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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화 (1/132)

[로판] 나랑 한번만 해요 그거

♬  #0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

이 낯 뜨거운 말을 뱉어내면서 도도한 표정을 꼭 유지할 거라고 굳게 결심을 했다. 그러나 내 의지에 반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버리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티를 내면 곤란해.

나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리고 턱이 부서지도록 달달 떨리는 이를 꽉 깨물었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근사한 그를 마주 보고 있는 걸 유지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필요하니까.

새까만 밤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채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가을철만 되면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처럼 짙은 선홍색을 가득 머금은 선명한 눈동자. 매끄러운 도자기 같은 진한 살구색의 피부와 오뚝하게 선 콧날. 그 아래로 굳게 다물린 도톰한 붉은 입술.

조금도 변함없는 여전한 모습이다. 그러나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진 채다. 나와 함께 생활한 지 무려 이십 년째인데 저만큼이나 표정이 망가지는 건 오늘 처음 본다.

조금 전에 내 고백을 뻥! 찼을 때는 표정 하나 안 변하더니.

“무엇을… 하자는 거지?”

“모르는 척하지 마요, 파이. 매번 나 목욕시켜줄 때마다 거, 거기가…… 크흠, 여튼 내가 모를 줄 알아요?”

하여간 저 뻔뻔한 남자 같으니! 아직도 내가 애로 보인다는 말, 진짜이긴 한가 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나도 이제 성인이에요. 알 건 다 안다고요. 아는 거야 뭐… 그 전부터 알았지만.”

괜히 부끄러움이 몰려와 더운 열기가 온몸을 가득 에워싼다. 그래서 모르는 척 손부채 질을 하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동자를 왼쪽 위로 또르르 굴렸다.

오늘은 올해 내가 스무 살 성인이 된 기념을 맞아 특별한 파티를 개최한 날이다. 파티라고 해봐야 나하고 파이 단둘이서만 있는 식사시간일 뿐이지만. 평소보다 기름진 음식이 더 많아졌고 내 성인식 드레스가 조금 더 과감해진 것뿐, 평소와 다름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불과 1분 전에 그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지. 예상했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고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도 한 스무 번은 더 차였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아직도 네가 어린아이 같다.]

[내가 어딜 봐서 어린아이예요?]

[오해하지 말고. 네가 갓 태어난 핏덩이로 내 품에 안겼을 때의 모습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이 뜻이다.]

오늘이 내가 기억하기로는 무려 스물일곱 번째 고백이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어려서 안 된다더니, 아까는 ‘네가 여자로 보이지 않아’라는 핑계를 대서 거절을 했다.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그냥 매정하게 싫다고 하면 차라리 포기라도 하지. 저래놓고 또 밤에 나를 재워준답시고 저 커다란 손으로 내 배 위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다정하게 군다. 그렇게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니까 차여서 슬퍼할 시간도 없다.

아무튼, 내가 아직도 애로 보인다고 하니까 신경질이 났다. 뱃속이 자글자글 끓어서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친 상태로 포크를 탁! 내려놓고 한 말이 저거였다. 이번에야말로 또 차이면 저놈 내가 따먹고 도망가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파이. 대답.”

“그건 매우 좋지 않은 생각이다, 치즈.”

“왜요?”

“좋지 않다고 하면 좋지 않은 거다. 그러니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진정해.”

“그럼 어디 가서 다른 남자랑 자고 올까요? 마침 성인도 되었으니까 이제 얼마든지 정사를 치러도 문제없겠죠.”

“치즈!”

“그게 싫으면 나랑 한 번만 자요. 그럼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고백도 이제 안 해요. 완전히 포기해 줄게요. 이 정도면 꽤 좋은 조건 아닌가?”

목이 탄다. 내가 말해놓고도 자꾸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부끄러워서 돌아가시겠다. 그래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확고한 눈빛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미간에 주름이 가득 일어났음에도 왜 저렇게 아름다운지. 새삼 또 반할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먼저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쉰다.

분명 생각중이다. 저 깜찍한 머릿속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자기한테 이득이 되는 쪽이 무엇인지 일일이 따지려는 거겠지. 파이는 절대 귀찮거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을 하지 않으니까.

“좋아. 대신 치즈 네가 한 말에 대해서는 번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역시. 어쩐지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마저 거절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인 걸지도.

“물론이에요. 성년 기념선물이라고 여길게요. 이번이 마지막. 두 번 다시 매달리지 않겠어요. 약속해요.”

내가 지금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여길 떠날 생각이니까.

비록 연고도 없이 떠나는 거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그의 손에서 키워졌고, 철이 들면서부터 짝사랑에 빠져 지금까지 홀로 가슴을 앓아왔다. 세상에 철벽도 저런 철벽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지. 그러니까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겠다.

