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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3화 (13/132)

♬  #13

그날도 향기가 제법 좋았다. 언제더라. 초경을 시작하던 그 날부터, 간질거리던 아기의 내음이 사라졌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묘한 향을 흘리기 시작했지. 아무래도 내 입맛이 서서히 변하고 있는 걸 보니, 폭주의 때가 다가오고 있기는 한가 보다. 성인이 되면 레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시집을 보내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었건만. 그 이후, 치즈는 틈만 나면 나에게 혼인을 하자고 달려들었다. 거절하면 며칠 침울하다가도 또 금세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내게 고백을 해왔고, 나는 그것을 단박에 거절했다.

그게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거다. 원래 딸아이는 어릴 때 저를 키워준 아버지와 혼인하겠다고 떼를 쓴다고 했다. 치즈가 아직 내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부녀간의 가족애라고 확신했다. 나 또한 저런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에게 발정할 만큼 미치지도 않았고.

하지만 어제의 일로 인해 상황은 뒤바뀌었다.

“치즈?”

닫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상하군.

보통 치즈가 방 안에 있기만 해도 먹음직스럽고 향긋한 체취가 한가득 퍼져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향이 매우 옅다. 이십 년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어서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침대가 불룩한 걸 보니 정말 잠들었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펄떡거리면서 날뛰던 심장이 침대 끄트머리로 삐져나온 밀빛 머리카락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차분해졌다.

…아니, 머리카락이 왜 저렇게 상했지? 우리 치즈 머리카락이 저런 뻣뻣한 느낌이었던가?

나는 천천히 침실 반대쪽으로 걸어가 치즈가 누워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순간 안면이 확 경직되었다.

“치즈?!”

이불을 확 걷어내자 작은 곰 인형이 머리맡에 얹어진 채다. 익숙한 드레스가 허물처럼 벗겨져 있는 것을 보자마자 뒷골이 찌릿하게 울렸다.

인형? 설마 인형으로 변하는 마법에 걸린 건 아니겠지?

침입자는 없었다. 이 저택 주위는 아나콘다의 영역이자 내 결계가 세워진 곳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낯선 이가 들어온다면 결계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조심히 잡아 들자 밀빛 가발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마력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알았다. 귀여운 내 치즈가 지금 나와 술래잡기 놀이를 시작했다는 것을.

[그게 싫으면 나랑 한번만 자요. 그럼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고백도 이제 안 해요. 완전히 포기해 줄게요. 이정도면 꽤 좋은 조건 아닌가?]

설마 하룻밤을 보내고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이 뜻이었나?

순간 울컥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손에 쥔 인형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래도 보안이 너무 허술했군.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우선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내가 외출을 하고 돌아온 지 겨우 몇십 분이 지났으니까.

나는 손에 쥔 곰 인형을 다시 침대 위에 조심히 올려놓고 방 안을 이 잡듯 뒤졌다. 옷장, 욕실, 드레스 룸, 침대 밑. 마력을 이용해 방을 한번 털어내도 먼지뿐이다.

아직 방에 있을 리는 없지.

그리고 방을 빠져나가 저택의 모든 방을 털었다. 역시 없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식기류에 잠시 멈칫했다.

토끼 가족이 그려진 식기 세트. 그걸 사달라고 내게 아양을 떨던 치즈의 표정이 순간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줘요, 응? 사줘, 사줘!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언제까지 유아용을 써야 하냐고! 내 위장도 저 그릇보다 더 크다고!]

[적당히 소식해야 건강하다.]

[…내가 언제 식사량 늘려달라고 했어요? 우리 아카데미 동기들도 다 그 공방에서 나오는 한정판을 사용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응? 파이이이…….]

징징 우는 소리를 내며 떼를 쓰는 치즈가 나를 몇 번 흘겨보기까지. 그래도 안 되겠는지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면서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여 그에 홀랑 넘어갔었다.

집사도 저 나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언질을 줬다. 그때부터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드레스도, 가방도 매년 최신 유행에 맞춰 사주곤 했었다. 내 아이가 어디 가서 기죽는 꼴은 또 못 보니까.

“그런데… 감히… 도망을 가?”

내가 말 한마디 없이. 어제 나를 그렇게 농락해놓고.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저를 길러주었건만. 은혜도 싹 무시하고 멋대로 가출을 해?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분하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당장 찾아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무조건 찾아.”

숲의 모든 짐승을 동원해 숲 안을 전부 막아 세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새끼손가락의 반지가 까맣게 물들었다. 치즈의 기분이 매우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로 위치 추적마법을 가동해 치즈를 찾아냈다.

“흐앙, 파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치즈를 발견하자마자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커다란 아나콘다에게 잡아먹힐까 봐 무서워서 훌쩍거리는 치즈가 왜 이렇게 귀여운지.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늘 그랬다. 외출할 때마다 혼자 있을 치즈가 눈에 밟혀서 불안했었다. 그리고 대충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치즈가 나를 반겨주었다.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내게 안길 때마다 웃음기가 절로 감돌아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불안했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저 잘 키워서 좋은 사내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게 내가 치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다른 걱정이 생겨버렸다. 바로 치즈의 행동 때문에. 혹시라도 드래곤인 나마저 미혹하던 그 표정과 몸짓으로 또 다른 사내들을 유혹하고 다닐까 봐.

