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그 말에 우리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기겁하면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놀랐다. 국왕 전하라니. 게다가 왕세자 저하면 차기 국왕이 될 사람 아닌가? 아카데미에서도 어디 왕국 공작가의 차남정도가 제일 높았었는데. 물론 자신의 작위를 숨기고 다니는 귀족들이나 황족들도 있다고.
아카데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족 서열로 등급이 있긴 했다. 일단 귀족이라고 하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까. 혹시 귀족가의 자제에게 실수라도 하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학년 순서대로 선배와 후배로 나뉘곤 했다.
아무튼 국왕이라니. 국왕이 나를 왜 보고 싶어 할까?
“치즈.”
“응?”
“네 생각은 어때?”
“내 생각이 여기서 왜 필요해요? 국왕 전하께서 친히 오찬에 초대한다는데 거절했다가는 내 목이 댕강 잘리지 않겠어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돼. 오찬이라지만 왕궁 음식도 별거 없을 거다. 네가 먹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그런 건 내가 직접 먹어보고 판단해요. 말로 듣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거든요.”
나는 포크를 얌전히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그나저나 왕궁이라. 잘만 하면 왕궁에서 파이의 눈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나 짐을 챙기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금 입은 드레스만 팔아도 여비를 마련할 수는 있을 테니까. 이대로 저 못된 드래곤의 디저트 취급을 받을 수는 없어.
파이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미련 없이 일어나 파이의 손을 잡았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안내해드리지요.”
그러나 파이는 손을 들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동행한 녀석이 있어서.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 오찬 준비에 힘쓰도록.”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왕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차 대신 릴리의 등에 옆 안장으로 올라타서… 탔는데……. 갑자기 파이가 내 뒤에 올라타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팔로 내 허리를 감싸서 당겨 안는 바람에 나는 그의 가슴팍에 기댄 자세가 되어버렸다.
오, 같이 동승하는 건 말 타는 법을 배웠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옆으로 앉아 품에 안기듯 타게 될 줄이야. 어쩐지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가슴이 설레는 걸 애써 꾹 참아냈다. 정말 아무 고민 없이 저 안락하고 포근한 그의 널찍한 품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을 겨우 가라앉혔다.
“천천히 달릴 테니까 겁먹지 말고. 불안하면 내 팔 잡아.”
게다가 또 이렇게 친절하다니.
예전에 파이가 말 타는 법을 가르쳐줬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허리 똑바로 세우고 어깨에 힘을 빼야지. 하체 힘으로 버텨.]
[으,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니까요?]
[시작은 네가 했으니 노력이라도 해. 만일 오늘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다음부터는 말에 탈 생각도 하지 마라.]
마치 사자가 힘없는 새끼를 다루듯 얼마나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이었던가! 지금은 또 바람만 조금 불어도 쓰러지는 꽃을 다루듯 섬세하게 챙겨주니까 그게 너무 낯선 거다.
진작 이렇게 해줄 것이지!
나는 얄미운 그의 팔뚝을 감싸 잡아 일부러 꽉 꼬집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파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릴리를 출발시켰다.
드래곤은 통각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이었던가.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어 불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는 내내 나와 파이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동경과 경외의 시선인 걸 보니 또 우리 파이를 훔쳐보는 여느 여성들이겠지. 하지만 이 돌덩이 같은 남자 옆에서 1년만 있어봐. 나처럼 정떨어져서 도망치고 싶을 거다.
“프리센의 국왕이 너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알고 있나?”
“음? 글쎄요?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틀린 말은 아니군.”
되는대로 뱉은 말인데 그걸 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이가 긍정하니까 조금 어이가 없었다.
“흠흠, 내가 좀 예쁘긴 해요. 그러니까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인기가 많았지. 솔직히 나 데려가겠다는 남자들은 진짜 많았는데.”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놈은 없었어.”
…사실 나도 그랬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없었다. 워낙 파이만 보고 자란 것도 있고. 파이를 보러 가끔 오던 파이의 친구들도 대단한 미남자들뿐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인기 많은 남학생을 봐도 딱히 감흥이 없었다.
이게 다 파이 때문이야. 내가 당신에게 반하게 된건 전부 당신 책임이라고!
콧방귀를 폴폴 뀌면서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릴리를 재촉했다. 왕국 중앙에 버젓이 세워진 커다란 성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늘 멀리서만 보던 프리센 왕궁은 장난감 같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엄청 크다. 근처로 올 일도 없었고, 딱히 성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으니까.
“우와. 크기 봐. 엄청나네요? 아카데미가 있던 제국의 성이 더 크긴 했지만. 느낌이 좀 많이 다르네요.”
“그 제국보다 프리센 왕국의 역사가 더 오래 되었지. 2천년쯤 왕조가 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진 이래 그 혈육이 계속 왕좌를 이어가는 것 같던데.”
“2천년?!”
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역사다. 나는 겨우 20년 살아온 햇병아리라고 만날 파이가 놀렸었는데. 뒤에 공이 두 개나 더 붙었으니 그저 까마득하다.
그 위엄 넘치는 왕궁 근처에 다다를수록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건물도 없이 그저 곳곳에 키가 큰 나무들만 서 있었다.
