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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27화 (27/132)

♬  #27

아아. 출입증이었구나. 그런데 겨우 출입증 하나에 기사들 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게 말이 되냐고.

“겨우 그것 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출입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소속된 왕국의 국왕들뿐이다. 그러니 저들은 내가 어느 왕국의 왕이려니 생각하는 거다.”

평소에는 몰라도 된다고 말을 뚝 자르던 그가 이제는 일일이 설명을 다 해준다. 웬일이람? 연애 상대한테는 곧이곧대로 털어놓는 성격이었던 걸까?

물어보고 싶은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꽤 많네요? 무슨 날인가?”

“해마다 봄이면 축제를 열잖아. 늘 네 생일 때마다 외출하면 축제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던 걸 잊었나?”

“그, 그랬던가?”

3년간 타지에서 지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더 좋은 건, 축제라서 사람이 많을수록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이 많아진다는 거다.

불판에서 구워지는 꼬치들의 향연. 특히 짙은 밤갈색과 붉은 계열의 특제 소스에 풍덩 빠져 매콤한 향신료와 노릇노릇한 치즈가 잔뜩 뿌려진 닭꼬치. 그건 축제에서나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별미였다. 가장 신기했던 건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듯 탱글탱글한 식감을 자랑하는 통통한 문어다리였다. 짭조름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아주 특이했지. 먹다가 옷에 소스라도 흘리면 어쩌나 싶지만, 파이가 알아서 처리해줄 거다.

나는 물장구를 치듯 다리를 파닥거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확실히 수도 안쪽은 성벽 바깥보다 덜 춥다. 망토를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따뜻했다.

“이거 벗으면 안 돼요?”

“안 돼. 입고 있어. 후드도 쓰고.”

만날 내가 뭐만 하면 안 된대. 또 골이 잔뜩 나서 입을 삐죽거렸다.

“더운데…….”

포기하지 않고 칭얼거리자 겨우 후드는 벗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진작 그렇게 해줄 것이지.

“앗! 저거! 소시지 핫도그!”

3년 만에 온 왕국 수도는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곳이 많았다. 특히 맛좋은 칠리 소시지 핫도그를 파는 가게가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너무 기뻐 손뼉까지 쳤다. 어렸을 때 먹던 음식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걸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으니까.

구석진 나무 아래로 가서 나를 말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와준 파이가 고삐를 나무 근처에 묶어두었다. 그리고 내 손을 맞잡은 채 핫도그 가게로 걸어갔다.

“나 주스도 먹을 거예요.”

“얼마든지.”

“소시지 핫도그도 두 개나 먹어 치울 수 있어요.”

“일단 하나 시키고, 부족하면 더 사줄게.”

확실히 전과 다르게 파이가 내 말을 다 받아주고 일일이 귀담아 들어줬다. 마치 진짜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또 막 감정이 솟구쳐 올랐지만! 참아야지. 이건 역할놀이일 뿐이야. 어릴 때 하던 소꿉놀이 같은 거라고. 좋다고 다 막 좋은 티를 내면 안 돼.

그래서 표정을 갈무리한 뒤에 입을 다물고 조신한 걸음걸이로 파이와 나란히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음식점에 도착하자 파이가 바깥 테이블 자리에 나를 앉혔다.

“늘 먹던 거로?”

“네!”

“알았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네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파이가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파이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찍한 테이블 위에 양쪽 팔꿈치를 얹어놓았다. 손깍지를 껴 그 위에 턱을 얹어놓고 잔뜩 들뜬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발끝으로 사락사락 밀며 향긋한 구운 소시지의 향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지금이 절호의 기회잖아? 주문한 소시지가 구워져 나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릴리도 근처에 있고. 도망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다.

한번, 시도해봐?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받친 그대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서 음식점 안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가 움찔거리며 바짝 얼어붙었다. 유리창 안쪽에서 이제 막 계산중인 파이와 정확하게 눈이 딱 마주쳐서 그랬다.

오, 이대로 도망가려고 일어났다면 바로 붙잡혔겠다. 언제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이 계속 내게 고정된 채다. 덕분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나는 아닌 척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만지작거리고 어색한 표정을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치아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구경하는 척했다.

아, 심장 떨려!

곧 계산을 마친 파이가 음식점을 나와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나는 아까보다 더 방긋 웃어주었다.

“칠리소스 많이 넣어달라고 했어요?”

“치즈. 방금 도망갈 생각 했지?”

그러나 동문서답으로 돌아온 물음에 나는 속으로 경악하며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과연 알고 묻는 걸까? 아니면 한번 떠보려고 은근슬쩍 투척한 물음일까?

“내가 도망가길 바라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뻔뻔해야 한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자 조금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보던 파이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피식,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혹시 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이 있었나? 내가 듣기로는 그런 수업은 없었는데 참… 앙큼해, 우리 치즈.”

“여, 연기라니! 나는 진짜 진심으로 묻는 건데? 혼자 지레짐작해서 떠보려고 하지 마요!”

“너는 거짓말을 할 때, 늘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렸다가 턱을 치켜들고 평소보다 더 안면몰수 하는 버릇이 있었지. 지금도 그랬다.”

“…내가요?”

