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그렇게 딱 잘라 말해줘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기도 했고. 부모라는 게 없으면 어때? 파이와 종일 같이 지내면서 나름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혼자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별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또 얘기가 나오니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이 아이와 혼인할 상대는 내가 결정한다. 나는 이 아이를 프리센 왕국의 왕세자에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러니 탐내지 마라.”
“어? 무슨 말이에요, 파이? 누구 마음대로… 읍읍?!”
혼자 멋대로 결정을 지어버리기에 반박하려던 내 목구멍이 꽉 막혀버렸다. 숨은 쉬어지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마력을 이용했나 보다. 파이가 이런 식으로 내 목소리를 막아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오리주둥이처럼 삐죽 내밀고 눈을 가늘게 떠서 노려봤다. 하지만 파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국왕을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
“꼭 딸을 아끼는 아비처럼 행동하시는군요. 드래곤께서 한낱 인간 아이에게 그만한 정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허허 웃기만 하는 국왕의 눈동자가 다시 내게 꽂혔다.
“제가 저 아이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아이의 출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십년 전이라면 저 아이도 성년이 되었겠군요.”
“삼일 전에 성년식을 치렀다.”
“그렇습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저희 인간, 특히 왕족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을 굉장히 중히 여깁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는 국왕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나도 손에 든 비스킷을 다시 입에 물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이십년 전, 제 여동생이 실종되어 아직까지 찾지 못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실 평민 출신의 왕궁 기사와 함께 궁을 몰래 탈출한… 부끄러운 비화지요.”
말하면서 시선을 내게로 돌린 국왕의 초록색 눈동자가 나와 딱 마주쳤다. 마침 비스킷을 입에 물고 있던 터라 민망함에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급히 비스킷을 입 안으로 전부 밀어 넣고 오득오득 씹으면서 눈동자를 또륵 굴렸다.
“당시 왕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던 또렷한 이목구비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까지. 왕궁을 벗어나 도망간 제 여동생의 마지막 모습과, 저 아가씨의 모습이 매우 닮아있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닮았다고? 국왕의 여동생이라면 왕녀라는 거잖아? …그, 그럼 내가 진짜 왕족이라는 뜻?!
만약 이게 사실이고 레이라가 알게 되면 기함을 지를 만한 이야기다. 내 정체를 수상하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파이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은 꼈다.
“우연이겠지. 당시 이 아이의 어미 머리카락은 흑발에 가까운 짙은 고동색이었다. 대신 옆에 이미 죽어있던 사내의 머리카락이 치즈와 똑같은 밝은 크림색이었지.”
“혹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아닐는지요.”
“드래곤의 기억을 무시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거짓으로 회유하려는 너희 인간과는 다르다. 어서 식사나 내와. 내 아이가 왕궁의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한다.”
거만하기는. 하지만 파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긴 했다. 거짓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묵언수행 하는 쪽을 선택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앞에 놓인 홍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눈꺼풀을 빠르게 파닥거렸다.
역시 차는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 씁쓰름해!
“저는 아가씨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난해한 홍차 맛에 콧등을 살짝 구기면서 혀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사이에 조용하던 왕세자가 패기 넘치게 입을 열어서 눈썹이 휙 들려졌다.
내 생각? 이런 거라면 내가 또 한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지!
아카데미에서도 발표수업만큼은 아주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이게 바로 파이의 싸늘한 눈빛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내 의견을 솔직히 털어놨던 경험에서 비롯된 나의 특기다. 파이와 20년을 함께 지내다보면 세상 무엇도 무서울 것이 없다.
나는 왕세자의 말에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당황했다. 그러다가 아까 파이의 마력에 의해서 목구멍이 막혔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려 파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불쾌함을 가득 담아 파이를 향해 내 손가락으로 목을 톡톡 건드리면서 어서 풀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데… 이 양심 가출한 뻔뻔하고 못된 드래곤이 모른 척을 하네?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 나를 흘끗 쳐다보던 파이가 아무것도 없는 창밖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서 또 나는 씩씩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왕세자가 뒤에서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방법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아이의 의견을 회피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왕세자의 말에 나는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파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나를 건너 뛰어 왕세자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는 내가 더 긴장되는 분위기였다.
“이젠 하다하다 인간 따위가 내 교육법까지 간섭하는 건가?”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권력을 가진 자의 미덕이라 배웠습니다.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많은 이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프리센 왕국의 왕세자에게 사생아가 올해 들어 서른 명에 육박했다지? 무력보다 몸으로 하는 대화의 결과물이 제법 대단하다고 여겨지기는 하는군?”
