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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파이의 딱딱한 표정에 치를 떨며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키다리 아저씨는 워낙 철저하게 선을 긋는 분이라. 목석도 그런 목석이 없지. 가끔 보면 얄미울 정도로 얼마나 계산적인데.]
[…너나 나나. 하필이면 좋아하는 상대가 그런 계산적인 인간들이라니. 정말 웃겨. 이렇게 젊고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가 좋다고 덤비는데 왜 그렇게 밀어내기 바쁜지.]
[내 말이. 흥, 나중에 나를 뻥 찬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덤벼봐. 나도 이번에 졸업하고 나면 시도해보려고 벼르고 있거든.]
[네가? 너희 그 집사한테?]
레이라에게 이런 저돌적인 면이 있는 줄은 몰라서 꽤 놀랐었다. 누가 봐도 차분하고 우아한 한 떨기의 꽃 같은 레이라가 남자에게 들이댈 생각을 다하다니.
[응. 마지막으로 성인식 때 고백하고 차이면 진짜 미련 없이 가문에서 이어준 혼처에 시집가버릴 거야. 나도 이제 지쳤거든.]
[그렇구나……. 하여간 진짜 너희 집사도 그렇고 우리 키다리 아저씨도 그렇고 다 나쁘다. 그렇지? 감히 젊은 아가씨가 좋다고 덤비는데도 그렇게 막 밀어내고 말이야. 남들은 가지지 못해서 안달인데.]
[기회를 놓치는 거지. 바보 같은 짓이야.]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한번 시도해봐야겠어. 진짜 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날 어리다고 밀어내니까 성인식 딱 치를 때 큰맘 먹고 통수를 거하게 날려야지.]
그래서 어제 그 결심을 터트렸다. 내가 하룻밤을 빌미로 저를 포기해주겠다고 선포하면, 파이는 달갑게 수락할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제법 귀찮게 들러붙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물론 내 생각은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파이는 몇십 년이 지나도 절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걸 대비해 아카데미에서 지내면서 외롭긴 해도 파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너 같은 건 잊어주겠다고 굳게 결심해 가출을 준비한 거였단 말이다.
그랬건만, 지금 우리 사이가 굉장히 애매해졌다. 당연히 하룻밤을 보낸 뒤에 서로의 관계가 정리될 줄 알았건만. 파이가 갑자기 이렇게 달라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거리에 나와 함께 쪼그려 앉아있는 것도 이상하다.
“손이 멈췄군. 자, 어서 오리들을 깨끗하게 씻어야 목욕을 하지.”
그가 거품이 가득한 대야의 물속에 담겨있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진짜 기겁을 하면서 뒤로 몸을 젖히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쾅! 찧어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파이는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는 이상 손을 잡아준 적도 없었다. 아까 이마에 뽀뽀한 것도 그렇고. 나와 떨어지기 바빴던 그가 갑자기 다가와서 손까지 덥석 잡는 이 상황, 실화인가요?
설마… 이렇게 은근슬쩍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
하룻밤 보냈다고 갑자기 연인의 감정이 솟구치는 것처럼 충동적인 남자는 아니다. 또한 저 평온한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은 아니란 말이다.
방금 그에게 잡혔던 내 손이 찌릿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뜀박질을 한 것처럼 뛰어대고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러자 파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놀라? 도와주려던 것뿐인데 얼굴이 당근이 되어버렸군. 아, 당근의 당자도 듣기 싫다고 했었던가. 미안.”
그러더니 뒤로 나자빠진 내 손을 조심히 잡아서 일으켜 앉혀놓는다. 뜬금없는 사과의 말까지 뱉어낸 그가 나 대신 대야에 가득 담긴 노란 오리들을 뽀득뽀득 씻기 시작했다. 옷이 거품과 물에 잔뜩 젖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먼지 한 톨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맙소사. 진짜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려는 걸까?
파이는 결벽증이 있어서 옷이 젖거나 더러워지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 굉장히 낯설었다. 내가 물놀이하자고 했을 때도 그는 물놀이용 옷을 따로 지정해서 그 옷만 입고 놀았다. 어린 내가 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흘리기라도 하면 눈빛이 살벌하게 가라앉았단 말이다.
그런 남자가 지금, 제 옷 적셔가면서 내가 목욕할 때 가지고 노는 오리들을 씻기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나 아직 첫날밤 치르고 지금 잠에서 깨지 않은 건 아닐까? 아니면 어제 정사를 치르다가 죽어서 지금 신이 내게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걸지도?
“표정이 예술이군.”
나를 쳐다보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또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모르나 본데 당신 표정이 더 예술이에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히 목을 가다듬고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커다란 욕조로 다가갔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받으면서도 화끈거리는 얼굴이 진정이 되질 않아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옷부터 벗지.”
깨끗하게 씻어놓은 오리 여덟 마리를 욕조 안에 던져 놓은 파이가 내 등 뒤로 다가와 내 몸을 돌려세운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겉옷을 벗기고 내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나는 정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바들바들 떨었다.
아무래도 이거, 좀 이상한데? 많이? 아주… 많이!
블라우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저 남자가… 매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을 일관했던 파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감돌고 있어서.
내가 환상을 보고 있나 싶어 눈꺼풀을 꾹꾹 감았다가 다시 뜨는데도 그대로다. 게다가 내 단추에 집중하는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야해 보이는지. 조금도 비켜 가지 않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블라우스를 벗겨 체형을 잡게 도와주는 쫀쫀하고 간편한 코르셋을 풀어내는 손길은 전과 같았지만.
