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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2화 (12/132)

♬  #12

[네. 맞아요. 그랬어요. 왜요? 걱정돼요? 내가 또 생각 없이 달라붙을까봐?]

[걱정 마요. 난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자 성인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치즈가 이런 식으로 철벽을 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하기는커녕 치즈의 눈치만 봤다. 그리고 치즈가 좋아하는 빵까지 따로 굽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늘 내게 애정을 쏟아 붓던 아이를 향해 냉정하고 야박하게 굴던 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치즈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도 되질 않는다.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안달복달하게 됐는데, 치즈는 대체 무슨 기분으로 지금까지 견뎌냈을까? 내가 미워지진 않았을까?

아니, 차라리 정을 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치즈에게는 영원이라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만이라도 전처럼 지내길 바랐다. 적어도 혼자 슬퍼하고 우는 것을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이미 처음부터 그러기로 맹세했으니까.

내가 치즈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막 어미 뱃속에서 나와 탯줄도 자르지 못한 핏덩이일 때였다.

그날은 버릇없이 까불던 마법사 하나를 상대로 폭주하던 때였다. 그 재수 없던 마법사를 반쯤 죽여 놓고 나니 레어 주위에 있던 마을 몇 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부서지고 엉망이 되어버렸다.

내 영역 근처에 자리 잡은 마을의 운명이야 내 알바 아니지만.

건방진 마법사 놈에게 항복을 받아낸 뒤에서야 레어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어디서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소리였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와 함께 유독 신경이 거슬리는 또 다른 신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나로 인해 망가져버린 마을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생명의 소리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모르겠지만.

[살려… 주세요, 내 아이……. 부탁… 드려요. 제발…….]

마을의 제일 가장자리에 있던 허름한 나무집이 금방이라도 전부 무너질 듯 위태롭게 삐그덕 거렸다. 이미 지붕이 절반은 부서진 상태였다. 바닥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내의 시체가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깨져버린 유리조각이 온 몸에 박혀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젊은 여인이 있었다. 겨우 숨이 붙어있긴 했으나 생명의 불씨가 거의 사그라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이… 만이라도… 꼭 살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곧 숨이 끊어져 죽어버린 여인의 한 팔에 핏덩이가 안겨 있었다. 갓 태어났는지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로 우렁차게 울던 아이가 바로 치즈였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거다. 못 본 척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었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거뒀다가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데리고 왔다. 귀찮게 굴면 몰래 한입에 꿀꺽 잡아먹어 버릴 생각도 조금 있었다.

아이는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듯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 당최 알 길이 없어 내내 그 조그마한 것을 어르며 씨름을 했었다.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지?’

처음 몇 달은 눈그늘이라는 것이 턱밑까지 내려올 기세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핏덩이를 아나콘다의 먹이로 던져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까르르르!’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 아이. 무려 사천 년간 잠잠했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이의 앙증맞은 손이 내 손가락을 잡아 꼭 쥐며 그 동그란 눈을 맞춰올 때부터였다.

처음이었다. 귀찮아서 곁에 아무도 두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더 익숙했는데. 가끔 질척하게 매달리는 이들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온기였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조금도 겁먹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기도 했다. 순수하게 반짝거리는 초록빛 눈동자가 마치 보석 같아서 더 흥미로웠다.

이래서 인간들이 아이를 키우는 건가? 이런 기분이라서?

공허하고 무료했던 감정으로 보내온 긴 시간. 메말라서 쩍쩍 갈라져 있던 심장에 행복이라는 물이 덮쳐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 기분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도.

이 작고 귀여운 아이를 꼭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내게 새로운 감정을 일깨워준 그 자그마한 생명을 소중히 다루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프지 말고.

걷기 시작하면서 내게 들러붙는 치즈가 내 팔뚝에 매달려 등산하듯 낑낑 오르기도 했다. 겁도 없이 내기 쉽게 다가오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심장이 불편해졌다. 그러다가도 언제부턴 가는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귀여워. 세상에 이런 귀여운 생명체가 다 있을 줄이야.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는 내가 새삼 어색하기도 했다.

[조심해라. 다친다.]

게다가 내가 무슨 말만 해도 좋다고 웃는 치즈 때문에 굳어 있던 얼굴도 점점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치즈는 종일 내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제가 어미라도 되는 것처럼. 심지어 낮잠도 내 상체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불편해할까 봐 침대에 뉘려다가 크게 운 적이 있던 이후로는 그냥 뒀다.

언젠간 침대에서 잠들겠지, 내버려 뒀으나 지금까지도 침대에 스스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침대에 눕혀놔서 잘 때까지 옆에 있어 줘야 잠이 들었다. 자다가 깼는데 내가 없으면 또 펑펑 울었던 전적도 제법 많았다.

그렇게 귀엽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래도 내가 여자로 안 보여요? 파이 눈 삐꾸 아니야?! 너무 오래 살아서 이제 눈도 침침한가 봐요? 내가 제대로 보이긴 해요? 잘 봐보라니까?]

