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괜히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면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파이도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나이프 질을 계속했다.
팔뚝 근육 봐라. 굵기는 또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것보다 내가 저 팔에, 저 몸에 안겨서 어른이 되었다고 자각하니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레이라! 나 성공했어! 넌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만나면 참 할 얘기가 많은데!
“저기…….”
갑자기 레이라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졌다. 말끝을 흐리면서 시선을 내리다가 흠칫 놀랐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무슨 병에 걸린 줄 알았다. 가슴부터 배까지 울긋불긋한 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는데, 몇 군데는 멍처럼 약간 보랏빛으로 변한 곳도 있었다.
이, 이게 진정한 어른이 된 증거이자 훈장인가. 왠지 무섭다. 좀… 징그러워.
슬쩍 손가락 끝으로 붉은 자국을 톡, 눌러봤지만 아프진 않았다. 신기한 마음에 계속 여기저기 자국들을 손끝으로 쿡쿡 찌르는데 집중했다. 그 사이에 파이가 접시를 들고 내 쪽으로 걸어온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접시를 내려놓으면서 손에 든 포크로 잘게 잘린 양고기를 찍고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응?
그 행동이 너무 의아했다. 나는 받아먹기 전에 의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침대에서 밥 먹는 거 못하게 했잖아요?”
“그런 건 따지지 말고. 자, 어서 먹어. 더 식으면 맛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먹어야지.
나는 파이가 살살 흔드는 고기를 향해 입을 동그랗게 열어 고기를 입안에 쏙 집어넣어 머금었다. 고기를 씹자 나도 모르게 흐음, 하는 만족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레몬 맛과 달착지근한 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갈색 소스는 언제 먹어도 최고였다.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더욱 고파질 정도다.
그래서 나는 파이가 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맛있나?”
“웅!”
“고기가 맛있어? 아니면 내가?”
“…….”
정말 열심히 야무지게 씹고 있던 턱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당황한 두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묻는 거야?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파이가 잔뜩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솔직히 대답을 해야지.’
나는 입속에 남아있는 고기를 대충 씹어서 목구멍으로 꼴딱 넘겼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은 소스도 쪽쪽 빨아먹고 나서 목을 조금 가다듬었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핥아 남은 소스를 제거한 뒤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파이는 맛없어요. 너무 힘들었거든. 고기는 날 괴롭히지 않는데 파이는 날 엄청나게 괴롭혔잖아?”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저릿하다. 꼭 아카데미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 오래달리기로 트랙 열 바퀴를 돌고 난 다음날보다 더 아팠다. 격렬한 운동을 한 느낌.
물론 그게 나름 운동이긴 하지. 계속하면 살이 빠질 것 같긴 하다. 남자가 가슴을 만져주면 더 큰다고도 했는데. 아니야. 이 이상 커지면 어깨가 더 아파질 거야. 그렇지 않아도 뛸 때 엄청 불편하다고.
아무튼, 정사가 그런 격렬한 운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좋았지만.
“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 한 번은 모르고 해도 두 번은 못 할 거였어. 응. 확실히.”
내가 내 말에 동조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파이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일었다. 지금 저 표정은 내가 생떼를 부릴 때 나오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다가 바짝 긴장했다.
“왜 그래요, 파이?”
“내가 싫은가?”
“…내가 파이 싫어한 적 있어요? 뜬금없이 싫냐니?”
“나는 어제 분명히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끝날 일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요.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첫날밤 이후 의문스러운 말을 했던 파이. 앞으로 잘하겠다느니, 생각보다 꽤 오래 끝나지 않을 거라느니.
분명 내가 첫날밤을 제시했던 엊그제의 그는, 하룻밤을 보내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가겠다던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재차 확답까지 받아가면서 약속을 지키라고 했었다.
그 약속, 지켜주려고 가출을 결심했다가 붙잡혔지. 그 뒤로 갑자기 변해버린 파이의 모습이 매우 낯설기 그지없었다.
어제도 자기는 사정을 하지 않았으니 끝난 게 아니라며 밀어붙였었다. 그리고 한번 사정했었는데도 다 끝나지 않았다고 또 밀어붙이기까지. 내가 참다 참다 못 참고 눈물을 보이고 나서야 그만두긴 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나하고의 정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데. 그럼 내 몸을 탐내는 건가? 그렇다면 좀 매우 많이 절망적이고 실망인데……?
괜히 주눅이 들어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대체 파이는 무슨 생각인 걸까? 이러려고 날 키운 건 아니었을 텐데.
만약 내 몸만 원했다면 내가 첫날밤을 제시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 하고 기다렸다는 듯 덮쳤을 거다. 하지만 그때 그의 표정은 평생 보기 어려웠던 황당함을 담고 있었다. 그만큼 당황한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아닌가?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제도 그런 표정을 봤었고.
나는 다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그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심장이 바짝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따끔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눈빛을 담은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어서 그랬다.
아니, 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이래저래 다시 방금 상황을 떠올리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따져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파이 맛없다고 구박해서 그런가? 그런데 그걸 먹는 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잖아? 사실 저 고기랑 그… 그… 그, 그의 살덩이랑 색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실 고기는 소스 맛으로 먹는 거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그의 살덩이를 직접 맛본 적은 없다는 거다. 맛도 안본 고깃덩어리의 맛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더 설명이 필요한가?”
