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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29화 (29/132)

♬  #29

뭔가 좀 불안해져서 파이를 슬쩍 올려다봤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고삐를 살짝 당겨 다시 나무다리 안쪽으로 들어가는 흑마의 뒤를 따라 걷게 했다.

“정말 식사만 하는 거 맞겠죠?”

“글쎄.”

“설마 왕족이 막 사람 잡아다가 어디 감옥 같은데 가둬놓고… 아… 아니겠죠?”

“치즈가 그동안 어떻게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혼날 일을 했으면 혼나야 하고, 칭찬받을 일을 했다면 그에 걸맞은 선물을 받겠지.”

“…나는 혼날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일들은 내 관할 밖이라.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군. 잘 곱씹어봐. 기억 못 하는 죄가 있을지도?”

분명 날 놀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게 확실하다. 누가 사천년 먹은 짐승 아니랄까 봐 이렇게 능글맞아서야!

넓은 강을 이어주는 기다란 다리를 건너 성안으로 진입했다. 곧 높다란 건물들이 양쪽에 줄지어 세워져있었다. 더 깊숙한 안쪽에 또 다른 커다란 성벽이 빙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성벽 안으로 진짜 왕궁의 꼭대기가 보였다.

이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여러 겹의 보호막인가?

왕세자가 탄 흑마의 바로 뒤에 따라붙자, 그 뒤로 기사들이 쫒아 와서 또 흠칫 놀랐다. 파이만큼 덩치가 크고 대단한 근육질의 남자도 몇 보여서 더 그랬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안전한 파이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파이는 여유롭게 미소를 흘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이곳부터는 말을 타는 것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중간 성벽을 지나자 그 성벽을 지키던 기사가 하는 말에 파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팔로 나를 번쩍 안아 조심히 내려주자, 다른 기사들이 릴리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파이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릴리를 어디에 가져다 파는 건 아니겠죠?”

파이는 그저 새하얀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면서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려주기만 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우리를 안내하는 왕세자의 뒤를 따라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오, 나중에 레이라한테 자랑할 거리 하나는 생겼네요. 왕궁을 언제 또 구경해보겠어?”

“그러다가 진짜 잡혀간다, 치즈. 타국의 왕궁 구조는 기밀이야. 자칫 첩자로 오인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또 겁을 먹은 채 파이에게 더 찰싹 들러붙었다. 그 모습을 흘끗 쳐다본 왕세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왕궁은 무서운 곳이었어.

“아직 식사준비가 다 되지 않았으니 우선 차를 대접하겠다. 이쪽으로.”

왕세자가 안내한 곳으로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들어섰다. 그곳에는 사람 6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의 원탁이 있었고, 이미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엇! 여기에도 나랑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이 있어!

원탁에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딱 봐도 부부의 느낌이 강했다. 그 중 남자의 머리카락에 나와 같은 백금색이 희끗희끗한 백발에 섞여있었다. 더 놀랐던 것은 그 남자의 눈동자 색도 나와 똑같은 옅은 초록색이라는 거다.

얼굴에는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 주름이 곱게 접혀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잠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중년의 남자 역시 나를 쳐다보면서 눈동자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치 탄식을 하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남자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내젖는다.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파이를 올려다봤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안으로 데려가 빈자리에 조심히 앉혀두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대체… 왜 이럴까?

“아바마마. 아가씨의 얼굴을 그리 빤히 보시면 어마마마께서 몹시 난처해하실 겁니다.”

우리를 안내한 왕세자가 기분 좋은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중년의 남자를 향해 말을 건넨다. 왕세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두 남녀가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라는 뜻이렸다. 그런고로 지금 나는 이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거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내 엉덩이, 무사하니?

곧 왕궁의 시종들이 들어와서 나와 파이, 왕세자의 앞에 고급스러운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찻잔 안에 담긴 찻물이 붉은 색인걸 보니 홍차인가보다. 차는 하나도 모르는데 레이라가 홍차는 맑은 홍색을 띠고 향이 제법 좋다고 알려줬었거든.

그리고 다른 시종이 내가 앉아있는 근처에 비스킷 바구니 하나를 내려놓았다.

오! 과자다!

노릇노릇 잘 부풀어서 맛깔나게 구워진 비스킷을 보자마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시지 핫도그를 두 조각밖에 못 먹어서 아쉬웠는데.

동시에 이 눈치 없는 위장에서 꾸루루루룩, 우렁차게 울리는 배꼽시계가 실내에 가득 퍼져버렸다. 덕분에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부, 부끄럽게 정말!

“숙녀를 굶기게 하다니. 갑작스럽게 준비를 시키게 되어 시간이 조금 걸리는 점 미리 양해를 부탁한다. 우선 비스킷이라도 조금 들도록 해.”

다정하게 말을 거는 왕세자가 비스킷 바구니를 내 앞에 끌어당겨 주었다.

“…그,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쭈뼛쭈뼛 내 손바닥보다 더 큰 비스킷을 하나 손에 쥐고 입에 가져가서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반죽에 레몬즙을 넣었는지 새큼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역시 맛있어. 보통 가게에서 파는 비스킷보다 더!