파이 역시 결심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고, 늘 그랬듯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말갛게 미소를 보이면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 가서 재가 되어버린 심장을 움켜쥔 채로.

♬  #1

긴장되는 첫날 밤. 그리고 그와 함께 보내게 될 마지막 밤. 떨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이던가.

얼굴은 날계란이 익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채고, 손바닥은 땀이 배어 축축해진 상태다. 심장은 두근두근 쿵쾅쿵쾅 멋대로 요란하게 울려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혹시나 그 소리가 파이의 귀에 들어 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떨려, 떨린다고.

지금은 그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란히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곳만 쳐다보며 코로 숨만 겨우 쉬었다.

“치즈.”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뇌가 와장창! 부서지는 줄 알았다.

“으, 응?”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보다가 또 심장이 쪼그라드는 바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꾸 확인사살을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좋지 못하다.

그는 정말 나를 여자로 보지 않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표정과 나를 향해있는 짙은 선홍빛의 눈동자가 늘 나를 보던 그 모습 그대로라서.

“…나는 치즈 네가 다시 한번 고심해보길 바란다.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처음을 소중히 여겼으면 해.”

어렵게 말문을 튼 파이가 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굴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는… 그래, 마음에 두지 않은 여성과도 얼마든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아니지. 평생 상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에 두지 않은 여성’이라는 말에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이래 봬도 아카데미 시절에 꽤 인기가 많았었는데.

거의 한 달에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 고백을 받았던 나다. 우리 아카데미의 자랑이자 타칭 여신이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였단 말이다. 그런데 왜 파이는 나를 자꾸 밀어내는 걸까? 쓸데없이 눈만 높아서 나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뜻인가? 정말 울적해지네.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남자들의 그 쭈뼛쭈뼛한 몸짓과 들떠서 상기된 표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또한 조금은 긴장할 거라고 여겼는데. 어딘지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나른한 표정이라 그게 또 은근 심장을 콕콕 찔러왔다.

“왜요? 나랑 하는 것도 귀찮아요?”

괜히 또 울컥해서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살포시 젓는다.

“그런 뜻이 아니다. 곡해 하지 말고.”

“지금 나 굉장히 대단하게 마음먹은 건데, 거기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파이가 더 상처예요.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지 그랬어요?”

“…드레스부터 벗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파이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마음이 조금 상하려던 찰나에 또 심장이 고장 난 듯 날뛰었다.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채 손을 뒤로 뻗어 드레스 끈을 천천히 풀어낸다.

평소와 똑같은 행동이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그런지 뇌도 팔딱팔딱 뛰는 기분이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사이에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군. 나는 그저 네가 좋은 배필을 만나 혼인하고, 너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는 건줄 아나봐? 누가 사천 살 먹은 드래곤 아니랄까봐 정말 인간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시네요.”

“…오래 살아도 인간은 여전히 모르겠더군.”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는 내 말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웃는다. 또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치명적인 미소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아무튼 이제 결심했으니 행동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나는 진짜 오늘 제대로 따먹고 도망갈 거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이 남자가 내 남자야. 내가 가지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두 팔로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아 더 바짝 밀착했다.

“파이.”

“말해.”

“나 말고 여자랑 그거 한 적 있어요?”

“…없진 않겠지. 오래 돼서 기억도 나지 않아.”

고작 이십년 살아온 내가 사천년을 지내온 그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불사의 육체가 아닌지라 앞으로 길어야 몇 십 년 사는 게 고작일 테지. 그럼 내가 죽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파이도 오늘 일을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그럼 오늘 나랑 하는 것도 잊을 거예요? 그러면 나 조금 슬플 것 같은데.”

“갓난아기일 때부터 스무 해가 넘도록 함께 지낸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겠지. 식사를 할 때마다 치즈를 보면 떠오를지도.”

그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씩 새록새록 떠올라 가슴을 후벼 파서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오래전, 내가 여섯 살 때 그가 내 이름을 지어준 건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였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이 뭐였더라?

[치즈같이 생겼으니 이름은 치즈라고 지어야겠군.]

아, 맞다. 그랬다. 내 연한 크림색 머리카락이 치즈와 똑같은 색이라고 이름을 치즈로 지어주었었다. 그전에는 그냥 어이, 꼬맹아, 이봐, 이렇게 불렸으니까.

그때 나는 잔뜩 심통이 나서 얼굴을 확 구기고 볼을 잔뜩 부풀렸다. 하필이면 먹을 걸로 내 이름을 짓다니. 그것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치즈라고?

그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격에 나서겠다는 의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곁들여 나온 딱딱한 호두파이를 가리키며 맹렬하게 외쳤다.

[그럼 너는 파이야! 파이처럼 딱딱하니까!]