사실 옷을 입히고 벗기는 건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파이의 일이므로 그렇다 치는데 이제 좀 아니지 않나? 한번 살을 섞었던 사이가 다시 전처럼 거리낄 것 없는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코르셋을 벗기려던 파이의 손을 덥석 잡아 내리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내가… 내가 할 수 있어요. 손대지 마요, 나한테.”
사실 지금껏 어리광을 부리기 위해 파이가 해주는 대로 놔두긴 했다. 가만히 있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이것저것 알아서 다 해주는데 굳이 내가 하겠다고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의 손이 피부에 닿기만 해도 심장이 발작하듯 요동을 쳤다. 어제 내 몸을 어루만졌던 그 기억이 떠올라서 자꾸만 소름이 돋고 아랫배가 욱신거리기도 한다. 다리 사이가 간질거리기도 하고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아무튼 반응이 너무 이상하다.
손가락이 떨려서 앞쪽에 코르셋을 조이는 끈을 하나하나 풀어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파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내게 다가온다. 그가 가까워져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하지만 나보다 그가 더 빨랐다. 갑자기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심장이 또 철렁 내려앉았다.
“왜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는지 모르겠지만, 상처받았다면 사과하겠다. 나는 너와 전처럼 지내고 싶어.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용서해다오. 앞으로 내가 잘 하겠다.”
대체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파이가 나한테 사과를 하면서 용서를 빌고 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전처럼 지내자고?’
나는 문득 파이의 그 말을 되씹었다. 어떻게? 지금처럼 나더러 혼자 짝사랑을 계속 하라는 의미? 왜? 내가 관심을 덜 주니까 이제 좀 아쉬워서?
순간 기분이 확 나빠져 버렸다.
얄미워, 얄밉다고! 먹을 거 다 먹어놓고 책임진다는 얘기도 아니고 전처럼 지내자니? 나는 그동안 이 심장이 다 타들어 가서 잿더미가 되고도 산산이 부서졌다고.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거 놔요. 나 목욕할 거야.”
신경질적으로 몸을 비틀자 파이가 나를 놓아주면서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미 늦었어.’
화가 나서 콧방귀를 팩 뀌면서 짜증을 가득 담은 손길로 코르셋을 풀고 치마를 벗었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양말과 신발까지 휙휙 벗어서 일부러 전부 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왜냐하면 이게 벗은 옷을 차곡차곡 개서 정리하는 파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입욕제를 욕조에 가득 뿌린 뒤에 팔로 휘휘 저었다. 온도가 제법 알맞게 따뜻해져서 첨벙첨벙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갔다. 그리고 따뜻한 물속에 잠수하고 있는 오리들을 똑바로 줄지어 물 위에 얹어주었다.
그 사이에 파이는 내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직접 주웠다. 그러더니 차곡차곡 개어 욕실의 나무의자 위에 얹어놓는다. 잔소리가 한번 나올 법한데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눈치를 살펴서 그러는 건지. 내 눈치를 볼 남자가 아니긴 한데.
그게 조금 불안해진다. 차라리 뭐라고 한소리 하면 마음이라도 조금 편해질 텐데. 나는 여전히 오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야 끄트머리에 있는 파이에게 온 신경을 쏟아 부었다. 내 옷을 다 정리한 그가 제 옷을 훌렁훌렁 벗고 있어서 더 긴장했다.
아니, 목욕할 때 늘 그랬잖아? 신경 쓰지 말자. 나를 씻겨주려면 늘 옷을 벗고 수건으로 하체만 가렸으니까.
그런데 옷을 벗다 말고 갑자기 욕실을 나가버려서 조금 의아했다.
왜?
그러더니 손에 곰돌이 타월을 들고 다시 들어와서 흠칫 놀라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니, 그만 좀 신경 쓰자. 일일이 반응을 보이지 말자고.’
“우리 오리들이 이렇게 많아져 버렸네? 안 그래도 대가족인데 가족이 더 많아져서 좋겠다. 북적북적해. 욕조가 가득 차버렸어!”
나는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었다. 거품이 가득 올라온 수면을 손바닥으로 휘저어 물살을 만들면서 오리들과 노는데 집중했다. 그사이에 가까이 다가오는 파이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또 바짝 긴장했다.
반응을 보이면 안 돼. 침착해, 침착해라 심장아.
그랬는데 파이가 갑자기 긴 다리를 뻗어 욕조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행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휙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필… 시야에 들어온 것이 그의 다리 사이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살덩이였다. 덕분에 나는 소리 없이 경악하고 다시 고개를 휙 돌려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그의 짙은 구릿빛 피부톤보다 조금 밝은, 기다랗고 내 팔뚝만 한 물건. 어제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보니 크기가 정말 엄청나다. 어제 무려 저만한 크기가 내 몸속에 들어왔던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니 내가 정말 살아있는 게 맞나 싶다.
손가락 하나만 들어가도 가득 찼었는데 그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크기가 내 그 좁은 곳으로 들어왔다니. 맙소사. 내 몸이 터지지 않은 게 용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눈이 빙글 돌아 어질어질하다. 내 머릿속처럼 출렁거리는 물살과 함께 욕조가 갑자기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응? 어라?
어째 등 쪽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굳어버린 목을 움직여서 겨우 뒤를 돌아봤다.
“…파이?”
욕조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물에 젖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기다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섹시한 모습에 내 얼굴과 팔뚝 솜털이 오스스 돋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