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파이는 왜 나에게 자꾸 멈춰달라고 부탁을 하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 발을 빼려는 그가 원망스럽다. 게다가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짙어진 눈동자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는 걸까? 왜 애써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려는 걸까?
나에게 발정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방금 키스가 너무 격정적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여자와 달리 감정 없이도 교합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싫어요?”
내 목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려 나왔다.
“…아니.”
싫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왜 저렇게 참고 있는 건지. 그의 눈빛은 충분히 애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그저 짐승이면 짐승답게 본능에 충실해줬으면 좋겠건만 왜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도망가지 마요. 나도 도망가지 않잖아.”
힘들긴 했어도 그와의 키스는 좋았다. 기대했던 부드러운 키스는 아니었으나 뭐든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파이가 나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건 또 내가 너무도 바라는 애정 가득한 분위기였고.
나를 놓칠세라 더 꽉 끌어 안어 주던 그 거센 힘도. 돌덩이 같은 단단한 육체도. 달콤한 숨결도, 따뜻했던 입술과 두툼하고 촉촉한 혀도.
“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아… 아프지만 않게 해줘요.”
여자의 처음은 남자의 충분한 애무와 배려가 없으면 아프다고 들었다. 비록 그가 날 사랑하진 않더라도, 나를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 파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내가 걷다가 혼자 넘어지거나, 잠자다가 굴러떨어질까 매일 걱정하는 남자다. 오죽하면 나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시야에서 떠나는 순간마다 방어마력이 담긴 귀걸이도 종일 착용하게 하곤 했다.
그런 남자가 내게 겉으로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속이 이렇게 타버려 재가 된 건 아마 평생 모를 테지만.
“알았다. 노력하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심했나보다. 하긴, 이렇게 해야 날 완전히 떼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쩐지… 기대가 되기도 하는 반면, 심장에 대못이 꽂혀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찢겨지고 무참하게 난도질당해 너덜해진 가슴이, 더는 회복이 어렵다는 듯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나는 티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활짝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파이가 안심하고 나를 안아줄 테니 말이다.
그의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괜스레 몸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팔뚝이 나를 감싸 안아 들어 조금 더 침대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덕분에 침대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다리가 전부 침대 위로 안착했다.
동시에 조명등의 절반이 꺼지고 밝기가 확 줄어들었다. 해가 거의 져서 어두워진 하늘 덕분에 그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조명등 색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아서 그런가? 분위기가 묘하게 야릇해졌다. 그때, 그가 슬립의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그 단순한 행동에도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다.
“내가…….”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오다가 멈춰졌다. 그러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슬립의 어깨끈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서서히 내려가는 끈과 함께 슬립이 내 몸을 스치고 부드럽게 벗겨진다. 등을 살짝 들어 올려 더 아래로 내리자 풍만하게 솟은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번 그가 목욕을 씻겨줄 때마다 늘 보이던 알몸인데도 지금은 이상하게 부끄러워졌다. 내 옷을 벗기고 입히는 것도 파이가 도맡아서 해주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 그에게 내 알몸을 보여주는 기분이다.
그의 표정이 너무 야해서 그런가? 아니면 조명 때문인가?
“숨이 끊어지던 너의… 어미에게 면목이 없군. 핏덩이인 너를 내게 부탁했을 때에는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내 어머니요?”
“설마 나의 귀여운 치즈가 내게 먼저 요구할 줄도, 미처 몰랐지. 방심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그의 뒷말이 궁금해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다물린 입술을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단단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내 젖가슴을 꾹꾹 눌러 와서 미간을 살짝 오므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손가락이 뽀얀 젖가슴에 파묻히는 그 장면이 너무 야했다. 이내 유륜 주위를 빙글빙글 느릿느릿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으응…….”
그러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작은 돌기를 톡, 건드리자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 버렸다. 겨우 스쳤을 뿐인데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하다.
어라? 그가 씻겨줄 땐 이런 느낌 없었는데?
생경한 감각에 어리둥절하던 찰나,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쪽 젖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는지 미약한 통증에 복근이 움찔거렸다.
“아파요, 파이.”
“아.”
내 말에 힘을 바로 풀어서 조금 적당한 세기로 조물조물 마사지하듯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옆구리를 위아래로 살살 문질러온다. 흘끗 바라본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허기져 보였다.
정말 이상하다. 늘 자연스럽던 접촉이었는데 평소와 너무 다른 느낌이라 혼란스러워졌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 걸까?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고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어댔다. 어느새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농염해 보여서 뒤통수가 저릿해질 만큼 전율이 돋았다. 달뜬 호흡과 함께 내 의지를 배반한 신음성이 자꾸만 내 목구멍에서 흘러나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버렸다.