사실 그에게는 외모만큼이나 멋진 이름이 따로 있긴 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음식이름이 아닌 예쁜 이름을 지어주기 전까지는 절대 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을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또 치즈하고 파이, 이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는 게 딱히 나쁘지만은 않더라고? 뭔가 귀엽기도 하고 부르기도 쉽고. 파이는 이름처럼 겉으로 보기에 몸은 딱딱했지만 속은 은근히 말랑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이십년의 과거는 다 추억이다. 오늘 이후로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추억.

실은 그에게 하도 차여서 아카데미의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도해보려고도 했으나 쉽진 않았다. 왜냐하면 이 드래곤이 너무 완벽하고 잘생겼거든.

나를 좋아하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매너 좋고 듬직하고 힘 있고 나름 섬세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를 봐도 별 감흥이 없다고 해야 하나?

반년 전에 무슨 왕국의 후작가 영식이 나더러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구혼을 하기도 했었다. 생긴 것도 꽤 잘 생기긴 했지만 이상한 성벽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바로 거절했다. 외모가 열일하면 뭐해? 성격이나 성벽은 고쳐서 써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내가 파이를 포기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매년 아카데미에서 미인대회 1위를 차지했다고 자랑해도 파이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여줬다. 일부러 누구한테 고백을 받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고해 바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우리 치즈 사랑받는구나.’하면서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정도?

…생각해보니 정말 나쁘네. 이렇게 만인의 사랑받는 내가 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괜히 또 울적해져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울면 안 돼. 우는 건 나중에 실컷 할 수 있어. 지금 울면 그를 볼 수 없다고.

그 넓은 가슴팍에 안겨서 코를 훌쩍거리고 뺨을 비볐다. 그의 아늑한 품에서 떨어지려니 어딘지 아쉬워서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나도 파이를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아아, 어렸을 때 엄청 커다란 바위 같은 드래곤을 하나 알고 있었지. 이런 식으로 기억하겠죠?”

“기억해주면 영광이지.”

“그리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턱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코웃음을 쳤다.

“드래곤에게 내 처음을 내어주기도 했다고 내 아이들한테 다 불어버릴 거예요.”

일부러 조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파이가 또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좋지 못한 생각이다, 치즈.”

“왜요? 세상에 드래곤과 정사를 나눈 인간이 몇이나 되겠어요?”

드래곤에게 무사히 길러진 인간도 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데.

더군다나 그는 파괴의 대명사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블랙 드래곤이다.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하고 자비 없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런 이의 손아귀에서 이만큼 오래토록 살아남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일단 어서 내 드레스 벗겨줘요. 이러다 날 새겠어요. 빨리 불타는 사랑을… 아니, 정사를 치러야죠.”

목이 조금 막혀서 마지막 말이 껄끄럽지 못하게 나와 버렸다. 그래도 그저 모른 척 시선을 내리깔고 그의 겉옷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풀어냈다.

사랑. 이 애달픈 짝사랑의 통증은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아마 평생을 가도 잊혀 지지 않겠지.

아니야. 미련 갖지 말자.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부부도 살을 맞대고 몇 년 살다보면 원수처럼 변한다고 했어. 시간이 약이라고 했으니까 떠나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를 잊을 수 있을 거야. 응. 그럴 수 있어.

“치즈.”

“응?”

“날 봐라.”

파이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양 뺨을 조심히 감싸 잡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뜨거운 온기를 머금고 있는 단단한 손가락이 귀 뒤를 스치고 지나간다. 귓가를 간질이는 묘한 감각이 솟아올라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살짝 내리깐 그의 새까만 속눈썹 아래에 짙은 핏빛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아 보이는 건, 그림자 때문일까?

“이상하군. 설마 어디 아프기라도 한건 아니겠지? 평소의 너 답지 않게 오늘따라 이리 급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몰라서 물어요? 지금 중대한 일을 치르려고 하는데 내가 나답지 않은 게 당연하잖아?”

“그, 그런가?”

음. 그렇군. 그런가보군.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내 계획이 들통 난 줄 알고 심장이 철렁.

아니, 왜 이 순간에 또 그렇게 나를 걱정하면서 다정하게 구는 건데? 정말이지 당신은 나쁜 남자야! 매번 내 속을 이렇게 휘저어놓고도 아닌 척 발뺌이나 하고!

“그럼 드레스를 마저 벗고.”

등을 조여 놓던 끈이 풀어지긴 했어도 어깨 쪽에 걸친 레이스가 있어서 완전히 벗겨지진 않았다. 그가 조심조심 내 팔에서 레이스를 빼내고 나서야 드레스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져 허물처럼 늘어졌다.

이제 살결이 거의 비치는 얇은 슬립 하나에 속옷뿐이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파이 옷은 내가 벗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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