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전화를 받았고.
그 너머에서 박명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민씨!]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박명철의 목소리.
"무슨… 일입니까."
[강민씨. 오늘 약속한 거 잊었습니까? 빨리 나오세요. 유명인사 됐다고 벌써 우리 버리려고 하면 안 돼요?]
"약속…?"
[와…! 이 사람 봐?]
"정말 기억이…."
그리고 그때.
쿵! 쿵!
"문 열어요! 한강민! 이 양아치야!"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김민희의 목소리였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직까지 퍼 자고 있다고 내가 말 했지?"
이번엔 한동희의 목소리였다.
"이 사람 영웅 됐다고 우리 버리려는 거 아니지? 오늘 일 다 끝나고 맥주 산다며! 빨리 문 열어요!"
다시 외치는 박명철의 목소리에.
풀썩!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게 끝났고.
내가 쌓아 온 모든 게 사라졌다.
하지만, 시작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그 진부한 한 문장이 지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정말인가. 내가 꿈을 꾼 건 아닐까.'
마치 지난 길고 긴 시간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탑에 올라 끔찍한 시간을 겪은 뒤, 회귀.
그리고 또 끝없이 이어진 지긋지긋한 싸움들.
그리고 나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회귀한 뒤 나의 모습이었다.
'꿈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럴 테지.
꿈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도 그 모든 순간들이 생생한 것을.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건, 전화 너머로 나를 타박하고 있는 박명철과 내가 알던 지구와는 너무도 달라진 지금의 풍경들이다.
'...재미있군.'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건, 상태창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태창.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 상태창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졌던 모든 능력들이 사라졌다는 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내가 원했던 삶을 위해선 오히려 상태창은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몸 상태만큼은 상태창이 있고 없고와는 큰 차이가 없었다.
완벽하게 단련된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으니까.
'설계자가 나를 이곳으로 돌려보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내 말 그대로.
나를 다시 지구로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평범과는 조금 거리가 먼 삶인 것 같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집과 집 안에 들어차 있는 모든 것들은 웬만한 액수로는 구매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지."
어쩌면 이 삶이야말로 내가 무엇보다 바라왔던 삶일지 모르겠다.
나에게 처음 생긴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술 한 잔.
그때.
띠리릭!
내 집의 문이 열렸고.
"와, 이 아저씨 봐. 진짜 지금 일어났나 본데?"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벌컥 열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씻어요. 오늘은 진짜 그 술집 가서 강민씨 지갑 다 털어먹을 테니까."
갑작스레 달라진 많은 것들에 대해서 알아가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테지만.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싸우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와 시답지 않은 하루.
이런 사치를 위해 그렇게 달려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옷 입어요. 나가야 되니까."
박명철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박명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런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런 박명철을 뒤로한 채, 나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옷가지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
"오늘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강민 씨."
"…별말씀을."
나는 지금 막, 한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끝낸 뒤 아나운서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뒤.
"오늘 스케쥴은 여기까지입니다. 참. 지구에 와서까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박명철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구에서 인기 스타가 되어 있었고.
박명철은 이전 위드 길드의 길드원들을 그대로 모아서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렸다.
소속된 사람은 물론 나 혼자였지만.
나 한 사람의 스케쥴을 관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인력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고 했었다.
"덕분에 저는 꽤 편하군요."
"흐…. 강민씨 편하게 만들어 주려고 저희가 내린 결정이니까요. 뭐. 우선 가시죠."
"예."
박명철은 앞장서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박명철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저들의 말에 따르자면, 오늘의 스케쥴이 끝나고 난 뒤, 내가 거하게 한 턱 쏘겠다고 했다나 뭐라나.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테고.
나는 내 계좌에 적혀 있는 숫자를 본 뒤 크게 놀란 상황이었다.
도무지 끝이 없이 이어져 있는 숫자의 행렬들에 나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술 조금 산다고 해서 사라질 돈이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입니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나와 박명철은 지하에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걸으며 내게 물었다.
"예."
"이상한 일이군요. 벌써 지구에 와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거든요."
"얼마나 지난 겁니까."
"두 달 정도 됐죠."
"두 달…."
말 그대로.
내가 설계자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그녀가 나를 지구에 돌려보낸 지 두 달이 지났다고 했다.
"그동안 지구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능력을 상실했고, 더 이상 탑에 입장할 수도 없게 됐죠."
"……."
하지만 오히려 플레이어였던 이들의 위상은 하늘을 찌른다고 했다.
