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고등 아카데미 과정은 총 3년. 나는 이제 1학년이지만 리브엘은 3학년이라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입학할 때부터 나만 보면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남학생 중 한 명이었지. 아주 좋아죽겠다는 표정이라 그게 너무 눈에 훤히 보였다. 마치 내가 파이에게 매달리는 그 모습과 아주 흡사해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나를 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설마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잠깐 지나가는 말로 그러기는 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네. 1년이 그렇게 금방 갈 줄은 몰랐어. 곧 귀국하면 서운해지겠는데?]
[왜 서운해?]
[너를 보지 못하게 되니까. 아카데미 시절이 많이 그리울 거 같아. 최근 1년이 내게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거든.]
[그럼 아카데미에 자주 놀러오면 되지. 나야 앞으로 2년간 여기 머물고 있을 테니까.]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긴 했었다. 그때도 나를 보는 리브엘이 굉장히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도 다시 입을 다문 것만 수십 번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뭔가 결연한 표정이다. 대단한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바짝 그러쥐기까지.
“뭔데? 할 얘기 있으면 지금 해야 해. 곧 나 파이… 아, 아니 우리 키다리 아저씨가 날 데리러 올 거야. 아마 지금 거의 도착했을 텐데.”
“그, 그게…….”
“치즈!”
오! 익숙한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파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마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파이가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이 다 파이를 쳐다보는 것도 보였다. 사람 보는 눈이란 다 똑같지. 저 조각 같은 얼굴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나는 새삼 파이가 잘생겼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파이! 왔어요?”
그런데 파이의 표정이 이상하다. 눈빛이 사납게 번뜩거리는 것이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내 팔을 잡아서 나를 보호하듯 자신의 등 뒤에 숨긴다. 그러더니 마치 납치범을 보는 살벌한 눈빛으로 리브엘을 내려다봤다. 리브엘도 작은 키는 아닌데 파이가 워낙 커서 약간 겁먹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치즈에게 무슨 볼일이지?”
“…누, 누구십니까?”
“치즈의 보호자다.”
…기왕이면 남자친구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데. 보호자라. 맞는 얘기인데도 나는 어딘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파이. 이쪽은 우리 아카데미 학생회장이에요. 그리고 여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요.”
그러자 파이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기다린다고? 왜.”
“살 게 있어서요.”
“과자라면 저택에도 잔뜩 있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라고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막대과자 살 거예요!”
“안 돼. 외부에서 파는 과자는 몸에 좋지 않다.”
아니, 내가 먹을 게 아니고 당신 줄 건데?
“그, 그래도 사야 하는…….”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지. 곧 해가 진다.”
“어, 어어?”
결국 나는 파이의 손에 이끌려 마차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마치 리브엘이 나한테 고백할 것을 알아차린 듯 미리 방어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금세 속상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한 시간 내내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나 더는 못 참아요. 우리 따로 살아야겠어! 나도 내 개인적인 일이 있는 건데!”
“네가 아카데미에 보내 달라고 했을 때 그런 조건은 없었다.”
“솔직히 이건 너무하잖아요! 나는 수업 끝나고 친구들하고 같이 수도에 나가서 놀고 싶다고. 디저트 카페도 가고 멋진 레스토랑도 가서 칼질도 하고!”
“매주 수도에 나가서 놀고 네가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칼질도 자주 하고 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친구랑 파이가 같냐고!”
“다를 것도 없지.”
“…그리고 매일 길에서 왕복 두 시간을 썩는 거, 그리 효율적이라고는 생각 못 해요. 그러니까 나 기숙사 들어갈래요.”
“안 돼.”
“…만날 뭐만 하면 안 된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파릇파릇한 청춘이고 이 나이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발로 마차 바닥을 탁! 내리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시위하듯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럼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무시했다. 늘 그렇듯 먼저 지쳐 포기한 것은 나였다.
“막대과자라고 했나?”
“몰라! 이 고집불통 벽창호야!”
“원한다면 내일 수도에 같이 사러 나가지. 혼자는 안 돼.”
“…진짜요? 내일 같이 가줄 거예요?”
“응.”
해가 서쪽에서 뜨는 줄 알았다. 정말 울적해서 좌절감에 눈물을 쏟아낼 뻔했는데. 그가 같이 가준다는 말 한마디에 침울하던 감정이 급격하게 상승해버렸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꼭 가요? 나 꼭 사야 한단 말이에요!”
막대과자를 사서 파이의 입에 넣어주고, 내가 반대쪽을 입에 물면…….
순간 이마에 열기가 몰려 코피를 터트릴 뻔했다. 그래도 좋아. 마치 공중에 붕 뜬 기분이라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뺨을 손으로 감싸 쥐고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내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말 슬프게도 나는 다음날, 감기가 찾아와 고열에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덕분에 저택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 * *
“끙, 억울해. 억울해. 너무하잖아… 흑.”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다. 그때의 억울한 마음이 아직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올 정도로 억울함에 잠을 설치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치즈. 식사해야지.”