확실히 왕궁의 먹거리는 맛이 좋은 것 같다. 우리 주방장 요리솜씨도 제법이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아.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전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가 먼저겠지? 5년 전에 엘루앙 의상실에 방문한 이후로 오늘 처음 왕국을 방문한 것 같더군.”

오물오물 꼭꼭 씹어 먹고 있는 사이, 또 내게 말을 건네는 왕세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나를 포함한 프리센 왕국의 모든 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앗, 이것은 말로만 듣던 스토커인 건가! 그런데 상대는 왕세자인데? 설마 왕세자씩이나 되어서 한낱 평민 여자를 상대로 스토커 질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5년 전에 의상실을 찾아갔을 때 그 디자이너가 그런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왕궁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었지.

그때 그 디자이너가 뭐라고 했었더라?

[왕세자 저하께서 작년에 어쩌다가 아가씨를 뵙고 상사병을 앓으신다고 왕궁에서 난리가 났답디다. 국왕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으면 왕세자비로 삼으실 수도 있다고요.]

아, 맞아. 그랬어. 응. …응? 왕세자비?!

“5년 전에 의상실에서 그대에게 공문을 전했다고 들었는데, 그냥 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참 속상했다.”

나는 반쯤 잘라먹은 비스킷을 입에 문 채로 굳어버려 눈만 끔뻑거렸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서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보았으나 헛수고다.

그럼, 왕세자가 나를 찾았다는 이유가 그건가? 나를 자기 여자로 삼으려고?

“그 뒤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는 희망을 접어야 하나 싶었지. 하지만 역시 신은 나를 져버리지 않았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왕세자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파이를 쳐다봤다.

까, 깜짝이야!

미동도 없이 엄청나게 강렬한 눈빛으로 왕세자를 노려보고 있는 파이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정말 잡아 먹어버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만큼 오싹한 눈빛은 또 오랜만에 본다. 옆에서 보는 내가 살벌해서 죽겠는데, 왕세자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다.

우움. 샌드위치가 된 기분이야. 베이컨과 달걀프라이에 낀 치즈가 되어버렸어!

그때,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국왕이 몸을 앞으로 숙여오면서 테이블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파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는다.

“드래곤께서는 여전하시군요. 20년 전 대마법사가 도발을 걸어 싸움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습니다만.”

국왕이 파이에게 존대를 한다니. 정말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그제야 파이가 왕세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눈동자를 굴려 국왕을 쳐다본다. 그러더니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미천한 놈을 상대로 싸움이랄 것까지 있던가. 그쪽은 많이 늙었군. 역시 인간의 수명은 짧아.”

“그저 세월이 야속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드래곤께서 거두신 인간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협약에 따르자면…….”

“무고한 인간을 함부로 해치거나 잡아먹지 않는 것이 협약의 내용에 있었지. 그리고 나는 그대들과 맺은 협약을 어긴 적이 없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뭔가 무시무시한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았다. 국왕의 옆에 앉아있는 왕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기까지.

오들오들 떠는 왕비가 결국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파이가 드래곤이라서 겁을 먹은 것 같다. 파이가 그렇게 무서운 드래곤은 아닌데. 좀… 제멋대로고 되게 나쁘고 못되긴 했지만.

그런데 파이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있는 국왕이 더 놀랍다. 왕들은 파이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는 건가?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거두게 되신 것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십 년 전에 사라진 마을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어미가 조산한 아이지.”

앗, 내 얘기다. 파이가 내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해준 적이 없기도 해서 귀가 솔깃해졌다.

“어느 마을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북동쪽 마을이었다.”

“그렇군요. 저 아가씨가 유일한 생존자라면…….”

“아이의 아비로 보이는 사내는 이미 죽어있었고, 어미 역시 곧 숨이 끊어졌었지. 그 어미가 내게 아이를 부탁했고, 그래서 데려온 아이가 바로 이 아이다.”

철들기도 전. 그러니까 이미 응애응애 울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준 이가 바로 파이다. 그가 직접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늘 파이가 나를 도맡아 키워줬고 공부도 시켜줬다.

어렸을 때는 하루 대부분을 그의 무릎 위에서 지냈고, 낮잠도 그의 품에서 잤다. 운동 삼아 그의 어깨를 타고 오르면서 놀았고 그의 긴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인형놀이를 했다. 그렇게 글자를 떼고 동화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갑자기 궁금해져서 파이에게 물어봤었다.

[있잖아요, 파이. 나는 왜 엄마 아빠가 없어요?]

동화책 속 그림에서 엄마는 여자, 아빠는 남자.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주인공에게 늘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늘 파이뿐이었다. 가끔 파이가 자리를 비울 때는 다른 까만 언니들이 나를 돌봐주기도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세 번쯤? 혹시 파이가 내 아빠냐고 물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네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너를 길러주는 보호자일 뿐이지, 너의 혈육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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