파이가 또 음산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되묻는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대체 왜 화가 났을까? 나 정말 모르겠네.
“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인데, 파이는 지금 결과만 말하고 있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곧 내 말에 따갑게 노려보던 시선을 내리깔고 또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가, 그렇군.”
그 틈을 이용해 나는 다시 접시에 놓인 고기에 손을 뻗었다. 우선 당장 배가 고프니까 먹어야 그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또 접시 위의 고기를 집었다.
“안 돼. 다 씹고 먹어.”
하지만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는 바람에 고기가 접시위로 툭 떨어져버렸다. 눈앞에 고기가 있는데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그 서러움을 이 남자가 알기나 할까?
물론 파이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웬만해서 다 주기는 했다. 내가 허겁지겁 먹는 걸 싫어하는 터라 먹는 속도가 빠르다 싶으면 지금처럼 제어를 시키는 거다. 사실 아카데미 입학 초반에 너무 급하게 먹어서 체했던 전적이 있다 보니 내가 할 말이 없네.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해요.”
괜히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그가 주먹을 말아 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한다. 그러더니 포크로 고기를 찍어 내 입속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나는 열심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곧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자, 그가 그릇을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냅킨을 가져와 내 입가를 정리해줬다.
그런데 저 살덩이 참 신경 쓰이네.
각 잡힌 근육 아래에 매달려 저 혼자 덜렁덜렁하는 거대한 물건이 약간 뻣뻣하게 세워진 채다. 뭔가 흉기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이놈의 눈동자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자꾸만 그쪽으로 가려고 하니 문제다.
정말 버섯 같아. 버섯이랑 똑같은 맛이려나? 버섯은 조리된 것만 먹어봐서 원래 맛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치즈.”
그의 하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멍하니 시선을 돌리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러다가 얼굴에 열이 확 몰려버렸다. 침대 바깥에 서서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너무 실감나서.
아, 민망해.
“나 씻을래. 찝찝해요.”
“씻겨줄게.”
“됐어. 내가 할 거야.”
침대를 빠져나가려 몸을 들썩거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윽. 내 근육. 내 허리!
“씻겨준다고 했잖아. 고집부리지 마라. 그러다가 근육이 다치면 회복이 더 늦어진다.”
어쩔 수 없이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파이에게 매달려 안겼다. 아픈 건 싫으니까.
욕실로 들어온 파이가 나를 안은 채 욕조에 붙어있는 복잡한 꼭지 몇 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커다란 수도꼭지를 한 손으로 가볍게 열자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붙잡고 낑낑 힘을 써야 겨우 여는 뻑뻑한 꼭지인데. 그는 접시를 드는 것만큼이나 너무 쉽게 열었다.
정말 대단하네. 힘도 좋아.
그리고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내 오리들을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마력으로 공중에 둥실 뜬 오리들이 욕조 속으로 퐁당퐁당 입수했다.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벌꿀향 입욕제를 부어 거품을 잔뜩 일궈냈다.
어제오늘 정말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너무 잘 보이고 있다. 정말 웬만한 일이 아니면 마력을 잘 사용하지 않는 그라서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신기할 따름이다.
욕조에 물이 어느 정도 차기 시작하자, 나를 안아 든 채로 목욕용품을 이것저것 꺼내서 차곡차곡 정리하던 그가 욕조로 향했다.
“온도가 조금 뜨거울 거야. 근육이 아플 때는 뜨거운 물로 풀어주는 게 좋다고 했다.”
“어, 어어? 잠깐만! 내려놓지는 말고!”
나를 그대로 욕조에 내려놓으려는 파이에게 더 달라붙어 버둥거렸다.
“왜?”
“온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을 해야지! 바보! 그러다가 살이 다 익어버려서 고기가 되면 어떡하라고!”
욕조 안에서 퍼져 나오는 수증기와 열기가 매우 수상하다. 눈으로 봤을 때 예상컨대 저 욕조 안으로 입수한 살갗은 전부 붉게 익어버릴 것이다. 보글보글 용암처럼 들끓는 것만 아닐 뿐이지 온도가 제법 높아 보였다.
나는 그의 품에 매달린 채 다리 한쪽만 옆으로 빼서 조심조심 수증기 속으로 발끝을 밀어 넣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발가락 끝을 천천히 움직이는데, 수면에 닿기도 전부터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건 그냥 뜨거운 물만 틀어놓은 거다. 이대로 입수하다가는 내 피부가 전부 새빨갛게 익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나는 수증기 속에 담갔던 발을 다시 빼내 파이의 허리에 감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뜨거워요. 찬물을 섞어야겠어요.”
“온도가 안 맞나?”
“응. 매우 많이 안 맞아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하자, 그가 다시 작은 꼭지 하나를 닫고 다른 꼭지를 열었다. 동시에 시원한 물줄기가 콸콸 쏟아지면서 서서히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면을 가득 메우던 수증기도 점점 사라져갔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어. 하마터면 잘 익은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