처음 듣는 말이다. 나한테 그런 버릇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매번 내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그가 귀신처럼 눈치를 딱 채버렸다. 그래서 거짓말을 너무 티 나게 하나 싶었는데. 내가 정말 그런 행동을 거짓말 할 때마다 했다면… 아, 부끄러워. 창피하잖아!

“다시 물을게. 방금 도망가려고 잠시 고민했지?”

추궁하는 것 치고는 목소리가 상당히 부드럽다. 하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너무 강렬하다. 마치 손대면 손가락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 목구멍이 콱 막혔다.

그 눈빛에 더 주눅이 들어 대답도 못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그러자 파이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아카데미에 다닌 이후부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 늘었어.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보낸 건 내가 실수한 것 같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입술만 잘근 씹었다. 우물쭈물 하던 그때, 칠리향을 가득 뿜어내는 커다란 소시지 핫도그 접시가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예쁘장하고 발랄한 목소리의 젊은 여성이 접시와 딸기주스 잔을 조심스럽게 놓고 홀랑 가버린다.

오, 역시 예뻐!

커다란 접시 가장자리에 노란 머스터드소스로 방긋 웃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사실 여기는 핫도그도 맛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접시에 이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바로 이것. 보기에 좋은 음식이 더 맛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달달하고 매콤하면서 톡톡 쏘는 칠리소스의 냄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반쯤 자른 기다란 빵 사이에 노릇노릇 구워진 소시지가 요염하게 누워있다. 그 위에 이불처럼 덮인 다진 야채와 칠리소스가 듬뿍!

아아, 침이 고인다. 빨리 먹고 싶어!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눈동자를 굴려 파이의 눈치를 살짝 봤다. 곧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고 간 파이가 나이프로 핫도그를 작게 잘라 열 토막을 내주었다. 열 입이면 뚝딱 해치우게 되어 슬프지만, 저걸로도 꽤 배가 부르니까 괜찮아.

“자. 천천히 먹도록 해.”

한입크기로 잘라놓은 핫도그 접시를 내게 밀어준 파이가 내 손에 포크를 쥐어주었다. 나는 잘라진 핫도그를 콕 찔러 허겁지겁 입안에 밀어 넣었다.

“아, 맛있어!”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천천히 꼭꼭 씹어야지. 주스도 마시고.”

방금까지 거짓말했다고 혼내던 파이는 어디로 갔는지. 내가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다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다가 내 입가를 빤히 쳐다봐서 바짝 긴장했다.

왜, 왜 저런담?

씹는 것도 멈추고 눈치만 살피자 파이가 내게 손을 뻗어 와서 더 깜짝 놀랐다. 혹시나 무슨 짓을 할까 싶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가에 묻은 칠리소스를 닦아내준다. 그러더니 제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혀로 핥아 맛을 보고는 미간을 확 좁혔다.

“단 냄새가 강해서 달달한 소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속 버리겠어.”

나는 얼굴을 확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안에 든 핫도그만 오물오물 씹었다.

아니, 보통 냅킨으로 닦아주더니 오늘 갑자기 왜 저래?

음식을 정신없이 흡입하는 내 입가를 손가락으로 직접 닦아내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걸 핥아먹는 것도.

이, 이러다가 나중에는 혀로 직접 핥아주는 걸까? 하… 한번 당해보고 싶어! 파이가, 내가 아는 그 파이가 나한테! 꺄!

“실례하겠습니다.”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두 번째 핫도그 조각을 찍어 입에 넣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나와 파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앉아있는 곳은 무릎 높이의 울타리가 세워진 곳의 가장자리여서 바로 옆이 길거리이긴 했다. 그 길 쪽에서 나를 향해 말을 건네는 중년의 남자가 아주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꼭 우리 아카데미에서 생물수업을 가르쳐주던 그 선생님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미중년이라고 하던가?

“무슨 일이지?”

나는 입안 가득 핫도그가 들어있어서 말도 못 하고 두 눈만 끔뻑거렸는데, 파이가 대신 묻는다. 그러자 그 남자가 파이를 향해 다시 묵례를 하고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잠시 저희와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파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고위 귀족인가 보군. 귀족이 내 아이에게 무슨 볼일이지?”

내 아이라는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봤다. 기왕이면 내 여자라고 해야지, 저것도 버릇이라 어쩔 수 없나? 파이는 매번 나를 ‘내 아이’라고 소개했으니까.

“높으신 분께서 아가씨와의 만남을 청하고 계십니다. 그 높으신 분을 이곳에서 감히 언급하기 어려우나, 아가씨를 왕궁으로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왕궁?

나는 또 커질 눈도 없는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면서 파이를 쳐다봤다. 파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있어서 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어쩐지… 파이 친구라는 사람들이 놀러 와서 나한테 손을 대려고 하던 그때의 그 표정이다. 마치 손대면 물어버리겠다는 충견처럼 경계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해진다.

나는 파이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중년 남자와 파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포크를 입에 물어 쪽쪽 빨았다. 물론 맛있는 칠리소스를 가득 품은 핫도그 조각을 오물오물 씹어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궁이라면, 프리센 왕국의 국왕인가?”

“…그렇습니다. 국왕 전하와 왕세자 저하께서 아가씨를 특별히 오찬에 초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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