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알았다. 그 전에 머리 장식부터 정리하지.”
그가 마주 선 상태에서 머리 장식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키가 워낙 커서 내 정수리가 다 보이니까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빠르게 핀을 하나씩 제거하는 손놀림이 매우 익숙하다. 머리 장식도 드레스도 전부 그가 꾸며주고 입혀준 거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 지금 신혼인 거야. 혼인했다 치고 남편 될 사람과 첫날밤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자. 이 순간에만 집중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두 주먹을 바짝 그러쥐었다.
한껏 틀어 올려 고정한 머리핀이 제거되자, 구불거리는 밀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흘러내린다. 곧 길쭉한 그의 손가락이 풀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두피를 더듬거렸다. 혹시나 남은 핀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작업인데, 순간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늘 그가 해주던 일이건만 오늘따라 기분이 묘하게 간질거린다. 이렇게나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느끼자니 차라리 오늘 그냥 콱 죽어버려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당연히 죽는 건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 이후에.
“그런데 이런 건 누가 가르쳐줬지?”
“응? 뭐가요?”
“솔직히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아카데미에서 이런 교육을 해줄 리가 없을 텐데?”
“으, 으, 음란하다니! 내 몸이 남성들의 몸과 다르다는 것을 배우고 나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죠! 진짜… 나, 나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남자가 진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네, 자꾸? 하긴 내가 좀 기겁할 만한 제안을 하기는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괜히 민망해져서 목을 가다듬고 다시 풀다 만 그의 겉옷 단추에 손을 댔다.
“자, 우선 빨리 씻으러 들어가요. 목욕이 먼저죠. 나는 마음의 준비 다 끝났어요.”
그런데 그가 내 분주한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건드리다가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놀라서 움직임이 우뚝 멈춰지게 되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 안에 보기 드문 염려스러움이 잘게 흐트러진 채 물들어있었다.
“왜요, 파이?”
“내가 너의 의견을 수긍하긴 했으나, 네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도 네가 나를 첫 상대로 지목한 것을 달갑게 생각하진 않아.”
“…설마 또 밀어낼 생각?”
“물론 이제 와 번복할 생각은 없다만… 지금 내가 무어라 이야기를 해도 고깝지 않게 들리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미안하다.”
“왜 미안해요? 뭐가요? 꽤 광범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나는 파이한테 사과받을 이유가 없어요.”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 하니까요. 나야말로 미안해요.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착잡해요. 하지만 이게 최선인걸? 어차피 이래도 후회하고 저래도 후회할 거면 차라리 저질러놓고 후회를 하는 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면서 그의 손에 잡힌 내 손을 뒤집어 부드럽게 맞잡았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지금에 집중해요. 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당신의 여자가 될 거예요.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하겠죠.”
내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어요. 나를 키워준 은혜도 감사해요. 파이를 꽤 오랫동안 가슴에 담았던 나를… 잊어도 용서할게요. 나도 잊기 위해 노력할 거니까 피차일반.
“그러니까 키스… 해줄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굳은 결심을 하고 뱉어낸 말에 파이의 붉은 눈동자가 파동이 일 듯 얕게 흔들린다. 게다가 특유의 무표정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게 키스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가끔 내게 보이던 부드러운 아빠 미소가 아닌, 연인을 향해 애정이 한껏 담긴 미소를 보여주길 바란다. 나를 보고 수줍어 얼굴을 붉히는 표정도 보여주기를 꿈꾼다. 그게 다 내 욕심이겠지만.
“어서요.”
나는 턱을 살짝 내리고 눈을 약간 치뜬 채로 눈꺼풀을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이건 아카데미 동기에게 배운 남자 홀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 수법을 이용해 남학우를 몇 홀렸던 전적도 부지기수다.
물론 파이에게도 몇 번 써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줘서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었지. 쳇.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어도 지금 그와 나 사이에 야릇한 분위기가 생성되고 있으니까.
나는 일부러 팔을 가슴 아래에 감아서 무겁게 쳐진 젖가슴을 살짝 끌어올렸다. 이게 바로 가슴골이 더 확실하게 보이는 자세다. 부디 슬립 위로 도드라지는 예쁜 분홍빛의 유두가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의 팔뚝을 잡고 까치발을 살짝 들어서 그를 향해 입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키 차이가 또 워낙 많이 나서 내 턱이 그의 쇄골 위에도 못 닿았지만.
“파이, 키스 안 해줄 거예요?”
아직도 망설이는지 나를 그저 빤히 내려다보기만 한다. 설마 키스도 안 하고 본론부터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섹스의 ‘섹’자도 모르는 거 아니야? 서, 설마 여태 키스도 안 해본 건……?
에이, 설마. 요즘 애들도 키스 정도는 기본이라고. 파이가 요즘 애들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보수적인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파이… 나 다리가 후들후들해요. 벌서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내가 어릴 때부터 뽀뽀는 가끔 해왔었다. 물론 내가 처음 청혼한 날부터 지금까지는 이마와 뺨에만 뽀뽀를 해주긴 했지만. 그것도 내가 졸라서 겨우 해줬었다.
아! 그리고 난 봤어! 파이를 찾아왔던 그 예쁜 언니가 파이하고 진하게 키스하는걸!
