국왕이 인자하게 웃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미소에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있는 것 같아 괜히 심장이 욱신거리기까지.

내가 그렇게 여동생하고 닮았나?

어쩐지 분위기가 묘해져서 뜨거워진 뺨을 손으로 감싸 쥐고 눈동자를 또륵 굴렸다. 그러자 갑자기 파이가 내 손에 쥔 포크를 빼앗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왜 그러나 싶어서 그를 쳐다보자, 내 팔뚝을 답삭 잡아챈다.

“다 맛봤으면 그만 가지.”

나를 힘으로 발딱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질질 끌고 문 쪽으로 향했다.

응? 엥? 나 아직 다 안 먹었다고!

“후식! 후식 아직 안 먹었…….”

“후식은 나가서 먹어. 맛있는 걸로 사줄게.”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세자가 내 반대쪽 손을 덥석 잡아 끌어당기는 바람에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남자의 사이에 제대로 끼게 되었다. 진짜 샌드위치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이시여.”

“더 논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은데.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으르렁거리는 파이의 나직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쪽은 역시 나다.

…음식 먹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는 곳은 바로 왕궁의 오찬자리. 그것도 왕국의 국왕과 왕비께서 계신 자리다. 그런데 왕세자와 드래곤씩이나 되는 두 남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왕세자는 어떻게든 나와 혼인을 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파이는 곧 죽어도 그 혼인 결사반대를 눈빛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아, 내 몸이 더 찌부가 되어 눌린 샌드위치가 되겠어!

“두 분 진정하시고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제 의견 아니겠습니까?”

내가 두 사람 손에 잡힌 내 손이 바스라지기 전에 구출해내기 위해서 팔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매너 좋은 왕세자가 먼저 내 손을 풀어줬다. 하지만 파이는 제 손에 잡힌 내 팔뚝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래, 그 대단한 집착. 그거 하나는 인정해주지.

“파이. 파이도 우선 날 좀 놔 봐요. 이러다가 내 얇은 팔뚝이 뚝, 잘라지겠어.”

“팔 하나 쯤 없어도 네가 사는 데는 지장 없다.”

“…신이 인간에게 멀쩡한 사지를 내려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 안 해요? 내가 불편해할 건 생각도 안하나봐? 내가 이렇게! 파이를 만질 수도 없을 텐데 그래도 좋아요?”

나는 투덜거리면서 왕세자에게 잡혔던 손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아까부터 계속 왕세자만 죽일 듯이 노려보던 파이가 그제야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예쁘게 웃으며 잔뜩 삐친 아기를 타이르듯 뺨을 어루만져줬다.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려요. 위대하신 드래곤께서 인간을 상대로 싸움해봐야 득 될 것이 뭐가 있을지 난 잘 모르겠네요. 평소의 냉철하던 파이로 돌아와요.”

“가지 않겠다고 말해.”

“…응? 어디를요?”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라고. 여기서. 지금. 당장.”

순간 당황해서 눈꺼풀만 빠르게 팔랑거렸다. 파이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소유욕을 드러내는 건 처음 봤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나 물건이 아닌 나한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파이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선홍빛 눈동자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나를 향해있다. 아주 무시무시하리만큼 대단한 독점욕이 가득 담긴 눈빛이다. 대체 이래서 시집을 어떻게 보낼 생각인건지 모를 정도로.

덕분에 또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나는 손을 내려 내 얼굴을 감싸면서 눈동자를 또륵 굴렸다. 그리고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좋은 혼처가 있으면 보내겠다고 한 쪽은 파이에요. 선택은 파이가 해도 결정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안 된다고 말하지 않나.”

저 음산한 목소리가 마치 생각할 시간이 길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그래서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난처함에 미간을 구겼다. 대체 이 드래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고민하면서 아랫입술을 슬쩍 말아 물었다. 그러자 내 팔뚝을 잡고 있는 파이가 조금 더 세게 잡아 쥔다.

“아! 아파요!”

“정말 유치하시군요. 힘도 없는 여인에게 협박과 강요라니. 그 손 그만 놓으시지요. 당신의 소중한 이를 다치게 할 셈입니까?”