플레이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수필집이 쏟아졌고, 게임,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한순간에 벼락스타가 되었으니.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수준으로는 말할 수도 없겠지.
나는 플레이어였던 이들 중에서도 정상에 올랐던 사람인 만큼.
나를 향한 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내 이름이 흘러나왔고, 드높이 솟아 있는 건물의 벽면에는 내 얼굴이 걸려 있었다.
나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에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으니.
"하긴. 처음 지구에 돌아오고 나서 강민씨는 며칠 동안 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어요."
"그랬군요."
"그럴 만도 하겠죠. 강민씨의 마지막 싸움은 아직도 사람들이 제대로 믿지 못해요."
"……."
"사실 뭐. 가장 옆에서 본 나도 믿기 힘든데 다른 사람이라고 오죽하겠어요?"
어느새 우리는 커다란 벤 앞에 도착했다.
기사는 한동희.
그리고 그 옆에서 바쁘게 전화를 하며 스케쥴을 조율하는 김민희가 보였고.
"타시죠."
그 모든 걸 총괄하는 박명철이 문을 열고 나를 차 안으로 인도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
"오셨네요. 오늘 그랜드 호텔 스카이 라운지 통으로 빌려 놨거든요. 바로 갈까요?"
"오케이. 출발 해."
한동희와 박명철의 짧은 대화를 시작으로 차가 움직였다.
"오늘 미국 쪽 애들도 온답니다. 아, 유럽 애들도요."
"걔들 말이에요. 어비스 상부에서 강민씨 도와줬던 제네시스랑 템플 쪽."
"아…."
잠시 잊고 있던 이들의 이름이 들려왔다.
"다들 지구에 와서 한 자리씩 꿰찼습니다. 그리고 오늘 강민씨 얼굴 보러 스케쥴 다 취소하고 날아온다고 했고요."
"그렇군요."
"짜식들이 의리는 있더라고요. 특히 템플 애들이 진국이에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가 그들과 함께 일했던 것이지요. 아마 박명철씨와도 잘 맞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그쪽이랑 연계해서 사업 몇 개 벌이고 있는데 합이 좋아요. 앞으로 크게 될 것 같아요."
박명철.
이 지독한 일 중독자는 지구에 와서도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난 나와는 달리 박명철은 일을 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는 어느새 한강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고.
저 먼 곳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탑이 보였다.
"참 이질적이죠."
"예."
"모든 게 사라졌어도 저 탑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죠. 철거도 불가능하다더군요.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저 탑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고 해요."
나는 대답 없이 천천히 풍경 속에 흘러가는 탑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저곳은. 어떻게 된 거죠."
하늘 위에 비쳐 보이는 천계와 마계.
"아. 한 달에 한 번씩 길이 열립니다. 물론 아직 그 누구도 넘어간 적도, 누가 넘어 온 적도 없죠. 강민씨를 제외하고요."
"제가 저곳에 다녀왔다는 말입니까?"
"예. 지금 이 지구에서 천족, 마족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내 옆에 있는 강민씨죠."
"그렇군요."
잘된 일이다.
나름 정을 들었던 녀석들이었으니까.
"모든 게 잘 된 것 같군요."
내가 말했다.
내가 잃어버린 상태창.
과거였다면 없어진 상태창을 두고 세상 모든 것을 잃었다며 통곡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상태창 하나를 잃었지만, 나는 그것 말고도 너무 많은 것을 얻어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편하게 지내십시오. 내가 도와줄 테니까요. 원하는 걸 하시면 됩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거들떠도 보지 마세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박명철이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의자에 뉘었다.
편안하다.
탑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내 몸을 감쌌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 자겠습니다."
"예. 동희야 라디오 줄이자."
"넵."
피곤했다.
아직도 지난 긴 시간의 피로가 모두 풀리지 않은 것일까.
'설계자는….'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마지막 순간 내 이마에 닿았던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그녀도 조금은 슬퍼했을지도 모르겠다.
'…….'
사실 그녀는 내가 걱정할 만한 존재는 아니다.
한낱 인간인 내가 말이지.
막상 잠을 잔다고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여러가지 상념들이 머리를 떠돌았다.
지난 삶에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다.
그저 갑자기 찾아온 또 한 번의 변화에 조금 생각을 정시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차는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갔을 무렵, 천천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막 현실과 꿈속의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그때.
[나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귓가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좌우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박명철이 물었지만.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차 속이었고, 우리는 혼잡한 서울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 시선이 본능적으로 탑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고.
번쩍!
탑 정상에 걸쳐 있는 별 하나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 완-