“으… 흐, 하앙…….”
점점 시야가 흔들리면서 흐릿하게 변한다. 턱밑까지 솟구치는 쾌감이 너무 생경해서 온몸이 잘게 경련했다.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발뒤꿈치로 침대 시트를 꾹꾹 누르고 문지르면서 어떻게든 신경을 돌려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오갈 데 없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가 펴도 자극이 약해지진 않았다. 가슴을 제멋대로 뭉개는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유두가 꽉 조여질 때마다 허리가 파드득 떨려왔다.
“흐아아……. 파, 파이. 아!”
손바닥과 발바닥이 전부 간질거려서 침대 시트에 마구 비벼도 나아지진 않았다. 참다못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손바닥에 느껴질 정도다.
원래 이런 기분인 건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견디라는 건데?
그 사이에 결 좋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랫배에 스르륵 내려와 간지러워졌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잡힌 반대쪽 가슴 위에 축축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정점을 꾹 눌러와 또 흠칫 놀랐다.
“읏!”
나는 아래쪽을 쳐다보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가, 자신의 붉은 혀로 유두를 살살 핥아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치고 올라오는 희열과 함께 새하얀 섬광이 강하게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파이의 눈빛이, 그의 혀가 내 가슴을 핥는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느릿하게 혀끝으로 가슴을 할짝거리는 젖은 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해서 턱이 달달 떨렸다. 더불어 낯설게 다가오는 쾌감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답삭 잡아챘다.
“으… 자, 잠깐만요. 하아, 잠깐…….”
내가 아는 그라면 멈춰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파이였지 지금의 파이는 아니다. 나는 그가 왜 멈추지 못할 거라고 했는지 그 말뜻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는다. 허리를 비틀어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혀로 가볍게 농락하던 가슴을 아예 입에 머금어 강하게 빨아냈다.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쾌감에 시야가 새하얗게 변해버리기 시작했다.
‘아, 좋아…….’
너무 좋았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머리는 혼란스러운데도.
더, 더 느끼고 싶었다. 그가 나를, 파이가 내 가슴을 매만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듯 쪽쪽 빨아대는 소리마저 눈물이 날 만큼 달콤해서. 그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아서.
“파이… 하아, 이상… 이상해…….”
칭얼거리며 도리질을 치는데도 낯선 감각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뒤통수를 침대 시트에 문지르고 비벼대도 가슴에서 전해지는 강한 자극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온몸이 전율에 가득 차올라 모든 감각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가 확 젖혀지고 어깨를 바짝 모아 전신을 바들바들 떠는데도 그는 침착하게 제 할 일에만 전념했다.
아흐, 간지러워…….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바짝 말아 쥐고 있는데도 땀에 젖어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침대 시트를 말아 쥐어도 그 간질거림이 사라지질 않았다.
왜 여태 이런 감각을 몰랐을까?
평소 목욕할 때 그의 손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곤 했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그냥 좀 그곳이 예민한 곳이긴 한가보다, 라고 쉽게 생각했다. 딱히 누구에게 허락한 적도 없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해달라고 할걸. 게다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치달아 턱 아래가 저릿했다.
“파이… 흑, 파이…….”
“…치즈?”
떠날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와버렸다.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며 젖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되뇌자 그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낸 그가 나를 다급히 안아 들어 무릎을 꿇은 제 허벅지 위에 마주 보도록 앉혀놓는다. 아니, 슬픈 건 슬픈 거지만 방금 기분 좋았는데 하필…….
“왜 울어. 왜? 아팠나? 이를 세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실수로 깨물었다거나?”
“아, 아니야, 바보. 안 그랬어요. 그냥… 가, 감정이 좀 격해서 그래.”
가끔, 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그의 송곳니가 뾰족하게 자라난 걸 봤었다. 진짜 화가 많이 나면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말리고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그의 친구들 말로는 내가 ‘파이 제어장치’라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고.
하지만 여태 그가 나를 향해서 이를 세운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감정? 너무 자극적이었나? 그래도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보군.”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그걸 손으로 닦아내 주던 그의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어… 이건 좀 곤란한데.
아까는 멈추지 않겠다더니 지금 저 단호한 표정에 위기감이 몰려온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제부터 손대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밀려왔다.
아니! 그럼 안 돼!
“아니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 그게…….”
그의 얼굴을 마주 본 상태로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자마자 순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조금 전 파이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내 가슴을 혀로 할짝할짝 핥아대던 그 야한 장면이 떠올라버려서.
어휴, 부끄러워. 못살아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