이십 년간 내게 해왔던 행동들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아카데미에서 인기도 많았다고 하니 더 말이 필요 없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제라도 다시 가둬놓고 제대로 교육을 해야겠다. 차라리 남성과의 관계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 거라면, 내가 도와주면 된다. 연애 같은 것이 하고 싶은 거라면 그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이 요망한 아이를 저 위험천만한 세상에 내놓다가 혹시라도 큰일을 당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치즈를 레어에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가두었다. 누구도 치즈를 쉽게 넘보지 못하도록.

* * *

짜증나. 짜증나!! 이게 다 릴리 때문이야!

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크게 발버둥을 치고 속으로만 고래고래 외쳤다. 그도 모자라서 신경질적으로 베개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그 베개로 침대 위를 팡팡 내리쳤으나 돌아오는 건 가라앉아있던 먼지뿐이다.

“저택이 그리워……. 아카데미 다시 가고 싶어. 여기 너무 싫어, 싫다고!”

여기는 드래곤의 레어다. 파이의 결계 마법 때문에 절대 혼자 힘으로는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그중 유독 여성스럽게 꾸며놓은 방이 바로 내 방이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지만, 내 방은 외관으로 봤을 때 잘 꾸며놓은 인형의 집과 같았다. 실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나도 전혀 몰랐다. 파이가 레이스에 환장한 드래곤인 줄은. 나도 레이스를 좋아하니까 상관없지만. 침실은 물론이고 필요도 없는 커튼을 벽에 장식한 것도 프릴이 잔뜩 달려 눈부시게 화려했다. 내가 하도 여기 너무 갑갑하다고 생떼를 부려서 고안해낸 것이 방을 밝게 꾸며놓는 거였다.

흥, 그래봐야 동굴 안이지. 이런 가짜 말고! 나는 진짜 밖에서 살고 싶단 말이야!

조금 전, 나를 레어로 데리고 돌아온 파이는 이 침대 위에 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여기서 반성하고 있어. 사과할 마음이 들면 나와도 좋아.]

그리고 아주 화가 많이 났다는 듯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살벌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지어보여서 나는 반박도 못했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혹시 방문이 다시 열리까봐 눈치를 보면서.

방문 너머의 저 멀리에서 쿵, 쾅쾅, 우지끈! 소리가 나는 거 보면 무슨 공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양심상 저 커다란 소리가 울리는 때를 노려서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화난 드래곤의 코털을 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데 대체 무슨 반성을 하라는 거야? 나는 이제 보호만 받는 어린 아이가 아닌데. 독립할 수 있는 성년이 되었으니까 이제 민폐 끼치지 않고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거잖아? 앞으로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그런 건데. 파이는 내 마음도 모르고!

“…배고파.”

생각해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크림치즈파이 한 조각 겨우 먹은 게 다다. 그리고 꽤 오래 말도 탔고, 굶주린 야생 늑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쫒기기도 했다. 게다가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샛노란 눈동자의 커다란 아나콘다를 봐서 아직도 뱃속에 소름이 일었다. 세상이 내 예상보다 더 무섭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파이가 양 손에 커다란 접시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방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나를 쳐다본다.

괜히 얄미워서 나는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휙 돌려 팔짱을 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내가 좋아하는 고기 냄새가 테이블 쪽에서 풍겨와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참아. 여기서 질 수는……!

-꼬르르르륵.

“…흠흠.”

“이리 와서 식사부터 하지.”

배꼽시계가 너무 우렁차게 울려서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고.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침대 위를 빠져나왔다. 괜히 민망해져 아카데미 원복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다가가자 파이가 내 의자를 뒤로 당겨주었다.

“앉아.”

사실 여기는 저택에서 내 방으로 쓰던 곳과 구조가 똑같았다. 창문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래서 내가 앉는 지정 의자를 뒤로 빼준 파이를 무시하고 반대쪽 의자에 착석했다. 하지만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내 지정 의자에 앉았고, 요리를 담아온 뚜껑을 직접 열어주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주책을 부리다니. 난 지금 기분이 나쁜 상태라고. 자각 좀 하자, 치즈.

접시 위에는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큼지막한 스테이크용 고기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육즙이 반지르르 흐르는 것을 보아하니 아주 촉촉하고 맛있게 보였다.

나는 고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침을 목구멍 뒤로 꼴깍 삼켰다. 그리고 늘 그랬듯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아 허벅지에 올려두었다.

파이가 제 앞에 있는 고기를 내 입에 쏙 들어갈 크기로 분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얌전하게 기다리다가 콧등을 살짝 구겼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만날 내 고기는 파이가 저렇게 썰어주었다. 나는 그가 조각조각 썰어놓은 고기 접시를 내게 내어줄 때까지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더랬다. 늘 케이크나 빵도 그가 집어서 내 앞 접시에 올려놔 줬고… 어? 내 쪼꼬미 가족 식기 세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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