팔이 저릿해져 반대쪽 손을 허공에서 파닥거리는데, 왕세자가 한심하다는 듯 소리친다. 그러나 파이는 콧방귀를 뀌기만 했다.

“시끄럽군.”

그러더니 순식간에 주위 배경이 일그러진다. 마치 방금 물감으로 색칠한 캔버스를 물속에 던져 넣은 듯 번지는 이 느낌. 이건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우웁, 어지러워.

갑자기 뒷골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시야가 빙글 돌아서 두 눈을 질끈 감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파이가 나를 한 팔로 와락 끌어안아 가슴팍에 묻어버린다.

“치즈.”

“…너무해. 방금 먹은 맛있는 음식을 다시 보게 하고 싶어서 이래요?”

“그 놈이 마음에 들었나? 그래서 내게 그리 대드는 건가?”

귓가에 울리는 파이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간질거려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혼내는 건 아니고, 달래듯 묻는 건데 이상하게 상처받은 것처럼 조금 침울하게 들려왔다.

“왜요.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포기해. 그 놈은 안 돼.”

“잘하면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수 있는 자리예요. 얼마든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자리라고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내 어머니라는 사람이 국왕의 여동생은 아니라면서요.”

그러자 파이가 나를 더 꼭 끌어안으면서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권력을 갖고 싶다면 차라리 황후가 되라. 겨우 작은 나라의 왕비 따위가 뭐가 좋다고.”

“그럼 황후의 자리가 있으면 보내줄 거예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확신하건데, 내가 혼인할 확률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다. 파이의 저 기세를 내 힘으로 꺾기에는 무리고.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신랑감을 찾는 건 조금 미뤄도 되겠지. 또 지금 당장 그에게서 벗어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일단 한수 접어야겠다.

…그럼 당분간 이 말도 안 되는 연애를 지속해야 하는 걸까? 울적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는 걸 겨우 참았다.

“좋아요. 일단 포기하라고 하니까 포기할게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제 눈떠도 되요?”

파이는 대답대신 품에 안았던 나를 조금 떨어트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슬쩍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긴 어디에요?”

“레어가 갑갑하다고 하는 너를 위해 하나 만들었다. 생일 선물로 줄 겸.”

“우와……!”

파이는 내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벽이 온통 투명한 유리로, 천장이 둥근 아치형을 그리고 있는 반구모양이었다. 넓고 쾌적한 실내는 방처럼 꾸며진 상태다. 그리고 나와 파이가 그 반구 안에 함께 있었다.

더 신기했던 건, 우리가 있는 반구모양의 집이 어느 거대한 나무 위에 있다는 거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의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파이의 몸보다 두 배는 더 큰 나뭇가지라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것 같아 보이기는 한다.

그 반구는 내 방보다 세배는 더 컸다. 한쪽 구석에는 높이가 낮은 침대가 있었고 자다가 굴러 떨어질 염려는 없을 정도로 컸다. 반구의 절반을 채우고 있는 높이가 낮은 책장에는 책들도 가득했고 다행히 바닥은 반투명이었다. 만약 바닥이 훤히 보였다면…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무가 굉장히 우거져서 햇빛은 적당하네요.”

일단 벽 전체가 전부 투명한 유리다. 사생활이 걱정되긴 했으나 집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단지 휴식공간으로 생각하면 꽤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화장실이 왜 저래요?”

문제는 눈에 보이는 저곳이다. 침실 반대쪽의 한쪽 구석에는 너무… 공개적인 욕실이 있었다. 벽 자체가 전부 유리니까 그렇다 쳐도 욕실을 가릴 칸막이나 커튼조차 없다. 그저 휑하니 욕조와 볼일을 보는 좌식 변기와 손 씻는 세면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다. 볼일을 볼 때 사방을 구경하라는 의도가 다분하기는 하다.

너무 자연 친화적인거 아냐?

“시간이 부족해서 다 완성하진 못했어. 하지만 저대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두려고.”

뭐라는 거람? 이거야말로 진짜 사생활 보호가 되지 않는 거잖아?

게다가 사방 여기저기에 붉은색의 양초들이 예쁜 불꽃을 일궈내며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대체 저 양초가 여기에서 왜 몸을 불태우고 있는 걸까? 그걸 보니 왜 또 이렇게 몸이 더워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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