어? 파이 목소리다.
그런데 방금 꿈에서 들었던 차갑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아니다. 어딘지 나긋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아 얼떨떨했다. 그 억울했던 느낌이 점점 잠잠해지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온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열심히 움직였다. 곧 시야에 빛이 트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끄응, 배고파.
꼬물꼬물 몸을 움직이다가 이상하게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 또 어리둥절했다. 어쩐지 근육이 좀… 욱신거리기도 하고?
“으… 이, 이상해. 몸이… 파이, 몸이 이상해요…….”
낑낑 강아지 앓는 소리를 내면서 울먹거렸다. 허리며 팔다리가 전부 아파서 죽겠는데 파이는 그저 기분 좋게 웃기만 했다.
“무슨 꿈을 꾸는데 억울해 죽겠다고 하소연인지. 내가 힘들게 해서 억울한 건가? 나야말로 억울한데?”
알아먹을 수도 없는 말을 하는 파이가 나를 조심히 안아 일으켜 앉혀놓는다. 눈도 잘 떠지지 않아서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것도 힘들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전신이 축축 늘어져서 앉아있기도 힘이 들어 파이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툭, 얹어놓으면서 깨달았다. 그가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을.
“파이, 왜… 옷도 안 입고?”
“이게 편해서.”
거짓말. 늘 단정하게 옷을 챙겨 입던 남자가?
더러운 것이 몸에 묻는 것을 싫어한 그다. 옷에 얼룩이 지거나 물에 적셔지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나를 목욕시킬 때는 무조건 탈의를 했다. 그리고 노출을 좋아하지 않아서 무조건 온몸을 꽁꽁 감싸는 의복을 입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옷을 입지 않으면 미개인 같다고 여기는 남자였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 굉장히 낯설다. 그러다가 잠들기 직전에 첫날밤 이후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서 이렇게 몸이 아픈 건가? 그런데 첫날밤 보냈을 때는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어제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람?
“아파, 아파, 으으… 힘들어. 이게 뭐야!”
팔도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괜히 확 들었다가 툭 내렸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떨어진 곳이 파이의 다리 사이 그곳이라 서로 놀라서 움찔거렸다. 손등에 말랑하고 뜨거운 것이 닿아 슬쩍 피하는 척했지만 늦은 것 같다. 이미… 때려도 너무 세게 때려버려서 미안하고.
“여기 기대고 앉아있어. 식사 가져올게.”
당황해서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데 파이가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베개와 쿠션들을 쌓아 정리하고 그 위에 나를 기대게 앉혀놓는다. 나는 베개에 몸이 반쯤 파묻힌 상태로 얌전히 얼굴을 붉히고 앉아있기만 했다.
파이는 아프지도 않은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음식이 놓인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 더 깜짝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주 살짝 실눈을 떴다.
세상에, 파이가 알몸이잖아?
아니, 저렇게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다. 등 근육이 그래… 응, 내가 저 쩍쩍 갈라진 근육에 또 몇 번 반했었지. 조각조각 예쁘게 자리 잡은 근육이 등줄기를 따라 보기 좋게 모여 있는 모습은 늘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저 탱탱한 엉덩이의 실물은 처음 봤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흐린 눈으로 보다가 곧 두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그랬는데 파이가 갑자기 멈춰서 뒤를 쳐다본다.
“헉!”
나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푹신하게 쌓인 베개위로 쓰러지게 되었다. 물론 덕분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지만.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양고기와 오리고기 중에 어떤 걸 먹겠어? 특별히 신경 써서 재료를 엄선하라고 했으니 영양은 비슷할 거다.”
어제도 고기 먹지 않았나? 그런데 또 고기야?
생선과 야채가 더 영양가가 높다며 고기를 자주 주지 않았는데 웬일일까 싶다. 준다면 또 감사하게 먹어줘야지.
“양고기요.”
“알았다.”
피식 웃는 그가 다시 테이블 쪽에 놓인 접시들 중 한 접시에 놓인 고기를 나이프로 썰기 시작했다. 그 틈을 이용해 나는 이를 악물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 너머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감상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엉덩이 살이 꽤 탄탄해보였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피부는 아주 매끈하니 고와 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 근육이 씰룩거리는 모양새에 갈증이 일었다.
늘 수건으로 가려져 있던 부위를 또 실제로 보니 상상보다 더 예뻤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허벅지 근육도 매끄럽게 뻗어있고 종아리는… 가려져서 안 보이네. 아쉬워.
“파이.”
“응?”
“잠깐 이쪽으로 몸 좀 돌려볼래요?”
그러자 파이가 고기를 해체하던 작업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나를 본다.
앗, 너무 속보였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제정신일 때 그의 앞모습도 자세히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농담이에요. 하던 거 계속해요. 아아, 몸이 뻐근해.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멀쩡한 곳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