어제 성인이 된 기념으로 열었던 생일파티에서의 아찔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두통이 일 정도다. 나를 향해 가슴을 내밀며 유혹하려는 듯 흐릿한 눈을 하고 교태를 부리는 치즈의 행동 말이다. 그 장면이 참… 묘하게 가슴이 떨리기는 했다. 아주 조금, 솔깃하기도 했고.

‘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

내가 치즈를 받아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고, 애초에 우리와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

불멸의 시간을 보내는 드래곤이야 아쉬울 게 없는 짐승이지만 인간은 다르다. 겨우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약한 존재.

사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몇십 년 살다가 늙어 죽는 반려를 맞이하면 과연 내가 그 이후를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 바에는, 애초에 정을 주지 않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조금만 잘못해도 쉽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닌가. 그래서 새근새근 잠든 치즈가 숨은 쉬고 있는지 확인을 하러 아이의 방에 들락날락. 이불에 코를 박아서 숨이 막혀 죽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러다가 5년 전.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치즈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긴 생각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치즈가 한창 사춘기라는 것에 물들던 어느 날. 바깥 외출 겸 드레스를 새로 맞추기 위해 근처 프리센 왕국의 수도에 들렀을 때였다.

[어머, 두 분은 여전하시네요. 아가씨는 못 본 새에 더 많이 성숙해지셨어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당연하죠! 벌써 열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다 큰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여전히 활기찬 모습이라 보기 좋아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그렇지 않아도 왕국에서 공문이 내려왔거든요?]

[공문?]

[저희 국왕 전하께서 아가씨를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요. 수도에 나타나시면 국왕 전하께서 아가씨를 꼭 왕궁으로 안내하라는 내용입니다.]

[나를요? 왜?]

[왕세자 저하께서 작년에 어쩌다가 아가씨를 뵙고 상사병을 앓으신다고 왕궁에서 난리가 났답디다. 국왕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으면 왕세자비로 삼으실 수도 있다고요.]

…뭐라고?

[아가씨께서 저희 왕세자 저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라고 다들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왕세자비가 되시고 저를 모른 척하시면 저 많이 슬퍼질 겁니다. 아시겠지요?]

듣고 있던 내 입꼬리가 비틀렸다. 감히 인간 주제에 치즈를 노리다니.

[어머…….]

치즈는 그 말을 듣고 볼을 붉혔었다. 그걸 보는 내 속 어딘가는 배배 꼬이기 시작했었다.

[이만 돌아가지. 드레스는 다음에 따로 사람을 보내겠다.]

뭣도 모르는 놈에게 시집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른 놈 앞에서 지금처럼 수줍게 미소를 짓는 치즈라니. 두통이 밀려올 정도로 낯선 감정이 온몸에 퍼졌다.

대체 왜 기분이 이렇게 나빠지는지 몰라서 답답하기도 했다. 내가 곱게 키워놓은 나의 소중한 아이를 멋대로 낚아채가려는 놈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 딸 같은 존재를 빼앗기게 되어 화가 나는 것이 맞을 거다.

그렇다 쳐도 상당히… 불쾌해.

[파이. 파이. 나 할 말이 있어요!]

레어로 돌아가던 마차 안. 웬일로 조용하게 혼자 골똘히 생각하던 치즈가 대뜸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더니 맑은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터라 나는 팔짱을 낀 채 바깥을 보던 눈동자를 굴려 치즈를 쳐다봤다.

[할 말?]

[응. 나 파이랑 혼인할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파이랑 평생 같이 살려면 파이랑 혼인을 하면 되는 거였잖아? 그러니까 우리 혼인해요! 네?]

그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저 깜찍한 꼬마 아가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 말의 의미나 알고는 하는 건지.

그래, 인간들끼리는 서로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같이 늙어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드래곤이다. 게다가 그녀의 부모는 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치즈가 궁금해한 적이 없기에 아직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특히나 요즘 들어 점점 치즈의 체취가 점점 진해져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치즈는 마치 준비가 되었다는 듯 성숙한 향기를 폴폴 풍기고 다녔다. 매일같이 들러붙어 있기도 하니 더욱더 괴로웠다. 평소에도 인육 따위에 흥미를 보이진 않았다. 또 그런 향기에 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치즈에게서 풍겨오는 아찔한 체취에 목이 마르곤 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자라. 낮잠 아직 안 잤잖아.]

[…헛소리라니! 그리고 나 이제 낮잠 꼬박꼬박 챙길 나이 아니거든?]

[내 눈엔 꼬맹이다. 안자면 억지로 재울 거다.]

[정말이지… 정떨어지게. 진짜, 만날 협박이나 하고! 이 멍청이!]

[…방금 뭐라고 했지?]

[잘 테니까 나 안아줘요.]

신경질을 내면서 바락바락 대들다가도 또 내게 두 팔을 뻗어 안아달라고 칭얼거린다. 기분이 저렇게 순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역시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군.

나를 향해 배시시 웃는 치즈가 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재빨리 기어 올라와 폭 안기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옅은 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에 침이 고이는 걸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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