왕궁에 가까이 다가가니 거대한 성벽 주위로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경계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이 끊어졌는데요, 파이?”
강 앞에 멈춰선 파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는데, 그 순간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랐다. 곧 커다란 쇠사슬에 묶여 성벽에 세워져있던 튼튼해 보이는 나무다리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파이의 옷깃을 더욱 꽉 잡아채고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노, 놀랬잖아!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파이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이가 급하다고 할 정도로 나를 빨리 만나려는 이유가 뭘까? 그것도 남들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 왕궁의 음식을 주겠다고 하면서?
커다란 나무다리가 반쯤 내려오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아치형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뿌연 먼지를 매단 채 질주해서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말?
그것도 릴리보다 더 건장해 보이는 흑마였다. 우리 릴리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는데 쟨 더 크고 우람하네. 그 흑마위에 탄 누군가가 아치형의 입구를 향해 달려와 우리하고 점점 가까워진다. 그 흑마 뒤로 또 한 무더기의 왕궁 기사들이 빠르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파, 파이. 내가 뭘 잘못했어요?”
“잘못했지.”
“헉! 그, 그, 그럼 나 잡혀가는 거야? 저 사람들이 나 잡아가려고 저러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저렇게 덩치가 산만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엄청 전투적으로 다가오고 있어서 잔뜩 겁을 먹었다. 무서워서 파이의 옷깃을 더욱 꽉 잡아채며 억울함을 가득 담아 울먹거렸다. 그랬더니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네가 멋대로 가출을 시도했으니 잘못한 게 맞아. 아주 큰 잘못이지.”
…가출했다고 저 왕궁기사들이 날 혼내주러 오는 거라고 말하려는 거야?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그걸 믿겠어?
사실이든 아니든 당장 파이가 있으니까 날 쉽게 잡아가진 않을 거다. 그리고 난 떳떳해. 죄가 없다고!
그러나 괜히 조마조마해서 식은땀이 삐질 흐를 정도로 불안해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무리들과 파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사이에 서서히 내려오던 나무다리가 바닥에 안착했다. 그리고 잘빠진 흑마를 타고 선두로 달려오던 남자가 나무다리의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어……? 나랑 머리카락 색이 똑같잖아?’
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흐트러져있기는 했으나 누가 봐도 나와 똑같은 머리카락 색이었다. 커스터드 크림처럼 밝은 노란빛을 머금은 머리카락. 나와 너무 흡사한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 봤다.
아카데미에서도 짙은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몇 있긴 했었다. 하지만 나하고 이렇게까지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래서 내 머리카락을 탐내는 애들이 참 많았는데.
전에 어떤 남자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조금만 잘라 가면 안 되겠냐고 해서 기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졸업선물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는 걸 완강하게 거부하긴 했다. 그 선배 주위에 있던 다른 선배들도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이러다가 내 머리카락이 다 잘려나가겠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났거든.
아무튼 나하고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을 만나니까 되게 반갑긴 한데… 뭔가 무섭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남자의 표정이 파이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파이만큼 건장하고 듬직한 체격이 꽤 남자답고 외모도 잘생긴 편이었지만, 파이보다 별로고.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다. 왕궁에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
응? 설마 저 사람, 국왕인가? 아니, 사람이 초대를 했으면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파이의 가슴팍에 더 밀착하면서 조금 긴장을 머금은 채 물었다.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가 나와 똑같은 백금발을 가볍게 손으로 휘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 이런. 인사가 먼저였군. 나는 프리센 왕국의 왕세자 ‘프란시스 아르란트 프리센’이라고 한다. 거기 아름다운 아가씨를 초대한 이가 바로 나다.”
아름다운 아가씨라니. 저 사람, 제법 보는 눈이 있잖아? 왕세자라서 그런가?
그의 차분한 기세에 살짝 겁먹었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그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에 긴장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대신 도도하게 콧대를 한껏 높인 채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초대는 감사한데 너무 무례하지 않나요? 저는 제가 무슨 죄를 지어서 잡으러오는 줄 알았다고요.”
괜히 심술이 나서 투덜거리며 콧방귀를 뀌자, 왕세자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왕세자가 혼자만의 몸은 아니다 보니 그대에게 결례를 범했군. 겁을 먹게 했다면 사과하겠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는 넓은 아량으로 그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어요.”
“그대가 왕궁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를 직접 안내하고자 온 것이니 사양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되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운 말투에다가 활짝 웃는 미소에는 자신감마저 넘쳐흘렀다. 역시 왕족은 뭔가 다른가 봐. 저렇게 밝게 웃으니까 아주 빛이 나네. 아주 잠깐 심장이 두근 뛰었던 건 비밀.
“안으로 들어오지. 아바마마께서도 그대를 기다리고 계신다.”
아바마마라면 국왕 전하? 그나저나 대체 국왕이라는 사람이 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일개 평민에 가까운 사람이다. 운 좋게 드래곤에게 길러지긴 했지만 드래곤에게는 작위라는 게 없으니까 평민 맞지. 그런데 보통 왕족들이 평민을 식사자리에 초대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 평민이 대단한 공을 세워서 치하하기 위한 상황이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