뭐어? 사생아가 서른 명?!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왕세자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 남자도 파이만큼 얼굴에 철판이 몇 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그르 웃으며 침착하게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프리센의 혈족은 대대로 학술에 능한 아이들이 제법 많이 배출됩니다. 왕국의 앞날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니 나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더군다나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 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왕족이 될 수 없습니다. 제 후계는 이 아가씨가 낳는 아이가 될 겁니다.”
응? 여긴 또 내가 후계를 낳는다고 기정사실을 만들어놓네.
그러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어 보인다. 방심하다가 예쁜 미소를 보게 되어 괜히 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으며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렸다.
그나저나 사생아가 서른 명이라니. 그럼 세상에, 정부가 몇이야? 여자가 많은 남자는 사양이지만 또… 음, 왕세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려나?
평민이 왕실의 후계를 낳으면 왕세자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 언젠가 왕비가 되는 거잖아? 그럼 이 왕궁에서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테고? 보통 귀족 가에 시집가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고? 이거 레이라가 알면 아주 많이 놀라하겠는걸?
사실 조금 솔깃해진 이유는, 레어를 벗어난다는데 아주 큰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와 가짜 연애를 지속한다고 나한테 이득될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파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다고 하는데 파이라고 반대할 이유는 없을 거다. 웬만큼 제 눈에 들어차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나를 시집보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참에 저 못된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저 왕세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 확실하거든. 나 좋다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차근차근 사랑을 키워나가면 된다. 그럼… 언젠가 파이도 잊을 수 있을 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착잡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다친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정말 이렇게 파이와, 영영 헤어질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정말 파이를…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울적하다. 마음이 1초에도 수십 번 변하는 내가 너무 밉다. 하지만 결정은 지어야 해. 그래서 나는 이십년의 추억을 회상하며 씁쓸한 마음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내가 지금 파이의 마력에 의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파이의 옷깃을 답삭 잡고 흔들면서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그를 노려봤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이러기야, 정말?! 어서 풀어줘! 풀어달라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앙탈을 부리던 그때의 그 모습을 재현해보였다. 목소리만 안 나올 뿐이지 늘 하던 생떼와 최대한 비슷하게. 발을 동동 굴리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 대로 칭얼거렸다.
결국 못 이기는 척 한숨을 폭 내쉬는 파이가 내 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아, 아! 아!! 이 나쁜 남자 같으니! 응?! 남의 목소리를 멋대로 막 갈취해가는 못된 마법을 나한테 쓰는 게 어디 있어요! 미워할 거야!”
“점잖게 굴어. 여기는 레어가 아니야.”
“…파이야 말로 여기 국왕 전하도 계신데! 먼저 시비를 건 쪽은 파이라고요! 만날 나만 가지고 뭐라고 그러고!”
하도 얄미워서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날린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입가에 가져다 댄 뒤에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송구합니다. 저희 드래곤이 워낙 혼자 산 기간이 오래다 보니 철이 없네요.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국왕과 왕비의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왜 저렇게 놀라지?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방긋 웃으면서 왕세자를 쳐다봤다.
“방금 말씀하신 그 혼인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지?”
“귀족도 아닌 제가 왕세자비의 자리에 오르는 게 가능한지요.”
“물론 정식으로 왕세자비를 맞이하려면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을 맞아야 하지만, 왕세자인 내 선택에 의해 평민을 내 반려로 선택할 수 있다.”
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왕세자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조금 더 진지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대가 낳은 우리의 아이를 후계로 지목하면, 그대 역시 아이의 어미로써 정식으로 왕세자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나는 그대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내 뒤를 잇게 할 생각이다.”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왜 그 많은 여자들을 두고 저를 선택하셨어요?”
나는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을 담아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크림색의 길쭉한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내 유혹적인 자태를 더 빛내주기 위해 얼굴을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제대로 먹혔는지 왕세자의 적갈색 눈동자가 눈에 보일정도로 흔들린다. 역시 예상대로 홀랑 넘어가는군. 침착함을 유지하던 왕세자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아닌 척 호흡을 고르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귀 끝이 새빨갛게 변하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언제더라……. 6년 전쯤에 미복 잠행을 하다가 우연찮게 그대를 보게 되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핫도그 가게에서 오늘과 똑같은 칠리 소시지 핫도그를 음미하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