둘이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하긴 했었는데, 물론 파이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내가 아홉 살 땐가? 그 언니가 소파에 앉아 독서 중이던 파이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끈적한 키스를 나눴었다. 낮잠 자다가 일어나서 파이를 찾으러 갔다가 보게 되었지.
생각해보니 그때도 파이는 키스를 받으면서도 눈을 뜬 채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 예쁜 언니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 감정도 심장도 죄다 어디 엿 바꿔 먹었어?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나중에 치즈도 너 버리고 도망갈 거다. 재수 없는 새끼.]
어, 그러네. 나 진짜 도망가네. 그 언니 돗자리 깔아야겠는걸?
아무튼, 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파이는 키스하는 방법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럼 내가 가르쳐줘야 하나? 어쩐다? 나도 아직 해본 적은 없는데. 사천 년씩이나 살아와 놓고 모른다니. 역시 드래곤은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었어.
후우, 작게 심호흡한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로 덮인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 쥐었다. 다행히 파이는 피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주었다.
“자, 파이. 우리 가볍게 뽀뽀부터 해봐요. 고개 좀 숙여줄래요?”
나는 얼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책에서 말하길 우선 뽀뽀를 하고 혀를 집어넣어서 체리꼭지를 묶듯 상대방의 혀를 휘어 감아주면 된다고 했다.
이론은 완벽해!
어딘지 야해 보이게끔 혀를 슬쩍슬쩍 내밀며 일부러 더 교태를 부리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돌덩이 같은 얼굴이 내 말대로 천천히 허리를 숙여서 가까이 다가온다.
두근두근.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 코가 닿을 거리에서 멈췄다.
아, 잠깐 심호흡 좀. 후우, 후우.
발작할 듯 뛰기 시작한 심장이 거칠게 움직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정신 차리자.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의 입술이 보기에는 돌처럼 단단해 보여도 촉감만큼은 부드러웠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뽀뽀해줬던 그 기억의 감각이 떠오르자 허리가 긴장했는지 잘게 경련했다.
과연 그때와 같을까?
“지금 할 거예요. 지금 해요. 갑니다.”
떨리는 호흡을 흘리면서 세뇌하듯 중얼거린 나는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숙여 그의 입술을 향해 조준했다. 그리고 다시 까치발을 들어 천천히 그의 입술위에 내 입술을 살포시 얹어놓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 눈을 감으니 그 야릇한 자극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의 뺨을 쥐고 있는 손끝까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울림이 전해지는 것 같다.
그 순간, 갑자기 내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쥐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커다란 그의 손이 내 몸을 감싸 잡고 위로 훅 들어 올린다. 그 행동에 입술이 맞닿은 채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빠르게 깜빡거렸다.
으악!
너무 놀라서 팔을 휘젓다가 그의 어깨를 답삭 잡았다. 몸이 휘청거려서 입술이 절로 떨어지게 되었다.
“파이?”
“네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눈높이가 맞으면 그래도 수월하지 않을까 싶군.”
이것 또한 익숙한 자세다. 그의 가슴팍에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려서 낮잠을 자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자세. 또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지내고 주말마다 나를 데리러 오던 그에게 달려가 안길 때도 그랬다.
그 기숙사도 내가 몇 달 그를 조르고 졸라서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고백할 때마다 받아주지 않는 그가 밉기도 했고. 나 없이 혼자 있으면 파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더 기숙사에 들어가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또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카데미까지 마차로 통학해야 하는 건 고역이었으니까.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어떻게 다니겠어?
하지만 초반에 파이는 허락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그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직접 통학시켜주었다. 그건 아카데미를 보내기 싫어했던 파이의 계략이 틀림없다고 여겼었다. 내가 먼저 백기를 들 때까지 고집을 피울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꿋꿋하게 아카데미를 다녔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1년간의 투쟁 끝에 당당히 기숙사 입소에 성공하게 되었다. 아무리 철벽같이 방어하는 파이라도 언젠가는 내 부탁을 다 들어주곤 했다. 지금 키스를 하자는 것도 꽤 망설이다가 기왕 허락했으니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긍한 것이 틀림없다.
파이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정말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그를 향해 수줍게 웃으면서 팔을 쭉 뻗어 그의 어깨 위에 얹어놓고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참 고맙네요. 도망도 못 가게 아주 꼭 붙들어 매는 걸 보니 나랑 하는 키스가 기대되긴 하나 봐요?”
“아카데미에서 못된 것만 배워온 것 같은데. 괜히 보냈나보군. 대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쉿. 인간의 호기심은 누구도 막지 못해요. 나는 이날만을 꿈꾸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요.”
이미 아카데미는 졸업했는데 어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허공에 떠 있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아 고정했다. 힘이야 워낙 좋으신 분이니 다 큰 처녀를 이렇게 안아 드는 것도 그냥 서 있는 것처럼 쉬운 남자다.
“자, 분위기 깨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키스부터 해줘요. 기다리다가 지쳐서 녹아버리겠어.”
나는 고개만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 있는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방금 내가 닿았던 입술.
순간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맛보고 싶다. 그의 입술은 무슨 맛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